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8편

서연의 집 그리고 달팽이 게스트하우스

by SUN KIM

어떻게 다람쥐가 도토리를 지나칠 수 있겠는가.


달팽이 게스트하우스로 항하는 발걸음이 바빴지만, 가는 길에 갈 수 있는 카페를 빠르게 물색했다. 내가 찾은 곳은 카페 '서연의 집'. 이 곳은 수지를 국민 첫사랑으로 등극시킨 영화 <건축학개론>의 배경이 되었던 카페다.


영화 <건축학개론>의 마지막 장면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서연과 승민이 만나는 마지막 장면. 창이 커다란 이 집이 바로 카페 '서연의 집'이다. 이 곳에는 '서연의 집' 뿐만 아니라 '승민의 작업실'도 작은 별관으로 마련되어 있다.

건물을 둘러보니, 2층보다는 1층이, 1층 중에서도 창가나 앞마당이 머무르기가 좋았다. 카페 곳곳에는 건축학개론과 관련된 문구와 기념품을 조용히 판매하고 있었다. '사주세요~'라는 노골적인 제스추어가 없이 편안한 분위기였다.


인상적이었던 건 카운터에 놓여져 있던 새하얀 명함이었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라는 문구가 또박또박 적혀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 글귀가 가슴에 또렷이 새겨졌다.


"그래, 그럴거야..."

명함을 본 순간, 아주 오래 전 나를 많이 좋아해주던 친구 하나가 생각났다. 분명 그 친구는 나를 사랑했던 것 같다. 내가 첫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사랑이 상호적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비극적인 고전 소설따윈 존재하지 않았겠지. 나는 그 아이와 같은 감정이 될 수 없었고, 친구로도 남을 수가 없었다. 그 이유가 궁금하기는 했다. 나는 왜 그 괜찮은 친구를 사랑할 수 없었을까.


카페 별관 '승민의 작업실'


이유야 여러가지일 수 있다. 우연히 난 그 이유 중의 하나를 알 기회가 있었다. 십몇년만에 그 친구와 연락이 되어 만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오랜만난 그 친구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때 너가 떠나지 않았으면 지금 사모님 소리 들으며 살고 있을텐데..'라며 너스레를 떨었었다. 그 순간 내 머리 속이 멍해지고 발끈하는 마음이 솟아올랐다.


"나는 누구의 '사모님'으로 살기를 바랬던 게 아니야. 그건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야"라는 말이 목구멍이 끝나는 지점까지 밀고 올라왔다. 끊어졌던 전기줄이 다시 이어진듯 내 머리 속은 십몇년 전으로 돌아가 그 친구의 행동들이 줄줄이 생각났다. 나를 많이 좋아해주었지만 정작 나의 가능성은 인정해주지 않았던 그 아이.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 할 수 없는 것들만 나열하던 그 모습이 떠올랐다.



'맞아, 그때 그랬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 중의 하나인 '500일의 썸머'에서 남자주인공 톰이 썸머와 함께 했던 상황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찰나같았다. 톰이 이전에는 생각치 못했던 썸머의 작은 행동들을 기억해내면서 썸머가 행복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던 순간. 나도 과거에는 찾을 수 없었던 기억의 조각들이 십몇년이 흐른 후에야 그 모습들을 드러내며 진실의 순간을 맞이한 것이었다.


그 당시엔 내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질 때 느낄 수 있는 안락감을 그 친구에게서 느끼지 못한 것 같다. 오히려 내 가능성을 인정하려 오기가 생겼던 게 사실이다.

그래, 그건 시간이 지나도 마찬가지였겠구나. 오히려 더 심해졌겠지. 십몇년이 흘렀지만 지금이라도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는 것에 오히려 감사하다.


그 친구에겐 발끈하지도, 그 이유를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우린 이미 좋은 과거만 기억해도 모자란 나이가 되어가고 있기에.


카페 '서연의 집' 1층 경관

이 명함 한 장 덕분에 난 카페 '서연의 집'을 더 기억하고 싶어졌다. 커다란 창의 시원함과 씁쓸한 추억이 준 먹먹함을 함께 기억하겠지만 말이다.


힐링이 필요하다면, 달팽이 게스트하우스

추억 되새김질은 시간을 잡아먹는 먹보다.

신천목장과 카페에서 꽤 긴 시간을 보낸 덕분에 계획했던 쇠소깍에서 계획했던 간식을 포기해야 했다. 천국을 느끼게 해주는 주황빛 천혜향 아이스크림과 귤잼이 든 통통한 하루방 빵의 콤비가 아쉬웠다.


어쩌겠는가. 다 내 책임일 걸. 한 숨을 한 번 내쉬고 엑셀을 밟았다.


대신 게스트하우스 근처에 있는 올레시장에 들러 흑돼지 고로케와 천혜향를 사기로 했다. 먹을 게 많은 올레시장에 더 머물 수 없는 게 안타까웠지만, 더 지체했다간 잘 곳이 없어질 판이었다. 결국 게스트하우스 고모님께 드릴 천혜향 10개와 흑돼지 고로케 2개를 사서 달랑달랑 들고 게스트하우스로 향했다.


"목적지 근처입니다. 안내를 종료합니다."


드디어 내비는 안내를 종료했다. 그런데 돌담집은 온데간데 없고 잘 정리된 도로 중간에 내 차만 덩그라니 서 있었다. 안내대로 도로에 주차하고는 주위를 맴돌았다.

