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다 가려버린 것들에 대하여

- 낙화 이후에 시작되는 것들

by 선비천사

꽃이 지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꽃은 제 몸을 다 써서

나무의 눈을 가리고 있었다


분홍의 소란이 바닥으로 쏟아지자

길들은 다시 제 방향을 드러내고

나무는 감았던 눈을 떠

제 발치를 내려다본다


바람에 쓸려가는 건 향기가 아니라

한때 뜨겁게 앓던 흔적들


짓이겨진 꽃잎이 진흙 속으로 스며들 때

나무의 등줄기엔 비로소

딱딱한 초록의 뼈들이 돋기 시작한다


허공에 덧입혔던 분홍이 다 비워져야

계절은 겨우 정직한 속살을 내보이는 법


꽃이 진 자리마다

그늘의 두께가 깊어지고 있다


이제야 계절이, 제법 묵직한 발걸음을 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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