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엄마의 일기 1

by Momanf

[5.28

오늘은 보리가 “엄마. 여기는 오른쪽이야”이라고 또박하게 말하며 오른쪽 방향으로 손을 뻗고 정확히 지시했다. 어린이집에서 방향을 배우고 와 처음에 헷갈려하더니 밥 먹는 손이 오른쪽이라 가르쳐 준 후부터는 실수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어려워하던 단어들은 내가 다시 말하면 똘망한 눈으로 내 입술을 쳐다보며 웅얼웅얼 따라 몇 번을 반복해 보고는 또렷하게 자기 입으로 발음한다. 그렇게 단어 하나하나가 늘더니 문장을 만들어 내고 이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쉴 새 없이 잘하는 우리 보리가 기특하다. 고물고물 기어 다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화장실에 가서 혼자 배변을 보고, 자기가 먹고 싶은 것,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정확하게 나에게 요구한다.

보리는 앞으로도 자신의 시간에 맞게 발달하고 잘 자랄 것이다. 성과들이 생기면 나와 Ryan에게 보여주며 우쭐해하는 우리 보리. 우리 보리는 주목받고 칭찬받으면 더 신나게 잘하는 타입이다. 보리가 해내는 작거나 큰 성취들을 잘 관찰해 함께 기뻐하고 칭찬해주면 아이는 참 행복해한다. 우리 보리는 잠이 올 때 가끔 때를 쓰거나 심술을 부릴 때도 있다. 가끔 자기 고집대로 하려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야단치기보다는 말로 천천히 잘 설명하고 차분히 보리에게 선택할 기회를 준다면 언제나 옳은 선택을 하는 센스 있는 아이다. 보리의 마음을 배려해주지 않고 야단을 치면 보리의 고집을 절대로 꺾을 수가 없다. 우리 보리는 낯선 환경에 수줍음이 많다. 하지만 적응하기 시작하면 그 누구보다 집중 하기에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새로운 환경을 노출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가 잘 적응할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다양한 것들을 시도해주면 자신의 재능을 잘 찾아갈 것이다. 보리는 사람에게 관심이 많아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표정을 유심히 관찰하기를 좋아한다. 책을 읽다가 나는 문득 보리가 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는 사실을 종종 발견한다.]

수경은 펜을 놓고 긴 한숨을 내 쉬었다.

‘쫑알거리며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보리는 엄마와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할 텐데 그것을 누가 채워줄 수 있을까? 고민이 있거나 답답할 때, 엄마가 필요할 때 나처럼 하늘만 쳐다보고 한숨짓게 되는 건 아닌지....‘

아무리 죽는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먹고 또 먹어도 하루에도 몇 번씩 ‘왜 하필 나인지’ 대상도 없는 원망이 치밀었다. 현재에 충실하자 할수록 여태껏 살아온 시간 속에서 ‘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나’의 후회만 가득했다.

엄마 없는 세상에서 아이들이 홀로 남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자신의 준비물을 직접 챙겨야 하고, 마음이 힘들거나 아플 때, 기대어 울 엄마 품을 내어 줄 수 없다는 것이 수경을 서럽게 만들었다. 둥지에서 막 알을 부수고 나온 젖은 털로 짹짹 거리며 우는 새 새끼들을 엄마 없는 빈 둥지에 남겨둔 것만 같았다.

‘알 속에서 나와 이 큰 세상에서 엄마도 없이 불안할 내 새끼들, 배고플 내 새끼들.... 내가 벌을 받고 있구나. 자식이란 것은 이미 장성했다고 하더라도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불안할 법한데 한참 엄마 손길이 필요한 네 살짜리 아이들의 가슴에 피멍이 들겠구나.’

수경은 왼쪽 가슴을 쓸어내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수경은 아이들이 자라 자신의 일기를 읽을 생각을 하니 자신이 어렸을 때 했던 고민들이 떠올랐다. 친구 문제, 학업, 자신의 꿈과 직장문제. 크고 작은 문제들을 겪으며 그때 자신에게 무엇이 힘이 되고 도움이 되었는지 기억해 내려 애썼다.

‘Ryan을 위해서 영어로 적어야 되는 건 아닌가? 우리 아이들도 아빠 따라 미국으로 가버리면 한국말 대신 영어만 쓰겠지? 그렇다면 이 일기를 읽을 수 있을까?’

수경은 문득 걱정이 되었다.

‘내가 친정이라도 있다면 아이들이 외갓집과 왕래하며 한국말을 할 수 있을 텐데.’

수경은 턱을 괴고 멍하니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한국어만큼 영어로 표현하기에는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지금 자신과 하고 있는 한국말을 완전히 잊는다고 생각하니 자신이 그렇게 잊힐 것만 같았다.

수경은 눈가가 뜨거워짐을 느꼈다. 한참을 멍하니 생각하던 수경은 다시 펜을 잡고 일기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한국말로 써야 해. 그래야 아이들이 한국말을 잊지 않고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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