사진을 요리조리 비교해보니 달팽이 게스트하우스가 달팽이집처럼 골목 안으로 쏘옥 들어가 있는 게 아닌가. 주인은 친절하게도 돌담길을 따라 백열등이 켜두었다. 밤중에 아련한 등빛이 다른 세계로 나를 인도하는듯 했고, 나는 홀린 듯 따라 들어갔다.



돌담길 끝에는 자그만한 건물 3개가 다른 세상을 만들고 있었다. 카페같은 분위기에 불현듯 제대로 찾은 것인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마당으로 고개를 자신없게 힐끗 내밀어 보니 에너지 가득한 고모님의 목소리가 나를 반겨주었다. 바로 이곳이었다.


"아고, 이제 왔어요?"


고모님의 인심좋고 따듯한 얼굴에 긴장하고 있던 나는 맥없이 녹아버렸다. 고모님은 찾는게 어렵지 않았나며 걱정해주시며 방으로 안내해주셨다. 하나는 게스트룸, 다른 하나는 식당과 서재, 그대로 남겨진 돌담 건물이 마당을 둘러싸고 있었고, 샤워실은 알록달록하게 새로 지은 것 같았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이었다.


혼자쓰는 방이라 아담한 독방으로 준비하셨다는 고모님은 씽긋 웃어보이셨다. 난 미안한 마음에 얼른 천혜향을 내밀었고 고모님의 입꼬리가 한껏 올라간 것 보았다.

뿌듯한 마음을 품고 들어선 독방은 아기자기한 핑크와 체크무늬가 돌담의 흰천장과 이상하리마치 잘 어울리는 것을 보고 놀라움으로 변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곳의 침구들과 커텐들은 주인장이 직접 손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설명하기 힘든 따듯함이 마음 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까실까실한 이불의 감촉은 고모님이 침구를 얼마나 위생적으로 관리하시는지 알려주었다. 풀을 먹인 듯한 까실함은 여느 호텔 침구보다 나았다.


'오늘은 제대로 잠을 잘 수 있겠구나..'


성산 선라이즈 호텔에서의 악몽이 되살아나면서 안도감이 들었다. 긴장이 탁하고 풀렸는지 나는 모르게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한참을 멍하게 방 분위기에 도취되어 있는데, 배에서 꼬르륵하고 아우성을 쳐댔다. 아, 내가 밥을 안먹었지. 올레시장에서 산 흑돼지 고로케를 가방에서 주섬주섬 꺼내들고 식당으로 향했다.



고모님이 편안한 얼굴로 재즈음악을 듣고 계셨다. 음악선곡도 어찌나 좋은지. 돌담과 재즈과 어울릴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범상치 않은 감각에 감탄한 나는 먹는 내내 고모님께 질문을 퍼부어댔다. 맛이 기가 막힌 흑돼지 고로케 2개를 먹어치우는 동안 고모님과 나눈 대화에서 얻어낸 정보는 다음과 같다.


1. 달팽이 게스트하우스는 제주 게스트하우스 1세대다(문을 연지 7년이 넘었다).

2. 주인장은 30대 후반이며, '고모님'의 실제 조카다.

3. 원래 윗집, 아랫집, 옆집이 영업 중이었으나, 건물주의 갑질로 본거지인 윗집을 뺏았겼다. 아랫집과 옆집만 남았다(내가 묵은 곳은 아랫집이다).

4. 주인장은 세계 여행을 다니다 이 게스트하우스를 만들었다. 그리고 게스트하우스를 돌봐줄 사람으로 고모님을 점찍었다.

5. 고모님도 종종 게스트하우스를 닫고 주인장인 조카와 함께 여행을 다니신다.

6. 달팽이 게스트하우스의 서재에 있는 모든 물건은 주인장이 세계 각지에서 수집한 것이다.

7. 난로 위에 있는 것은 고구마가 아니라 말을 형상화한 예술작품들이다(실제로 가신 분은 찾아보시길).

8. 게스트하우스의 모든 침구는 주인장이 직접 손으로 만들었다.

9. 고모님은 게스트하우스의 모든 침구를 매일 세탁하신다(달팽이 게스트하우스의 변하지 않는 원칙이다).

10. 달팽이 게스트하우스는 1주일이상 머무를 수 없다(기간이 길어질수록 사람들이 룰을 지키지 않아서 이런 씁쓸한 원칙이 생겼다).

11. 달팽이 게스트하우스에 머무를 수 있는 아이들의 수는 2명이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다른 게스트들이 조용히 지낼 수 있도록 하는 배려다)


이 외에도 기억하기엔 너무 많은 대화가 오갔다. 고로케가 거의 소진되어갈 쯤에 새로운 여자 게스트 2명이 들어와서야 대화가 끝났다. 고모님은 방을 안내하러 가시고, 나는 든든한 배와 흡족한 마음을 가지고 방으로 돌아왔다.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서.



"내가 원한 여행이 이런 것이지."

자리에 누운 나는 괜시리 마음이 들떴다. 새로운 사람과 얘기하기. 새로운 환경에 들어가기. 두려워하지 않고 길 잃기. 이 세가지가 달팽이 게스트하우스에서 마법처럼 이루어졌다. 비가 온다던 내일이 기대되었다.


분명 마법같은 하루가 될 것 같았다. 행복했다.

고맙다. 달팽이.





혹시나 달팽이 개스트하우스를 가고 싶으시다면...

http://m.blog.naver.com/jejusn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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