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갑 갤러리와 문어라면
김영갑 갤러리
"예쁘다.."
혼자 중얼거렸다. 마냥 행복한 표정으로 벚꽃이 우거진 곧은 길을 따라갔다. 내비는 왼쪽 방향을 가르키고 있었다. 김영갑 갤러리는 아름다운 벚꽃 길로 모습을 꼭꼭 감추고 단촐한 문으로 손님들을 맞이했다.
이런 예술적인 주차장이라니. 널따란 주차장으로 들어서니 푸르른 나무들이 멋드러지게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그 단촐하고 작은 문 안으로 들어서니 주황색 치마를 입은 커다란 양철 인형이 나를 반겼다. 화사한 얼굴에 슬픈 눈을 한 양철인형은 뭔가 예언하는 것 같았다.
김영갑 작가는 '엄마의 젖가슴' 같은 오름에 매료되어 평생 '이어도'에서 살며 20년 동안 제주도를 카메라에 담았다. 파킨슨병으로 작품 활동을 은퇴하고 숨을 거둘 때까지 자신의 손으로 하나하나 완성한 곳이 바로 '김영갑 갤러리'다. 이 곳에서는 작가의 애정이 깊이 담긴 제주의 모습을 만나볼 수 있다. 작품들이 시대 순으로 구성되어 작가의 생과 함께 감상할 수 있다.
양철인형을 비껴나간 정원으로 이어지는 길은 새로운 세계로 나를 인도했다. 갤러리의 정원은 제주도의 돌과 그 위에 자라난 식물 그리고 그 안에 보물처럼 숨어있는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잘 정돈된 느낌도, 내버려진 느낌도 아닌, 연애에서 밀당에 강한 누군가가 관리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신비로운 편안함을 주었다.
긴 벤치 위에서는 한 여인이 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문득 미국 잔디밭에서 누워있던 생각이 났다. 그 자유함과 편안함이 여기에 있었구나. 그걸 저 여인이 느끼고 있구나. 한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에 나도 모르게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이 여인의 자유함을 잠시나마 훔쳐보려고.
갤러리 입구로 들어서니 표와 기념품을 파는 곳이 마련되어 있었다. 김영갑 작가의 사진집, 엽서, 다이어리, 책갈피가 벽과 나무 탁자에 진열되어 있었다. 눈에 띈 것은 사진집이었다. 사진집에는 사진 뿐만 아니라 김영갑 작가가 쓴 짧은 글들이 적혀있었다. 사진 만큼이나 나의 눈을 사로잡았다. 욕심이 난 나는 사진을 찍지 말라던 직원의 눈치를 쓰윽 보았다. 마침 뒤돌아 앉아 있는 걸 확인하곤 펜을 얼른 꺼내 내 손이 날아가라 메모를 했다.
참기 힘든 좌절, 분노, 절망이 나를 힘들게 할 때면, 나는 나만의 비밀화원에서 눈, 비, 안개, 바람에 젖고 시달리는 축복을 통해 하찮은 내 존재를 다시금 확인합니다. 그곳에서 나라고 하는 존재는 아주 작아져 풀이 되고, 나무가 되고, 곤충이 되면서, 그들의 삶에 순하게 동화되곤 합니다. 내가 말하기보다는 그들의 이야기에 가만히 귀 기울일 뿐입니다.
- 김영갑 사진집 <오름> '나만의 비밀 화원' 중
자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진 작가. 그것을 오롯이 카메라에 담기 위해 보냈을 수많은 시간들. 그의 순수한 열정과 애정이 글에서 전해져 왔다. 그만의 비밀화원이 되었을 제주에서 나 또한 자연의 위대함 앞에 겸허해지고 있었다. 왜 그의 작품들이 하나같이 가로 길이가 긴 형태를 가지고 있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 광대함을 나같은 독자들에게 전해주고 싶었을 것이라.
살아있는 존재로서 광활한 자연을 만나게 되면 얼마나 내가 옹졸한 사람인지 깨닫는다. 넓은 자연의 마음을 닮고 싶어 자아를 내려놓고 마음을 열게 된다. 아마도 김영갑 작가도 같은 걸 느꼈으리라.
어느 하나에 진득하니 몰입하지 못하고 방방곡곡 바람처럼 떠돌았다. 내 안에서 부는 바람을 어쩌지 못해 전국을 떠돌다가 바람 타는 섬, 제주에 정착했다. 제주의 바람에 홀려 20년 동안 바람을 쫓아다녔다. 동서남북, 섬 중의 섬, 바람 지나는 길목에서 질기게 생명을 이어가는 나무처럼 풀처럼 시련을 온 몸으로 견디며 세상을, 삶을 느끼려 했다. 아니 제주도를 이해하려 했다. 나에게 다가오는 어떤 시련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했다.
- '바람에 실려 보낸 이야기' 중
김영갑 작가의 생에 대한 다큐멘터리로 시작해 대표작품들로 전시는 구성되어 있었다. 작가가 직접 인화한 초기 흑백 사진들 부터 현대의 컬러 사진까지 시대 순으로 다양하게 그의 작품을 접할 수 있었다. 그의 작품을 보노라면 좋아하는 것을 위해서 많은 것을 포기한 듯 했다. 변변한 집도 없이 살았고, 사진을 찍느라 들판 한 가운데 서 있으면 수상한 사람이라고 경찰에 신고 당하기도 했다.
