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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manf Apr 15. 2022

30.반드시 인과관계가 있는 건 아니다.


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한국에서 받고 정신없이 14시간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들어갔다. 공항에서 하는 PCR 검사에서 한 달 전에 코로나에 걸렸던 것이 아직 남아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1주일 동안 자가 격리되었다. 나는 몇 번을 호텔에서 자가테스트를 했고 증상을 확인했지만 네거티브였고 난 그 어느 때보다 건강했다. 하지만 한국 정부에서는 Rapid test를 무시하기에 내가 걸렸다가 나았다는 모든 검사지와 결과지를 들고 갔지만 소용없었다. 굳이 원인과 결과를 따지자면 미국과는 다르게 PCR를 미리 준비를 하고 왔더라도 공항에서 다시 검사받게 하는 문제 때문에 나는 자가격리를 해야 했다. 하지만 나라마다 다르고 이미 미국은 비행기 타기 전에 Rapid검사로 확인하면 끝이기에 그렇게 정의로운 원인이 아니라 각 나라의 정부 바침 때문에 그런 결과가 뒤따랐다. 

1주일 후, 아빠의 장례를 치르면서 20년 동안 보지 않았던 아빠를 작년 여름에 찾아가서 편지 10장을 줬는데 읽지 않았다는 사실과 평소에 내가 재산 권리가 있을까 봐 새엄마 이름 앞으로 집 명의를 해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4살쯤 사진이 볼이 오통통한 사진이 있었는데 내가 우스게 소리로 뚱뚱하고 못생겼다고 하니 고모가 뚱뚱한 게 아니라 맞아서 부은 것이라 했다. 

내가 그때부터 아빠에게 맞았다고 했다. 

내가 집을 나오게 된 것이 아빠의 폭력이었다. 나는 내가 맞은 원인을 오랫동안 찾아왔었다. 내가 기억한 첫 폭력은 7살이었는데 인형이 갖고 싶어 만원을 훔쳐 인형을 샀고 들켜서 몽둥이로 맞았다. 그건 돈을 훔친 이유라고 생각했고, 중/고등학교 때도 공부를 안 한 이유로 맞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4살부터였다니. 그 이유가 무엇이 되었던들, 볼이 퉁퉁 부을 만큼, 그것도 얼굴을 맞을 수는 없었다. 그건 완전히 이유가 없었다.

나는 그 몰랐으면 좋았을 사실을 들고 미국에 돌아왔다. 그리고 거의 2주 동안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았고 계속 피곤하기만 했다. 우울증에 빠진 것이다.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반드시 따른다고 믿었던 내 세상에 4살의 내가 얼굴이 퉁퉁 부을 정도로 맞은 것은 원인이 없었다. 나는 그 사실을 감당하고 받아들여야 했다.

그동안 이유를 찾기 위해 7살 때는 돈을 훔쳐서, 공부를 안 해서 맞은 것을 원인이라 생각했는데 그것도 이유라고 치기엔 지나친 학대였다. 그것이 반드시 이유가 될 수 없었다. 아빠가 나를 학대한 것은 나를 가르치고 훈육하던 게 아니었다. 그 모든 이유가 내가 맞은 학대의 원인이 될 수 없었다. 그저 내가 굳이 원인을 결과를 연결시켜 아빠를 이해해보고 용서해보려고 했었던 것이었다.


요즘 사무엘상을 읽고 있다. 다윗과 사울의 스토리. 사울은 하나님이 자기를 떠나 다윗에게 임하심을 알기에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돼 그를 찾아내려고 쫓는다. 그때였는지, 다윗이 쓴 시편 11장,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더러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쩜인고. 하며 주님이 함께 계셔도 사울에게 쫓기는 자신의 상태에 대해 힘겨움을 토로한다. 시편 59장에서는 나의 하나님이여 내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일어나 치려는 자에게서 나를 높이 드소서, 사악을 행하는 자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에게서 나를 구원하소서, 저희가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엎드려 기다리고 강한 자가 모여 나를 치려 하오니 여호와여 이는 나의 범과를 인함이 아니요 나의 죄를 인함도 아니로소이다, 내가 허물이 없으나 저희가 달려와서 스스로 준비하오니 주여 나를 도우시기 위하여 깨사 감찰하소서라고 울부짖는다. 

다윗에게도 사울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이유는 원인은 없다. 사울에게 충성했고 사울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의 아들 요나단과도 깊은 우정의 관계에다 사울의 딸 미갈과 결혼도 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기름 부어 왕으로 삼은 자라는 것을 알기에 사울을 죽일 상황이 됐을 때도 옷자락만 베며 자신의 진심을 말한다. 

세상에는 어떤 결과에 대해 반드시 정확한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나쁜 일은 자기의 행동이나 말과는 상관없이 그저 일방적으로 당할 때도 있다. 그것부터 인정해야 한다.

내가 아무리 부당하고 억울하다고 해도 이 세상에서 죄 한점 안 지으신 의로운 분이 자기를 십자가에 박으라는 사람들을 위해 죽으신 예수님만큼 억울하거나 부당한 대우를 당할 수는 없다.

주님은 하나님으로 우리 사이에 오셨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말씀을 전하신 일만 하셨다. 아픈 사람을 고치시고 깨닫게 하시며 구원하시는 일에 최선을 다하셨다. 로마인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했다. 죄가 없는데 사람들은 죄를 덮어 씌우고 때리고 찌르고 침 뱉고 욕하고 조롱하고 희롱하고 죽여 버리라 소리 질렀다. 극악한 강도를 풀어주어도 예수님은 풀어주면 안 된다고 소리 질렀다. 그 상황을 생각해본다면 내가 당한 억울한 일은 서로가 이기적으로 자기가 옳다고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쩜 당연한 일이다. 나도 다른 사람을 알게 모르게 억울하게 만들기도 하고 다른 사람도 나를 그렇게 대우한다. 우리는 모두 죄성과 죄성이 부딪히기에 서로에게 사랑을 느끼기도 하지만 서로에게 아픔을 느끼기도 한다. 


어떤 부당한 결과가 생기면 꼭 상대가 아닌 결과 자체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인식해야 한다. 그렇다면 내가 원인이라는 생각에 너무 위축되지 않을 수도 있고 , 굳이 상대가 원인이라고 비난하지 않고 결과 내에서 문제를 찾아볼 수 있다. 내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다음 단계는 남을 사랑할 때는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해야 하고 내가 억울할 때는 주님을 떠올리면 그 상처가 조금 경감될 수 있다.

아빠가 나를 때린 것, 그 자체, 그 결론에 문제가 있었다. 그건 아빠가 자신의 삶을 감당하기 힘들었고 자식을 감당하기 어려워서 분노를 어린 딸에게 표출한 것이다. 내가 원인이 아니었다. 내가 문제가 아니기에 나를 사랑하는 동시에 나는 억울하지만 그런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떠올리면 위로가 된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죄성을 가진 인간이기에 비록 아빠에게 받은 상처는 크지만 또다시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다른 사람을 믿고 사랑할 수 있다. 그 선택은 내가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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