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담배를 끊었지만, 연통은 줄담배를 피운다

- 뒷베란다 연통들이 밤마다 뱉어내는 하얀 수다에 대하여

by 선비천사

밤이 되면

우리 집 뒷베란다 연통들이

하나둘씩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다


해만 지면 아파트 뒷골목은 연기 짙은 비밀회의장이다

101호부터 1505호까지, 벽에 박힌 은색 주둥이들이

일제히 하얀 입김을 뿜으며 밤새도록 시치미를 뗀다


"야, 503호! 자네 오늘도 윗집 양반 씻기느라 줄담배가 심하구먼?"

"말도 마쇼, 탕에 물 받는 소리만 들리면 내 속이 다 타들어 가네."

"거 봐, 1204호는 아예 입술이 고드름으로 얼어붙었어."

"이게 무슨 개똥 같은 운명이야, 주인 놈 안방 데우느라 난 밖에서 코 흘리고."


한때는 우리도 공장에서 갓 나온 은빛 스무 살이었지

이 벽을 뚫고 세상 밖으로 고개 내밀 땐

무협지 고수처럼 멋진 검기(劍氣)라도 뿜을 줄 알았는데

현실은 날마다 매연 가득한 독설이나 게워내는 굴뚝 신세라네


"그나저나 저기 802호 시인 양반 좀 보게."

"담배 끊었다고 자랑하더니, 밤마다 원고지 앞에서 쿨럭거리네."

"쯧쯧, 저 양반도 우리랑 같은 과(科)야."

"입으로 담배는 안 피워도, 머리로 하얀 글줄기 뿜어내는 꼴 좀 봐."


앞동의 세련된 창들이 우아하게 불 밝힐 때

우리는 어두운 뒷베란다 벽에 박혀서

서로의 매캐한 입김을 안주 삼아 밤을 지새운다


"어이, 수명 다해서 불 꺼지는 날까지 부지런히 뿜어대자고."

"뒷방 늙은이들 숙명이 다 그렇지 뭐. 남 좋은 일 시키다가 하얗게 흩어지는 거."


새벽공기에 연통들이 내뱉는 하얀 문장들이

아파트 벽면을 타고 몽글몽글,

서로의 시름을 달래듯 허공으로 쿨럭쿨럭 사라지고 있다.



*같이 보면 좋은 글

시옷 둘이 건너간 길


이 글의 행간에 다 담지 못한 더 많은 그림과 소박한 기록들은 저의 개인 블로그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언제든 편히 들러주세요.

작가 방철호의 블로그 방문하기

[전자책] 바람이 지나간 자리엔 마음이 남았다 | 방철호 | 알라딘

이전 04화꽃이 다 가려버린 것들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