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부여잡기

by Momanf

수경은 배가 묵직한 느낌이 들어 잠을 잘 수 없었다. 이 스멀스멀 느껴져 오는 불편함이 자신을 송두리째 데리고 갈 암이라는 존재임을 잘 안다. 옆에 누워있는 Ryan과 아이들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표정은 편안하고 고요한 아무 걱정 없는 맑은 얼굴들이었다. 감출 수만 있다면 끝까지 감추어 아무 걱정 없는 그들의 일상을 가능하면 오랫동안 지켜주고 싶었다. 수경은 고통이 밀려오자 배를 붙잡고 최대한 조용히 일어났다. 옷장 속에 있는 약이 든 파우치를 들고 화장실로 가는 동안 식은땀이 흘렀고 얼굴은 일그러졌다. 화장실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허겁지겁 파우치를 열어 물도 없이 알약을 자신의 입으로 정신없이 털어 넣었다.

수경은 숨을 몰아쉬며 호흡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고통스러워 그것마저도 쉽지 않았다. 처음 치른 고통이 기억 나 겁이 난 수경은 당장 모르핀 주사를 놓을까 생각했지만 내성이 생기는 것이 두려웠다. 더 견디지 못하게 될 때, 더 이상 모르핀이 암을 통제할 수 없어 자신마저도 삶을 포기하게 될 것 같아 겁이 났다. 최대한 참아보는 것이 하루라도 더 살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어 참아 보려 했지만 터져 나오는 신음과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아보지만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왔다. 가족들이 지금처럼 편안하게 아무 걱정 없이 잠들어 있기를 바라며 고통을 온몸으로 묶어두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그저 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적당한 때라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이야기지만 최소한 오늘 밤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은 암도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수경을 몰아붙였다. 결국 자신의 팔에 주사기를 필사적으로 꽂고 피스톤을 눌렀다. 고통이 사그라들길 바라며 두 다리를 가슴으로 당겨 웅크린 자세를 취했다. 수경은 이를 꽉 깨물었다.

그때, 화장실 문이 열리며 Ryan이 들어섰다. 눈물로 짓무른 벌게진 얼굴, 땀으로 흠뻑 젖은 아내가 욕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모습과 굴러 떨어져 있는 알약 통과 주사 바늘이 Ryan에 눈에 들어왔다. Ryan은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다리에 힘이 풀린 것처럼 털석 무릎을 꿇고 앉았다. 수경의 모습은 여실히 고통이 지나간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Ryan은 충격을 받은 얼굴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그녀를 일으키려 했고 수경은 온몸에 힘이 빠졌다.

지독하게 굴던 고통이 할 일을 다했다는 듯 사그라짐을 느꼈다. 고통이 사그라질수록 더욱 잔인하게 Ryan의 절망적인 얼굴이 선명해졌다. 수경은 울었고 Ryan은 화장실 문을 열던 찰나를 떠올렸다. 화장실 안 가느다란 불빛 틈으로 새어 나오는 수경의 신음소리에 잠에서 깬 Ryan이 문을 열어 본 광경은 전혀 예상했던 상황이 아니었다. 문을 열자마자 절벽 끝에 발을 내디딘 것만 같은 아찔함에 정신을 차려보니 어제까지 살고 알았던 세상이 아니었다. Ryan은 두려워서 아무것도 묻지 못하고 자신의 허벅지 위에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울음소리를 듣는 Ryan은 자신이 이미 절벽으로 추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숨기려고 안간힘을 써왔던 수경은 그토록 미뤄왔던 일과 마주할 시간이 되었다. 수경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팔에 있던 끈으로 묶고 바닥에 나뒹구는 약과 주사기를 파우치에 담았다. Ryan은 그 파우치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Honey.” (여보)

수경이 Ryan을 나직이 부르며 그와 눈을 마주치자 눈물이 흘러내렸다.

“I am sick.” (나 아파.)

수경은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으려고 입술을 꽉 물었다. Ryan도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I have a pancreatic cancer, and it is the last stage. I’ve only 4 months left.” (나 췌장암이고 말기야. 나 4개월밖에 안 남았어.)

수경은 단어 하나하나를 꾹꾹 눌러 겨우 말을 다 마치고 울음을 터트렸다. Ryan의 뺨 위로 눈물이 타고 흘렀다.

“Sorry, honey.” (미안해. 여보)

Ryan은 ‘언제부터 알았냐고?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Ryan은 다가와 수경을 꼭 껴안았다. 화장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아내의 모습이 떠오르자 그녀를 더 강하게 안았다. 3시간 전쯤, 잘 자라며 미소 짓던 익숙했던 아내의 모습은 이제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녀는 힘주어 꼭 안기만 해도 부서져 눈앞에서 사라질 것만 같았다. 연신 미안하다고 말하는 수경의 모습에 그동안 알리지 못하고 혼자 이 고통을 감내해야 했을 그녀의 마음이 전해져 왔다. 가족들이 모르게 홀로 고통과 싸우며 울고 아파했을 이 여자의 작은 심장이 너무 가엽단 생각이 들자 감정이 격해지며 울음이 거칠게 터져 나왔다.

‘걸어온 삶 만으로도 버거웠을 이 불쌍한 여자에게 암이라니....’

갑자기 Ryan의 머릿속에 영사기가 ‘타~악’ 소리를 내며 켜지더니 필름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하고 등 돌린 부모 뒤에서 홀로 울고 있는 수경이 보였다. 폭력으로 무서워 떨고 있는 작은 소녀, 방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외로워하던 수경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막 성인이 되어 부모를 떠나 집을 나온 그녀의 다부진 얼굴도 비쳤다. 아파도 일해야 했고 혼자 밥 먹고 혼자 잠들며 꿈을 꿨던 그녀의 모습을 바라봤다. 어린 숙녀의 티를 벗고 여자가 되어 자신과 사랑을 나누며 행복해하던 그녀도 있었다. 여행 중에 즐거워하던 그녀의 옆모습도 떠올랐다. 배가 커 움직이지도 못하면서도 아이들을 기다리며 콧노래를 부르던 모습, 아이들을 낳고 지쳐서 한숨 지으면서도 아이들에게 미소 짓던 그녀도 보였다. 힘들다고 악을 쓰던 수경의 모습과 그녀를 외면하던 자신의 무표정한 옆모습도 보였다. 화장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아내의 모습과 아이들이 해맑게 웃는 얼굴이 오버랩되며 Ryan은 오열하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보는 게 그토록 두려워서 미루고 또 미루며 말하지 못했었구나.’

수경이 그를 꽉 껴안았다.

‘어린 자식들을 책임지고 살아가야 할 남겨질 한 사람.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나의 부재가 일상이 되어 잘 살아갈 수 있을 거야. 우리 모두는 이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만 해. 자신에게 주어진 몫대로 견뎌야 해.’

수경은 자신의 어깨에서 온몸이 부서질 것처럼 울고 있는 그를 견뎌야 했기에 그를 더 세게 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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