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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manf Oct 11. 2021

7. 하나님이 있다면 왜 고난을 주실까?


성경을 읽기 전에는 내가 아는 것을 진실로 생각했다. 그런데 성경을 읽고 주님을 알아가니 내가 알던 진실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가로막은 장애물이라는 것을 하나씩 알아가고 있다. 욥의 이야기도 그중 하나였다. 하나님과 악마의 내기처럼 보여 어떻게 하나님이 한 사람의 믿음을 가지고 시험을 하시나? 전혀 하나님 같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인생을 살면서도 고난을 겪게 되거나 끔찍한 사건들을 접할 때면 하나님이 있다면 왜 저런 일을 방조할까? 그래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거야. 그렇게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오늘 욥기의 이야기는 사뭇 다른 시선으로 하나님의 의도를 깨닫게 해 주었다. 먼저 욥기의 전체적인 스토리는 이렇다.

욥의 시작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욥을 설명하고 그가 얼마나 풍요롭고 복된 삶을 살고 있는지 서술한다. 그는 잔치를 끝내면 혹여 아들들이 마음으로 죄를 범해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겁이나 항상 사람들의 명수대로 번죄를 드리기도 했다. 그런 욥을 흡족하게 생각하는 하나님께 사탄이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까닭은 하나님이 집과 소유물과 땅을 넘치게 받고 복을 받아 그리하는 것이라 말한다. 하나님은 그런 사탄에게 그의 몸에는 손대지 말고 소유물을  맡기겠다 말한다.  , 욥은 가지고 있던 재산과 아들 딸을 모두 잃지만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와서 주신 이도 주님, 거두신 이도 주님이라고 찬송하며 주님을 예배한다.  모습을  사탄은 욥의 몸을 아프게 하면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사라질 것이라고 하고 온몸에 종기가 나게 한다. 욥의 아내는 온전함을 지킬  있겠냐며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말하지만 욥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고 되받아친다.  , 친구들이 위로하러 왔고 욥은 아예 태어나지도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탄식하며 현재에 평온도, 안일도,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한 상태의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한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잣대대로 욥에게 충고하고 욥은  말을 아파하면서도  고통 속에서도 숨을 쉬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한다.  그가 심판을 하시는 하나님의 위엄을 믿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그를 확고히 변론하시는 것도 주님임을 알아본다. 욥은 끊임없이 자기의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외치며 하나님에게만이 자신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울부짖는다. 극한 고통 속에서도 욥은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이가 주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자기에게 조언하는 친구들로 인해 고통이 더해지자 거룩한 분노로 하나님과 자신과의 확실한 관계에 대해 울부짖는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자신의 생애를 비웃지 않겠다고 말한다. , 아무리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해도 자신의 처지가 좋지 않자 돌변하는 사람들을 바라봄으로 주님에게  곤고한 시선으로 고정하게 된다.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자신을 의롭다 하는 욥과 하나님의 관계를 분명히 알리고 욥은 자신을 의롭다  것에 대해 회개하고  고난을 통해 살아 있는 주님을 깨닫고 이전보다  많은 복을 받게 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욥은 물질이 풍부하고 사람과의 관계도 너무 좋았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도 안다. 하나님에게서나 세상에게서나 사랑을 받는 인물이다. 그렇게 사는 것이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이고 모두 다 그렇게 살다 죽기를 바란다.

하지만 사탄은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은 욥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하나님은 그것을 욥에게서 앗아가기를 허락하신다. 당장은 욥의 불행처럼 보인다. 풍족한 재산, 사랑하는 아들 딸, 누이와 잔치를 같이 할 정도로 친밀한 가족관계,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 욥은 이것을 누리면서 한편으로는 그것이 조금이라도 불경해 하나님을 노하게 할까 봐 끊임없이 잔치 후 번죄를 드린다.

이것은 욥이 사랑하는 것들을 잃어버릴까 치르는 의식으로 보였다. 잃을까 두려워하는 마음과 집착으로 보였다. 그 중심을 주님은 아셨고 고난을 허락함으로 건강한 몸, 의식주, 사람의 관계마저 모두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허락에 의한 관계임을 분명히 하셨기에 욥은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고 본다.

