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화바다를 탐하다 (2017.04.03 저녁)
공항에서 가장 가까운 해변은 어디일까?
막상 렌터카에 시동을 걸자,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한 마음이 들었다. 이 여행을 위해 준비한 거라곤 고작 공항버스 안에서 급하게 구입한 <나 홀로 제주> 라는 ebook과 오늘밤 묵을 성산일출봉 근처 숙소 뿐이었다.
ebook을 뒤적거리다 오르쪽 시트 위에 지도가 눈에 들어왔다. 공항을 빠져나오면서 0.1초 만에 잽싸게 집은 지도였다. 지도에는 제주의 주요 관광지가 별표로 모두 표시되어 있었다.
"가장 가까운 곳이 어디지?"
"삼양..검은모래..해변?"
"뭐, 가보지 뭐!"
시동소리 조차 들리지 않는 전기차 시동 버튼을 힘차게 누르고, 카카오 내비게이션 앱 안내를 '부드러운 남자 목소리'로 설정했다. 그 부드러운 목소리가 음악과 함께 나를 삼양검은모래해변으로 인도하길 기대하면서.
30분이라니. 길을 잘못 든 것까지 생각하면 정말 가까운 거리였다. 24시간 가동되는 나의 길치 본능에 '부드러운 남자' 내비조차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조금 아쉬웠으나 첫 제주해변인 삼양검은모래해변에 무난히 도착했다.
제주 바다다!
제주도에서 처음 만난 해변. 나는 들떠있었다. 들뜬 나머지 거기서조차 입구를 찾지 못해 헤매었다. 심지어 주차장을 넘어 투명 보호막으로 해변이 보이는 곳에서.
무우말랭이를 찾아달라는 언니의 요청에 내 눈에만 보이지 않는 반찬통을 찾아 냉장고 속을 헤매는 것처럼 답답했다. 입구가 보이지 않아 머릿속에 혼란이 온 순간, 두 모자가 나를 지나쳐 투명 보호막 사이로 쏘옥 들어갔다.
"아! 입구가 저기였구나! " 혼자 되뇌었다. 혼자니까.
나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언니가 한 숨을 쉬고 일어나 냉장고에서 무우말랭이를 찾아 준 느낌이었다.
삼양검은모래해변은 아주 작은 해변이었다. 생각만큼 모래가 까맣지는 않았다. 마른 모래들은 색이 조금 어두운 정도였으나 물을 머금은 모래들은 조금 더 검은색을 띄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현무암에서 떨어져 나온 암편들 때문에 검은 모래가 되었다한다. 게다가 용천수가 유명해 근처에 용천수탕도 있고, 검은모래 찜질도 많이들 즐긴다고 한다.
'역시 사람은 공부를 해야 한다'는 반성과 함께 '뭐. 이러면서 알게 되는 거지'라며 스스로에게 하는 위로가 이중인격처럼 동시에 일어났다.
탁트인 제주 바다, 나를 다 품어줄 것 같은 바다를 보고 있자니, 몇 시간 전만 해도 서울집 침대에 파묻려 있던 내모습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가까운 걸. 비행기로 한시간밖에 안되는 거리를 왜 그리 멀다고 느꼈을까. 필히 그건 물리적 거리가 아닌, 괜한 걱정이 벌려 놓은 심리적 거리였을 것이다.
내가 없으면 회사가, 세상이 큰 일날 것 같다가도, 한 발짝 떨어져 있으면 내가 없어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된다.
아무도 내 행복을 책임지지 않는다.
반짝반짝 빛나는 바다를 보니 빛이 바랬던 내 마음에 빛이 조금씩 스며들어갔다. 마음이 밝아지니 시야가 넓어졌다. 왜 이런 행복을 포기하고 살았나 싶다. 내 행복은 그 누구도 챙겨주지 않는 것인데.
빛을 머금은 바다색보다 좋았던 건 바다의 짭쪼름한 내음과 숨이 거친 파도 소리였다. 제주바다의 바람은 세찼지만 따뜻했다. 마치 츤데레처럼. 바다에 직접 가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후각과 청각으로 눈을 감은 채 제주바다를 온 몸으로 만났다.
바다 앞에 멍하니 앉아 있자니, 무우말랭이도 생각나고 슬그머니 서울에 혼자 있을 언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얼른 바다 사진을 찍어 전송했다. '오~~~~~~'라는 대답이 재빨리 돌아 왔다. 그러자 더 미안한 마음이 커졌다. 약을 올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서는 사진 전송을 멈추었다.
문득 해가 질 것만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해 지기 전에 <나홀로 제주>에서 봤던 '세화바다'에 가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화바다 가는 길에 어떤 유명한 해변에 들렀다. 그런데 해변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단지 신혼부부들이 사진을 많이 찍고 있었다는 점과 해변 앞에 편의점이 많아 바나나 우유를 살 수 있어 좋았다는 점만 기억난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이 유명한 해변은 내가 원한 바다가 아니었나 보다. 난 북적이지 않는 조용한 바다가 그리웠던 게다.
