섭지코지 가는 길목에 멈춰서다.
붐비는 성산일출봉
성산일출봉은 아침부터 붐비었다. 수학여행을 온 파릇파릇한 학생들이 주차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주차장은 관광버스들이 들어선 탓에 전기차 충전기 앞도 가려져 있었다. 전기차 충전은 포기했다. 성산일출봉 올려다보며, 새싹같은 아이들에 섞여 구부정한 할미꽃처럼 올라갈까를 12초 정도 고민했다.
고민한 지 10초 정도 되었을 때, 대학원 워크샵으로 제주를 왔을 때가 생각났다. 술이 덜 깬 교수님 덕분에 새벽의 성산일출봉을 빗속을 뚫고 정상까지 올라간 좋지 않은 기억. 머리가 쭈뼜거렸다. 그냥 성산일출봉 밑에서 사진만 찍는 찍사가 되기로 했다.
성산일출봉은 밑에서 보면 기이한 기분이 든다. 커다른 돌 덩어리가 머리 위에 얹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섬에서 튀어나온 뾰루지 같기도 한다. 신비한 힘이 감싸고 있는 존재 같기도 하고, 제주도를 지키는 수호신 같기도 하다.
기이한 기분이 드는 건 사람들 때문이기도 했다. 봉우리를 향해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올라가는 모습을 보니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의 한 장면 같았다. 무엇을 위해 올라가는지도 모르는채 치열하게 경쟁하며 올라가는 애벌레들의 삶이 우리네와 다르지 않다.
아래에서는 신비로워 보이나 위에서 보면 아무것도 없는 하나의 봉우리인 뿐일 것을. 그래도 우리는 끝까지 올라가봐야 알 수 있는 것 아니냐며 묵묵히 올라간다. 중요한 건 봉우리까지 가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함께 하는 사람이라는 걸. 우린 왜 그리 오랜 시간을 버리고 시행착오를 겪어야 깨닫는 걸까.
오분자기 뚝배기 하나 주세요.
성산일출봉을 포기하고 나니 배가 고파 왔다. 최고 관광지 답게 성산일출봉 주차장 근처는 한국 화장품 브랜드 매장들이 즐비했다. 아마도 중국관광객 때문인 듯 했다. 사실 급히 비행기를 타느라 화장품을 챙겨오지도 못했었다. 화장품 매장을 보자마자 눈썹이 실종된 상태라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제일 싼 아이브로우 제품을 골랐다. 나의 마지막 자존심을 다급히 그려넣었다.
남자들은 모를 것이다. 여자는 눈썹이 비어 있으면 발가벗은 느낌이란걸. 벽이 투명인 화장실 안에 갇혀 있는 변기같달까. 암튼 눈썹을 채워넣고 기세가 등등해진 난 매장을 나왔다.
매장 바로 맞은 편에는 식당이 줄지어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중에 눈의 띄는 곳이 '청진동 뚝배기'집이었다. '아? 어디서 봤는데?' 알고보니 어제 밤 열심히 찾아보던 식당 중의 하나였다. 식당도 인연이란게 있나보다.
청진기 뚝배기는 참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가격도 유명한 값을 하는 것 같았다. 주문을 하고나서 조리를 시작해서인지 뚝배기를 맞이하기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맛은 그 기다림을 충족시키고도 남았다. 시원하고 칼칼한 국물은 외지인에게 제주도 뚝배기의 본맛을 알려주었다. 약간 가미된 된장 맛이 시원한 해물육수의 맛을 더 깊게 만들었다.
해물 뚝배기에는 반갑게도 엄마가 된장찌개에 항상 넣어주시던 딱새우가 들어가 있었다. 딱새우는 국물을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일등 공신이다. 까는 법이 까다롭지만, 고생한만큼 별미를 즐길 수 있다. 식당 벽에는 친절하게도 딱새우 까는 법이 붙어 있었다. 껍질을 하나 하나 까는 게 정겨워 웃음이 났다. 한 그릇을 후딱 비우니 마음도 몸도 열기가 올라 땀이 날 것 같았다.
제주도의 남동부 그리고 당근 케잌
제주도의 동부는 당근으로 유명하다. 그 중에서도 구좌읍은 제주의 주 당근재배지역이다. 토끼가 풀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듯, 동부에서 당근케잌을 먹고자 여기저기 서치를 해보았다. 나에게 낙점된 곳은 성산일출봉에서 유명한 베이커리 카페인 '카페 코지(CAFE COJI)'였다.
카페에 들어서는 순간, 커다란 창에 마음을 뺏겼고, 몽실몽실한 빵 내음에 또 한번 뺐겼다. 선택 장애가 올 정도로 맛있어 보이는 빵들이 많았다. 이럴 때는 누군가 옆에 있었으면 했다. 마구 사서 놔눠먹을 수 있도록. 결국 다 먹지도 못할 당근 파운드케잌과 빵 3개를 더 골라 카운터로 갔다.
