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두 번째 기회

by Momanf

오늘도 수경은 모두가 잠든 밤에 화장실이 가고 싶어 눈을 뜨니 새벽 3시쯤이라는 걸 확인하고 혼자만의 고요한 시간이 좋아 들뜬 마음으로 일어났다. 카디건을 걸치고 조용히 주방으로 나와 전기 포트에 물을 끓이며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다가 뜨거운 김이 새어 나오자 번뜩 정신이 들어 티백 하나를 포트 안에 넣었다. 머그잔에 뜨거운 차를 부어 거실로 나와 소파 위에 담요를 덮고 앉았다. 어둠이 깔린 창 밖, 건물들의 실루엣을 바라보며 따듯한 차 한 모금이 목구멍으로 흘러 몸속으로 내려가는 느낌을 따라가 보며 눈을 감았다. 눈을 뜨니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 보이는 거실 TV 옆에 걸린 가족사진에 시선이 멈추었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아도 사진 속의 아이들의 웃음과 남편과 자신의 미소를 기억하고 있다.

육아가 고되지 않고 즐겁다고 말한다면 은밀하게 뭔가를 숨기는 기분이 들고 고되다고 말하기에는 아이들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조금 진부하긴 해도 아이를 키우는 것은 버겁고 힘들지만 보람되고 즐거운 일이라는 말이 가장 어울렸다. 부모의 모든 시간은 아이가 기준이 되기에 아이가 잠든 틈에 미뤄 두었던 일을 해야 하거나 즐거운 육아를 위해 재 충전을 해야 했다. 자신이 먹는 일보다 아이 먹는 일에 더 신경을 쓰고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며 책을 읽고 놀아주어야 했다. 아이를 먹이기 위해 주방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게 되었고 자신이 먹는 것보다 아이를 먹이는 일에 더 신경을 써야 했다. 아이의 언어로 대화하고 놀아주어야 했으며 책을 읽어줄 때는 많은 캐릭터로 연기하는 배우가 되기도 해야 했다. 잠든 아이를 보며 아이가 많이 웃은 날은 보람을 느끼고 눈물을 흘린 날은 잠든 아이에게 사과하고 반성했다. 날마다 더 나은 엄마가 되기를 바라며 잠이 들었다.

수경의 마음속에 쌍둥이들과 탄생일이 똑같은 아이가 태어나 함께 자라고 있는 듯한 상상을 했다. 수경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태어난 가정에서 부모의 무관심으로 자랐던 슬픈 얼굴의 9세 소녀의 아픔을 잘 알기에 이 마음속에서 보리와 준이와 함께 성장한 4살 아이는 그저 사랑만 받고 자라길 원했다. 그 상상은 수경이 육아에 힘들고 지칠 때, 자신이 바랬던 부모상을 생각하며 늘 최선을 다할 힘을 주었다. 그러자 보리 준이가 웃었고 마음속에 아이도 함께 웃었다. 수경은 그 아이가 느껴질 때면 보리와 준이가 태어난 날, 타임머신을 타고 막 출생된 수경 자신을 데리고 온 것만 같았다.

사람들은 흔히 인간의 의지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을 가리켜 운명이라고 부른다. 거대한 운명의 벽 앞에 사람들은 좌절하고 원망하며 그것에 걸려 넘어지며 살아간다. 수경은 부모가 그 운명의 벽이라 생각했다. 부모에게서 받은 유전적, 환경적인 영향이 얼마나 자신의 삶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는지를 나이가 들수록 깨달았다. 자신이 의식하고 있지 못해도 성격이라 말하는 고착된 습관이나 감정 표현 방식들의 문제에 직면하면 어김없이 부모의 벽이 서있었다.

자신의 자궁에서 꺼내지는 아이들을 만난 후, 마취로 잠이 들었을 때 수경은 타임머신을 타고 자신의 출생하던 순간으로 돌아가 자신을 품에 안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마취에서 깨어나 처음 보리와 준이를 품에 안았을 때, 자기 자신을 안은 엄마가 돼 있었다. 수경에게 그 아이는 자신의 인생을 만회할 수 있는 두 번째 기회였다. 또 이 아이는 결핍 많은 9세 소녀를 채워줄 존재이기도 했다.

한때는 9세 소녀를 창피하게 생각했던 적도, 청승맞게 여겨져 외면해 버린 날도 많았다. 때로는 그 소녀로부터 부모가 떠올라 아예 없어져 버렸으면 하고 바라었던 적도 있었다. 대충 부서진 조각들을 붙여 남들이 보기에 꽤 괜찮은 꽃병처럼 보이도록 가장한 날도 많았다. 하지만 이미 조각난 소녀의 마음을 접착제로 붙여 새것처럼 만들 수는 없었다. 그 누구라도 가까이 다가가면 균열이 보였고 아주 약한 자극에도 다시 부서질 수 있었기에 늘 조심히 그 아이를 다뤄야 했다.

쌍둥이들을 기르고 마음 안에 있는 아기의 필요를 채우며 처음으로 수경은 이미 부서져봤던 경험에 감사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의 마음속 아이와 같은 아픔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엄마로서 신중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보고 배울 부모가 없는 수경에게 좋은 엄마의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마음속 9세 소녀의 상처를 통해 수경은 올바른 부모상에 대한 생각을 참으로 오래 할 수 있었다.

마침내 스스로가 부모가 됨으로써 자신에게 콤플렉스가 돼 왔던 부모라는 운명의 벽을 부숴버릴 수 있는 망치를 손에 넣은 것만 같았다. 오랜 시간 동안 단단히 자신을 옥죄었던 벽이 부서지는 통쾌감과 승리감에 도취된 수경은 한동안 눈을 감고 망치를 휘둘러댔다. 어느 정도 벽이 다 허물어졌다고 생각한 수경은 자신감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들며 눈을 떴다.

하지만,

자신의 눈앞에는 자신이 예상했던 광활한 평지가 아닌 또 다른 벽 하나가 우두커니 눈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것은 죽음이었다.

마음속에 중력을 향해 떨어지는 묵직한 무엇인가에 순간 몸이 휘청거리며 기운이 빠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허망한 눈으로 그 벽을 한참 동안 처다 보았다. 눈앞에 보이는 벽은 이전의 벽보다 몇 배는 높았고 견고해 보였다. 절대로 자신의 힘으로는 어쩌지 못할 것 같아 우두커니 한참을 벽만 바라보았다.

곧 수경의 발 밑에 흐트러져 있는 돌무더기에 시선이 옮겨졌다.

‘30여 년 동안 그 단단해 보이던 부모라는 운명의 벽도 이렇게 무너뜨렸어!’

수경의 절망적이던 얼굴이 환해졌다.

‘그래. 내가 부모라는 운명의 벽 앞에서도 얼마나 오랫동안 지금처럼 서서 울고 절망했었던가? 애초에 오늘처럼 이렇게 허물어버릴 수 있다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살지 않았었던가? 하지만 결국 무너뜨릴 수 있었듯 이 벽도 무너뜨릴 수 있어. 이 벽 앞에 서서 더 이상 절망하며 울고 있지만은 않을 거야.’

수경은 망치를 다 잡는 시늉을 하며 결의에 찬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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