세화바다. 탐하고 싶은 이름.
세화. 이름부터 뭔가 아기자기하고 섬세한 느낌이다. 탐하고 싶은 이름이랄까. 느낌이 틀리지 않다는 걸 도착한 순간 알았다. 작은 돌담 앞에 차를 세우자 세화바다가 눈앞에서 파스텔 색을 뽐내고 있었다.
파스텔 색 바다에 빠져있던 나를 깨운 건 커피향이었다. 내가 찾던 '카페공작소'가 그곳에 있었다.
세화바다을 닮은 카페 공작소는 바다를 향해 앉아있다. 커다란 창문이 카페 내부를 바다에게 휜히 보여주고 있었다. 낮은 나무 계단을 올라가 옆으로 문을 끼익 하고 열니, '절대정숙'이라는 말이 눈에 띄었다.
"조용히 쉴 수 있는 카페를 지향합니다.
조용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눠주시고
아이를 동반한 손님은 조용히 돌봐주세요."
고객을 훈계하는 카페라니! 마음에 들었다. 카페 내부는 '절대정숙'이라는 말에 어울리게 알록달록한 교실 같이 꾸며져 있었다.
카페공작소는 여러모로 참 인상적이었다. 카페를 찾는 사람들은 바다 앞에 마련해 놓은 테이블에 앉아 분위기 있게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카페 창에는 아날로그 감성이 배인 글을 써 놓아 엽서같은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사진으로 만드는 추억엽서를 누가 마다하겠는가.
"에스프레소 마끼아또도 있나요..?"
솔직히 커피 맛을 기대하진 않았다. 메뉴에 없는 에스프레소 마끼아또를 찾는 나를 50대 초반의 흰머리가 희끗한 분이 흘낏 쳐다보셨다. 왠지 '미스테리 박'이라고 부르고 싶었던 이 분은 무심한 듯 에스프레소 마끼아또를 내놓으시고 사라지셨다.
왠걸, 정말 부드러운 에스프레소를 내려주신게 아닌가. '미스테리 박'이 주인장인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세화바다는 따뜻해서 특별하다.
세화바다는 따뜻했다.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졌던 건 바다를 함께 즐기는 사람들 때문인 것 같았다.
카페에는 서로 사진을 찍어주는 가족 단위의 손님들도 꽤 보였는데, 이들은 저마다 재미있는 표정과 행동으로 미소짓게 만들었다.
'어릴 적 이후로 저렇게 사진 찍은 적이 없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우리 가족도 저렇게 사진을 찍을 수 있으면 참 좋았겠다 싶었다.
오래 아프셨던 어머닌 아프고 부은 자신의 얼굴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하지 않으셨다. 함께 찍은 사진이 거의 없다.
엄마를 집에서 억지로 찍은 게 몇 개 남아있지만, 남은 보여주지 않고 고이 나만 간직하고 있다. 퉁퉁부은 자신의 얼굴이 얼마나 어색하고 싫었을지 생각하면 그 마음이 이해가 된다.
새하얀 벚꽃 같았던 얼굴이 까만 시든 장미처럼 변해가는 과정이 그 누구보다 싫었을 엄마다. 미적 기준이 높았기에 항상 나에게도 언니에게도 '예쁨'을 강조했던 엄마이기에, 자신의 얼굴이 싫을 만도 했다.
하지만 나의 기억에는 그저 빨간 입술에 하얀 얼굴을 가진,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살갖을 가진 엄마의 모습만이 남아있다. 연예인 얼굴처럼 CD로 얼굴이 가려지는 얼굴크기며, 한 번 만지면 중독된 듯 계속 만지게 되는 하얀 살갖이 지금도 부럽고 그립다.
바다를 보며 가족에 대해 깊이 생각했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단지 자꾸만 가족들에게 왜 눈이 갔을까 생각해보니, 그 기저에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다.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예쁜 풍경을 봤을 때, 좋은 걸 먹을 때, 시시때때로 '같이 할 수 있으면 좋았을 걸'이라고, 머리가 아니라 마음에서 엄마가 먼저 떠오른다.
그렇게 나는 세화바다에 한참을 머물렀다. 카페에서 만든 작은 공책도 6권이나 샀다. 공책 표지에 세화바다와 제주의 모습이 선물처럼 담겨있어 도저히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마치 물건에 내 기억을 꼭꼭 담아서 가져갈 수 있는 것처럼, 고민없이 카운터에 카드를 내밀었다.
해가 지는 세화바다는 파스텔톤에서 점점 원색으로 변해갔다. 원색이 뭉쳐져 푸르스름한 검은색이 될 때까지 고요히 바라보았다. 성산으로 출발해야지 해야지 되뇌이면서 말이다.
오늘 하루 참 길고 행복하다.
오늘 하루 참 그리울 것 같다.
-세화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