카페 코지에는 특별한 메뉴가 있었다. 바로 '낑깡차'다. 낑깡은 아주 작은 귤처럼 생겨서 공식 명칭이 금귤이다. 어렸을 적 살았던 주택에 자그마한 정원이 있었는데, 엄마는 한 구석에 이 금귤나무를 키웠다. 1년에 한 번 나는 금귤이 어찌나 맛있던지, 한참을 앉아서 아작아작 씹어 먹었던 기억이 있다. 농축된 귤처럼 신맛은 덜하고 단맛이 강한 낑깡은 그 특유의 매력이 있다. 아는 사람에게만 단맛을 내어주겠다는 도도함과 부끄러워 맛을 감추고 있는 소녀스러움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과거 추억에서 현실로 소환당한 '낑깡차'가 어찌나 반갑던지, 얼른 시켜보았다. 결국 난 혼자 감당할 수 없는 빵 4개와 귤잼, 낑깡차를 들고 창가로 향했다.
카페 코지는 마냥 머물고 싶은 곳이었다. 시원한 창가에서 두런두런 얘기하다 보면 하루가 홀딱 갈 것 같은 장소였다. 친한 친구와 수다 떨고 싶은 곳. 혼자보다는 둘이 더 좋은 곳. 왠지 이 곳에는 혼자있기가 싫어 잠시 머물고 섭지코지로 향했다.
기후와 토질을 볼 때 구좌 지역이 당근 재배의 최적지입니다. 물 공급 조절 능력이 뛰어난 이 지역의 검은 화산토와 모래흙의 분포, 한 겨울에도 얼지 않는 땅, 해풍과 삭풍으로 형성되는 일교차에 따라 높아지는 당도는 품질 좋은 당근을 생산하는데 최고의 여건을 만들어준다고 해요. 3월말까지가 당근 수확의 막바지철이었으니 이제부터는 구좌 당근은 저장 창고에 저장되어 1년 내내 전국으로 공급될 예정입니다.
[출처] 당근과 바람, 스마트그리드의 땅 구좌읍|작성자 제주특별자치도
http://blog.naver.com/happyjejudo/220984775122
황홀했던 섭지코지 길목
나에게 섭지코지는 재밌는 기억이 있는 곳이다. 2년 전, 친구와 제주를 왔었다. 이틀내내 비가 왔지만 계획한 것은 꼭 해야하는 그 친구의 성격을 알기에 묵묵히 일정을 따라나섰다.
비바람이 휘몰아치던 날의 섭지코지. 그 넓은 섭지코지에 물에 빠진 생지 꼴을 한 여자 두명만 덩그라니 서 있었다. 보통 같으면 아마 되돌아갔을 것이다.
우린 그러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 때 내 친구는 개인적인 힘듦으로 무엇인가 자기를 괴롭힐 것이 필요했다. 누구나 그럴 때가 있지 않은가. 어딘가에 사로잡혀 있지 않으면 내가 부서져 버릴 것 같은 느낌. 남들이 이해하지 못할 지라도 기어코 해야만 하는 느낌.
그 느낌은 어딘가에 나를 잃어버려야 나를 다시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역설적인 욕구 때문일 것이다.. 결국은 새로운 나를 찾고자 하는 발버둥이다.
그런 친구를 아무말 없이 따랐다. 비바람 덕에 앞도 잘 보이지 않았지만 우린 후드티로 머리를 꽁꽁 싸매고 아무도 없는 섭지코지 산책로를 뚜벅뚜벅 올라가기 시작했다. 섭지코지 정상까지 올라 보이지 않은 바다를 보며 큰 숨을 두 번 쉬고 내려왔다. 한걸음 한걸음 마음의 짐을 덜어내며.
이번 여행에서 정작 내가 빠져든 곳은 섭지코지 가는 길목이었다. 풍경이 너무 아름다운 나머지 차를 멈춰 설 정도였다. 무인도에 떨어진 사람처럼 길이 없는 곳을 헤매며 바다 앞에 멈추어 섰다. 파스텔 풍경과 어디에서 보기 힘든 모래 바위들이 내 발을 받쳐주고 있었다. 온전히 자연이 나를 감싸 안은 순간이었다. 행복했다.
'사람이 공해다.'
사람의 흔적이 없는 바다가 이리 아름답다니. 필히
사람이 공해인 거였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파헤쳐진 땅들이 얼마나 아팠을지. 종이에 찔리기만 해도 엄살을 부리는 나로서는 상상도 되지 않는 아픔이었다. 물론 개발이 없었다면 내가 이 풍경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나같은 관광객이 이 자리에 없었다면 자연은 더 자유로웠을 것이다.
한참을 이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그리고 마음에 담았다. 답답해질 때마다 한 조각씩 꺼내어 보려고.
화장한 날의 섭지코지는 역시 예뻤다. 단, 그 어여쁜 모습은 수많은 사람들로 가려져 있었다. 섭지코지 주차장은 성산일출봉과 다르지 않았다. 비바람이 세찼던 그 때가 오히려 그리웠다.
망설여졌다. 저 사람들을 뚫고 정상을 오르면 나혼자 여행의 정점을 만들 거라은 확신이 없었다. 성산일출봉도, 섭지코지도, 내가 원한 본연의 모습을 찾기엔 너무 북적였다.
오르막을 오르지 말라는 의사선생님의 말이 내 의지를 한풀 더 꺾고자 머리 속에서 스물스물 울라왔다. 뛰지도 말고 오르지도 말라니. 난 산티아고 순례길을 꿈꾸는 사람인데 말이다. 하지만 결국 그 자리에선 의사 선생님 말을 듣기로 했다.
5분 밖에 없었던 주차장 값을 1000원이나 내면서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여행 내내 기대했던 김영갑 갤러리를 가기 위해 다시 내비를 켰다.
가자. 탐라를 사랑한 사진작가를 만나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