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9편

생허브차가 구한 하루

by SUN KIM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달팽이 게스트하우스에서는 기절한 듯 푹 잤다. 눈을 뜨니 하얀 천장과 나무 대들보가 머리 위에 보였다. 향긋한 이불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왜 여행만 오면 일찍 잠이 깨는지. 셀레어서 그럴까. 일상도 이리 설레면 참 행복할텐데.


한결 가벼워진 몸을 이끌고 천천히 방문을 열어 젖히고는 거실로 어슬렁 어슬렁 걸어나왔다. 고요했다. 모두가 자고 있는 모양이었다.


신을 구겨신고 마당으로 나가자 어제밤에 봤던 고양이 두 마리가 나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 도망을 갔다.


"야옹아, 안녕?"


피식 웃으며 아무렇게나 기지개를 폈다. 제주의 아침 공기는 민트향이 나는구나. 달콤시원한 민트초콜릿의 향. 폐 속 구석구석을 깨끗히 청소해주는 느낌이랄까.


새벽 안개가 걷힐 때쯤 달팽이 게스트하우스 식당 '물고기 휴게실'에 불이 켜졌다. 고모님이 일어나신 모양이었다. 어둑한 마당을 지나 식당으로 건너가니 나를 친조카인듯 친근하게 맞아주시며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셨다.


고모님 손엔 토스트 하나가 들려 있었고 땅콩스프레드를 바르시던 참이었다. "여기 토스트도 있고, 계란도 구워먹을 수 있으니 편하게 먹어요." 토스트를 먹을까 잠깐 고민을 하던 사이, 어제 가방 밖으로 꺼내지도 못했던 당근 파운드케잌이 생각났다. 얼른 방에서 꺼내와 작고 하얀 접시에 통통한 파운드 케잌을 올려놓았다.


"허브차 좋아해요?"

"그럼요!"

"생허브차 만들어 줄까요?"


생허브차라니! 이렇게 은혜로울수가! 마다할리가 없다. 고모님은 나를 이끌고 게스트하우스 앞쪽에 숨어있는 밭으로 나를 데리고 가셨다.

세상에. 밭은 생허브로 가득차 있었다. 레몬밤, 세이지, 레몬그라스, 수도 없이 많은 허브들이 자라고 있었다.


고모님은 나를 위해 조금씩 잎을 따셨다. 연신 감탄사를 내뿜는 내 모습에 신이 나셨는지 차이점까지 열심히 설명하셨다. 조경을 전공하셨다는 고모님은 다 기억하지도 못할 정도로 많은 허브를 당신 자식처럼 키우시고 계셨던 게다.


뚝뚝 딴 허브를 고이 고이 식당으로 모셔와 흐르는 물에 착착 헹구시고선 하얀 접시에 가지런히 놓으셨다. 접시에 놓인 그 모습이 어찌나 예쁘던지. 결국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들이대고 사진을 찍어댔다.



고모님은 따뜻한 메밀차에 생허브를 넣어주셨다. 그 따뜻함이 고스란히 내 마음에 전해져서인지 차와 빵을 사이에 두고 고모님과 난 두런두런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행을 다니실적 얘기며, 제주살이 얘기며,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이미 출발해야할 시간은 훌쩍 넘기고 있었다.


'이제 가야하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꼼짝하기가 싫었다. 그 때 거짓말처럼 비가 오기 시작했다.


타악 타타닥 타다타닥.. 비는 곧 사방을 둘러싸고 내렸다. 소음이 없는 곳에서 듣는 빗소리는 청량하기도, 무겁기도 했다. 아마도 여행이라는 홀가분함과 삶의 무게가 느껴지는 대화 때문이겠지.



두런두런 이야기하던 중 고모님이 지나가는 말로 하신 말씀이 내 마음에 콕 하고 박혔다.


"혼자 오는 손님은 나하고 얘기를 많이 해요"

머리 속에서 종소리가 났다. 생소한 깨달음이라고나 할까.


아, 그렇구나. 내가 혼자였구나. 그래서 이 시간이 그토록 소중했구나.


고모님의 말을 듣기 전까진 내가 외로워한다는 걸 미처 깨닫지 못했었다. 이틀째 아무와도 대화하지 않았던 탓에 나도 모르게 고모님을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외로움을 잘 느끼지 않는다고 자부했던 나였다. 그런데 내 행동은 내가 '외로움'을 느끼고 있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3년 전의 나라면 그랬을까? 아니다.


결국 '혼자'라는 사실도 '혼자'라고 느낄 때와 그렇지 않을 때가 있구나. 그건 혼자라는 사실이 변한 게 아니라 내 마음이 변한 거구나.


결국은 상황이 아니라 내 상태였다. 외로움만 그렇겠는가.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마찬가지겠지.


외로움을 인정하고 나니 세차게 내리는 비가 차라리 시원하게 느껴졌다. 왠지 이젠 외로움도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젠 정말 떠날 때가 되었다.


고모님은 매일 꼬박꼬박 하시는 빨래 걱정을 하시며 나를 보내주셨다. 챙길 것도 없는 짐을 주섬주섬 싸서 고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


'짐이 참 없네요..' 고모님은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왠지 칭찬인 것 같아 마음에 뿌듯해졌지만, 막상 떠나려니 왠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웃으며 배웅해주시는 고모님을 자꾸만 뒤돌아 보니 고모님이 한 마디 하셨다.

"떠날 때는 뒤돌아보지 말고 가야해요!"


과거에 지난 일들은 모두 잘한 일이니 앞만 보라고 하셨던 목사님의 위로가 떠올랐다. 그렇게 난 따뜻한 질책을 귀에 얹고 어여쁜 초록의 돌담을 지나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다.



세찬 비 속에서 내 여행도 내 마음도 구해준 생허브차 한 잔과 달팽이 게스트하우스에 안녕을 고하며 본태박불관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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