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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manf Feb 04. 2022

29. 출애굽기에서 본 바로 왕


요즘 출애굽기를 읽고 있다. 430년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지냈고 하나님이 노예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모세를 통해 구원해주시는 이야기. 그리고 그 과정은 모세를 세우는 것부터 순탄치 않았다. 모세는 주님의 약속과 이적에도 계속 주님께 못 가겠다고 한다. 마침내 하나님은 화를 내며 그에게 형 아론을 붙여주고 모세를 하나님처럼 만들어 주겠다고 설득해 애굽으로 보낸다. 그리고 완악하게 이스라엘 사람을 보내지 않는다는 바로에게 열 가지 재앙이 내린다. 재앙 후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지만 마음을 바꾸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서 나가는 것을 뒤쫓아 오다가 홍해에서 죽게 된다.

모세는 하나님이 택하셨다는 것과 바로가 마음이 완악한 것은 주님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 그렇다면 그것은 운명론적이기에 희망이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운명론적인 시선으로 보면 하나님의 명령에 몇 번이나 싫다고 하는 모세는 하나님이 택하셨기에 크게 쓰임을 받고 바로는 하나님이 안 믿도록 하셔서 그 열 가지 재앙을 다 받고 죽었다고 생각하니 불공평했다.

정의의 하나님이 이렇게 하실 리가 없었다.


다시 문제의 발단에 돌아가서 정의의 하나님이라는 기준을 세우고 믿는 자, 믿지 않는 자를 택하신 주님을 가정으로 세워봤다. 그래서 모세와 바로의 행동의 결과가 팩트다. 추론과 팩트로 맺은 결론은 하나님이 믿는 자, 믿지 않는 자를 정했으니 우리는 할 일이 없고 노력할 일이 없다고 나왔다. 그렇다면 복음이 무슨 소용이고 전도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앞뒤가 맞지 않아 고민 고민해보자 나의 가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다시, 정의의 하나님은 불변하는 기준이다.

가정은 하나님은 믿는 자를 택하신다는 것이다. 믿는 자를 택한다는 말이 믿지 않는 자를 택하신다는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믿음의 사람을 주님이 택하셔서 구원의 사역을 그 사람에게 기업으로 준다. 그리고 믿음으로 택함을 입은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주님이 직접 이적을 보임으로써 믿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접하고 믿고 믿지 않는 것이 개인에 선택에 두신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자율의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추론과 팩트, 결론을 갖고 다시 바로에게 적용해보니 스토리가 이해되었다.

물론 처음에는 바로는 하나님께 완악하게 굴다 재앙을 받고 홍해에서 죽고, 죽은 후에도 심판을 받아 불구덩이에 떨어졌다는 단순한 것이었다.

하지만 바뀐 가정과 도출된 결론의 스토리는 바로는 하나님을 믿지 못했지만 하나님이 보내준 모세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 10가지, 하나님이 보여주신 이적을 보고 열 번이나 믿을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들을 자기 나라의 요술사와 같은 마법이나 우연히라고 치부해버리고 믿지 않았다. 장자가 죽을 때까지 그는 하나님을 부정했고 장자를 죽이시면서까지 주님께로 돌아오길 바랬지만 끝까지 자기의 자율의지로 자신이 왕이 되어 주님께 돌아오지 않고 이스라엘 사람을 뒤쫓아 복수하려다가 마침내 홍해에서 죽게 되었고 그의 영혼은 지옥의 불구덩이에 빠지게 되었다.

주님은 믿지 않은 바로에게 재앙을 준 게 아니라 믿음으로 택한 모세를 보내 복음을 듣고, 열 번의 기회를 주어 주님께 돌아오길 바랬다. 그를 구원하고 싶으셨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모세와 아론, 그리고 그 사람들을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의 이적을 보여주시며 그토록 구원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율의지를 가진 그는 끝내 주를 자신의 왕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자기가 왕이 되어 죽었다. 자기가 왕인 자의 최후는 죽음이었다. 그것이 끝이라면 좋겠지만 영혼은 지옥으로 던져지는 심판까지 받았다.

자, 믿는 자인 우리에게는 주님의 일이 명확해졌다. 우리를 믿는 자로 택하신 것은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업이다.


그리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믿는 자를 보내셔서 복음을 전하고 재앙으로 보이나 구원의 축복을 위해 이적을 행하시는 주님이 있다는 것. 그리고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믿을지, 믿지 않을지는 각 사람의 자율의지에 있다는 것. 결국 믿지 않는 자는 믿음을 선택함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믿지 않음을 선택한다면 사망과 지옥의 결과가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믿지 않는 사람을, 따라오지 않는 잃어버린 양처럼 귀하게 여길 주님, 모든 양을 두고도 그 길 잃은 양을 찾느라 정신없이 수고하실 주님, 어떻게든 사망과 지옥에서 건져주시려고 때론 재앙이라도 내려 우리를 회심시키려는 주님의 마음을 알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믿지 않는 사람의 마음은 완곡해 장자를 죽여야지만 돌아올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와 같이 아프게 하시지 않으시려고 마법사들이 따라 할 만한 작은 시련을 통해 그 속에서 역사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여주신다.

사람들이 무수히 ‘우연’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것이 사실은 ‘기적’이고 ‘구원’의 손길이었음을 알고 주님께 구원받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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