나도 무엇인가 무조건 좋아서 몰두했던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물'이 좋아서 매일 수영을 했다. 아무도 없는 수영장에서 내가 고요한 파동을 일으키는 그 느낌이 좋아서 마냥 수영을 즐기기만 했다. 어느덧 학교 대표가 되어 있었고 많은 메달을 따기도 했다. 정작 나에게 상은 메달이 아니라 대회 날에만 느낄 수 있는 차가워서 고요하고 무거운 '물'이었다. 물 안에서 앞만보고 가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무념무상의 상태라고 할까. 김영갑 작가도 비바람을 맞으며 들판에서 사진을 찍을 때 그런 기분이었을까.
하지만 그건 어릴적 이야기이다. 나이가 들수록 우린 여러가지 상황과 쓸데없는 책임감으로 스스로를 괴롭힌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하고 살 수 없다고 자신과 타협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태평양 같은 오지랖으로 김영갑 작가의 생계을 걱정한 게 아니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제주도 사진을 모든 걸 걸고 찍을 수 있는 용기는 대체 어떤 것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모든 걸 걸고 하나만 하고 살 수 있는 열정이 부러웠다. 하나만 보고 갈 수 있을 정도로 좋은 것. 다른 것을 가지지 않아도 행복한 것. 그것이 바로 열정의 한 모습이 아닐까.
열정은 때때로 우리를 시험한다. 한 길을 간다는 것은 수없이 많은 장애물들을 넘는 것과 같다. 그 장애물들은 우리에게 질문한다. 그 길을 위해 무엇까지 포기할 수 있느냐고. 포기와 열정은 어쩌면 다른 말이 아닐 거다. 선택의 순간에 포기할 수 있는 것. 이로인해 진정한 열정이 모습을 드러내니 말이다.
이제 나만의 비밀화원은 옛 탐라인들과 함께 호흡하며 울고 웃었던 예전의 그 화원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져 더 이상 태고적 신비와 고요를 느낄 수 없게 된 그곳을 나는 이제 나의 기억 속에서 지우려 합니다.
- '잃어버린 이어도' 중
개발이 되어가는 제주도를 보며 김영갑 작가는 상실의 아픔을 느꼈던 모양이다. 그건 마치 어릴 적 놀던 공터 놀이터가 없어지고 그 곳에 삭막한 주차장이 생긴 느낌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김영갑 작가는 그래서 이 조그마한 땅을 자신의 손으로 일구어냈다. 돌 하나 흙 한 줌 넣어가며 파킨슨 병으로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자신만의 비밀화원을 만들어갔다.
이 조그마한 비밀화원엔 정원도 있고 뒷 산책로도 있다. 게다가 정말 적절하게도 무인카페가 있다. 자신의 손으로 커피를 내리고 설겆이까지 하는 카페다. 카페 안은 다녀 간 사람들의 방명록으로 가득차 있고, 고요하고 따뜻하다. 창 밖으로는 아기자기한 뒷뜰 산책로가 보이고 김영갑 작가의 세상이 보인다. 그가 무엇을 꿈 꿨는가를. 그가 무엇을 해냈는가를.
그 곳에서 나는 그가 던진 삶에 대한 질문을 답해보려 애를 쓰고 있었다.
나의 열정과 나의 삶이 다르지 않음을. 열정이 곧 삶일 수 밖에 없음을 깨달으며.
고래라면 집 문어라면
김영갑 갤러리에서 나왔을 땐 내 눈앞에는 그의 사진이 어른거렸고, 내 가슴에는 그의 열정이 번져있었다. 주차장으로 걸어나오며 심호흡을 여러 번 했다. 이 상태가 쉬이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상태로 차를 몰고 다시 벚꽃 길을 따라 나오다 곧 나는 갑자기 차를 멈추어 설 수 밖에 없었다.
"끼익"
고래라면이라고 적혀있었다. 분명 고래라면이라는 간판이었다. 음식에 대한 호기심은 절대 지나치지 못하는 난 그 길에 대충 주차를 하고 얼른 그 가게로 들어갔다. 내가 세상에서 젤 좋아하는 라면을 제주에서 먹다니. 메뉴를 얼른 살펴봤다. 고래라면, 해물라면, 문어라면....저거다. 문어라면. 왠지 끌린다.
유명한 가게였던 모양이다. 가게 안은 만석이라 앉을 곳이 없어 나 혼자 야외 테이블로 나갔다. 야외테이블에는 고양이 부부가 다리 밑을 점령하고 있었는데, 나를 위해 슬그머니 피해주었다.
문어라면의 비주얼은 내가 상상하던 바였다. 튼실한 문어 다리가 라면 위에 아름답게 자리잡고 있었고, 그 밑에는 여러가지 해물이 라면면발과 뒤엉켜 있었다. 왠지 라면에서 제주바다 냄새가 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사실 그런 향은 나지 않았다. 국물을 한 숟갈 퍼서 입으로 가져갔다.
맛있었다. 그런데 아주 조금 아쉬웠다. 문어 맛보다는 라면 스프맛이 조금 더 강하게 났다. 아무래도 문어 향이 강력한 MSG를 이기지는 못한 것 같았다. 야외에서 커다란 문어다리를 통째로 잘라 먹는 가게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걸 알기에 그냥 그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나를 요리조리 쳐다보는 고양이 부부와 함께.
제주에서는 무엇이나 맛있기 마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