그것은 42장 5절의 욥기의 고백처럼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하고 그는 보는 것처럼 주의 뜻을 완전히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욥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생활이 풍족하고 가족관계, 친구관계에서 아주 만족스럽고 성경공부에 시간을 더 많이 할애하니 늘 주님께 감사할 것뿐이었다. 그때도 이 모든 것이 주님의 뜻이라 생각하며 기쁘게 생활했지만 한편 혹여라도 내가 짜증을 내면 불경을 저지른 것만 같아 금방 죄를 자백하고 회개했다. 하지만 더 깊은 내 마음의 중심은 그 만족스럽고 행복한 일상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길 집착하는 것이었고 나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관계가 삐끗 대고 갑자기 예상치 못한 상대의 반응을 겪자 한 순간에 내가 완벽하게 생각했던 내 생활과 일상이 무너졌다. 견고하게 여겨지던 내 일상과 강하게 생각했던 내 마음이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것을 보고 나는 당황했다. 하나님의 말씀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절망으로 빠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꾸준히 붙잡았고 마침내 그 모래성은 내 손으로 지어진 성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주님은 어차피 그것은 허물어지는 성이었다는 것을 아시기에 그것을 허무시는 주님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하나님은 누구인지? 나에게 하나님은 어떤 존재인지? 내가 왜 존재하는지?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은 무엇인지 기초를 다져서 세워주시고 있다. 뼈대부터 튼튼하게 다시 쌓는 일을 하시는 것이다. 나는 그 고난을 통해 주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고 있다. 끊임없이 성경공부와 성경 말씀에 관한 생각을 글로 쓰는 일을 지금 하게 만드시기 때문이다. 말씀 묵상과 공부, 일상과 연결 지어 글을 쓰게 함으로 탄탄한 기초를 다지게 하고 계신다.


주님이 진정으로 일하고 계신 것을 내 일상으로 보고 있기에 눈으로 주님을 본다는 욥의 고백을 너무도 공감한다.

그렇다면 주님은 욥을 시험한 게 아니라 사탄을 시험한 것이다. 물질을  풍부하게 주니까 욥이 주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탄을 시험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완벽하게 주님의 승리였다. 욥은 완벽하게 주님에게 그 시험을 맡기고 주님께서 싸우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 싸움에서 주님과 자신의 바른 관계를 한번 더 확실히 봤고 쉽게 변하는 사람들을 바로 볼 수 있게 되었고 몸의 질병, 삶과 죽음이 모두 주님의 주권 안에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게 되었다.

사탄은 계속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시험한다. 우리는 눈으로 보는 자신이나 타인의 고난을 불행이라 여기며 하나님을 원망한다.

왜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다면서 불평과 원망할 때는 그리 쉽게 하나님을 믿는가?

그 이유는 고난을 통해 사람들을 하나님에게서 불평과 원망으로 떼어놓고 사탄의 종으로 삼기 위함이다.  


주를 믿는 사람은 고난 속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것을 보게 하신다.  그때에 자신이 앉았던 자리에서 완전히 물러나 주님께 그 자리를 드리고 주님께서 사탄을 상대로 그 고난과 싸워 이기게 한다. 나는 나를 감싸 안고 싸워주시는 하나님을 그 어느 때보다 명백하게 보게 되니 완전히 찬양하고 경배하는 시간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하는 사실은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를 고난으로 시험하지 않는다. 정의롭고 선하신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나쁘게 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이 벌하시는 경우는 우리가 지은 죄를 통해 우리를 깨닫게 하려 하시는 것, 우리 행동을 바로 잡아 궁극적으로 우리를 위함뿐이다. 예를 들어, 우리 아이가 좋아하는 사탕이 있다. 나와 아이는 맛있지만 아이의 몸에 좋지 않은 그 사탕을 하루에 하나씩이라고 약속을 한다. 하지만 아이가 절제하지 못하고 그것을 많이 먹을 때, 나는 그것을 며칠은 절대로 주지 않고 아이를 울린다. 아이에게는 그것이 벌이고 고난이다. 하지만 제제하는 나의 의도가 나를 위한 것인가? 아이를 위한 것인가? 주님은 그런 훈육만 하시는 것이다.


관계에서 멀어지고 깨지게 하고, 아무리 먹고 마셔도 허기지게 하고 목마른 고통은 사탄의 시험이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원망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당장은 내 입에 달콤한 사탕을 내밀어 결국 내 이를 썩게 하고 내 몸을 뚱뚱하게 만들고 결국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이 사탄의 목적을 이루는 시험이다. 그런 시험이 올 때, 나약한 나를 인정해 더욱 하나님을 붙잡아야 하나님이 사탄을 상대로 사악학 시험에서 싸워 이겨주신다. 주님이 아니고서야 나는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그러니 고난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 필요가 있다. 고난을 허락하심은 사탄이 시험으로 삼기 좋은 모든 것을 주님께서 무찔러 주시려고 하심을 명심하고 무엇이든 주님께 매달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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