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7편

신천목장에 핀 야생화

by SUN KIM

"아, 배부르다!"


문어라면으로 배를 채우고 나니, 어디론가 드러눕고 싶었다. 목장은 그것이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책에서 봐두었던 '신천목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신천목장'에 대한 사전 정보가 전혀 없었다. 책에는 가을철 귤 껍질을 바닥에 말리는 광경이 유명하다는 설명 뿐이었다. 단지 저번에 가 본 '성이시돌 목장' 이외에도 좋은 목장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뿐이었다.


"목적지 근처에 도착했습니다. 길 안내를 종료하겠습니다."


이런. 목장 문이 닫혀있다. 높지 않은 목장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문 옆에는 작은 판이 붙어 있었다. '관광객 출입금지'. 문이 열려 있더라도 들어갈 수가 없었다. 분명 어떤 관광객들이 이들의 소중한 자산을 망가뜨렸겠지.

너무나 아쉬운 마음에 요리조리 살펴보다 목장 문 옆으로 샛길이 있는 걸 발견했다. 차가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아 얼른 시동을 걸고 작은 샛길로 스스륵 접어들었다.


말아! 뭐 먹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한 무리의 빛깔 고운 말들이 풀을 뜯고 먹고 있는게 아닌가! 말들과 나 사이엔 낮은 돌담뿐이었다. 손을 내밀면 다읗을 듯 한 거리였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말들은 자유롭고 건강해보였다. 관광객을 태우기 위해 훈련을 받아 지친 말이 아니라, 들판을 뛰노는 말 본연의 모습이었다.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이었지만 잠깐 씁쓸한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쳤다.



사람도 무엇을 이루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람 자체로서 존재한다. 그 존재만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될 수는 없는 걸까. 목적과 성취의 관점으로만 사람을 바라본다면, 서커스 단에 끌려다니는 말과 사람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씁쓸한 생각을 뒤로하고 연신 핸드폰 카메라를 눌러댔다. 안타깝게도 온전히 담아지지 않았다. 특히 갈기가 바람을 타고 출렁이는 모습, 햇빛이 탐스러운 말의 표면에 닿아 미끄러지는 모습들이. 다행히 작은 망아지를 둘러싸고 보호하는 행동, 알 수 없는 사람이 가까이 다가서자 대장 말이 위험 신호를 주는 행동, 그 신호를 따라 대장 말을 따라가는 행동들은 현대 기술로 남길 수 있었다.



낯선 사람이 서성거리자 긴장을 했는지 말 무리는 언덕 끝을 향해 이동했다. 그들이 향하는 바라보던 나는 언덕 끝에서 희끗희끗한 파란색을 보았다.


새파란 바다였다.


그렇다. 신천목장의 끝은 해안가를 따라 만들어진 올레길과 맞닿아 있었다. 한 면은 바다, 다른 한 면은 목장의 평야로 이루어진 장관이 내 앞에 펼쳐졌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관통해 저 멀리 평야로 날아갔다. 감탄사를 내밷지 못할 정도로 평화로왔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며 눈을 감은채 바다 앞 들판에 드러누웠다. 자연의 일부가 되어 죽은 듯 누워만 있고 싶었다.


"저쪽에 가면 야생화가 있어요"


갑작스러운 낯선 목소리에 누운 채로 눈을 번쩍 떴다. 금슬 좋아 보이는 한 중년 부부가 나를 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남편분의 손가락이 평지 끝을 가리키고 있었다. 민망한 나머지 벌떡 일어나 고맙다는 인사를 하곤 빙그레 웃어보였다.


손가락이 가리키던 방향으로 걸어가자, 바다쪽 절벽에 아기자기한 야생화가 무수히 피어있었다. 엄마가 좋아하시던 야생화. 연약해보이지만 강한 생명력을 지닌 존재. 순응할 듯 보이지만 결코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화. 혹독한 생활에서 오히려 생명의 빛을 발하는 야생화. 그래서인지 야생화는 나에게 희망의 꽃처럼 느껴진다.



중환자실에 3번씩 드나들면서도, 산소기를 끼고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면서도, 고통 속에서도 자식을 위해 포기하지 않고 생명의 줄을 잡았던 엄마. 그 줄을 놓을 때까지 집안 곳곳의 사람들을 챙기며 자식에게 강인한 정신의 힘을 보여주었던 엄마. 엄마는 야생화를 닮았었다.


꽃을 좋아하시던 엄마는 봄이 되면 베란다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산소공급기 전원 줄을 최대한 늘어뜨려 베란다에 고개를 쏘옥 내밀고는 나무에 핀 꽃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뽀얀 미소를 띄며 꽃에게 말하듯 "아이구, 예쁘네.."라며 혼잣말을 하곤 했다. 그리곤 꽃이 바로 앞에 있듯 떨리는 가녀린 손가락을 들어 꽃 대신 유리창을 살포시 만졌다. 마치 세게 만지면 저 멀리 있는 꽃잎이 떨어지기라도 하듯이.


야생화를 바라보니 그 속에 파묻혀 환하게 웃는 엄마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 했다. 야생화의 꽃향기를 살큼 맡아보며 발그레 해지는 모습도 내 눈 앞에 나타났다.

상상으로나마 건강한 엄마 모습과 잠시 머무르려는 마음에 꼼짝하지 않고 쪼그려 앉아 야생화를 바라보았다. 사진을 남기는 것도 잊은채.


상상 속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와 정신을 차렸을 땐 주위가 어느덧 어둑어둑해지고 바람도 거세어져 있었다. 주위는 서늘해졌지만 마음의 온기가 몸으로 전해졌는지 춥지 않았다.


이젠 상상과 이별할 시간이었다. 옷을 툭툭 털고 일어나며 조용히 다시 찾을 날을 기약하며 조용히 안녕을 고했다.


달팽이 게스트하우스입니다


"아차차, 입금을 했어야 했는데!"

신천목장을 나오는 순간, 숙박비를 미리 입급하지 않은 사실을 떠올리며 급히 게스트하우스에 전화를 했다. 문제는 입금할 곳이 목장 주변엔 없었다. 전화를 받으신 건 게스트하우스 고모님이셨다.


"아무 소식이 없어서, 안 오시는 줄 알고 취소했습니다."

"아, 정말요?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입금을 하고 전화를 드렸어야 했는데, 너무 늦게 연락을 드렸습니다. 그럼 오늘 방이 없는 건가요?"

탐탁치 않아 하는 목소리가 돌아왔다.

"한 방이 비어있기는 합니다. 그럼 오신다는 말씀이지요?"

"네네, 지금 당장 입급할 은행을 못 찾아서 그렇지만 한 시간 안에 입금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냥 오세요. 오셔서 현금으로 주셔도 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가슴을 쓸어내린 나는 얼른 엑셀을 밟으며 내달렸다. 내 생애 첫 게스트하우스를 향해.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