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너머의 세상
류시화 님의 산문집 중 당신은 이름 없이 나에게 오면 좋겠다는 글이 있다. 그것을 아침 명상시간에 읽고 명사, 이름에 대해 생각하며 강아지 걸리와 5:30의 신선한 공기와 함께 산책을 했다. 우리 동네는 강이 있는데 그 강 따라 꽃과 나무가 많고 두루미 종류의 다양한 새와 오리가 많아 산책을 하러 나갔다가 그런 잔재미를 느끼며 물끄러미 보다가 사진 찍다가 돌아오곤 한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많은 양귀비를 발견하고 수선화를 보며 사진을 찍고 이름에 대해 이것저것 글 소재를 생각하다 문득 그림을 그리고 생긴 관찰 습관이 참 좋다는 생각에 멈춰 섰다. 그리고 문득 같은 꽃을 돌아오는 길에 다른 측면에서 보니 그 꽃은 또 달리 보이는 게 아닌가? 이름을 소재로 글을 쓰려고 했던 생각이 화가의 시선으로 위에서 보는 측면, 아래서 보는 측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보는 측면이 모두 달리 보인다의 생각까지 미치더니 물가에 흰 두루미 같은 새가 낚시를 한다고 집중해 있는 것을 보니 물가에 비친 그 녀석의 아래 모습이 투영되어 그래. 저렇게 그리면 한 사물에 다양한 각도를 그려볼 수 있겠다. 피카소의 기분도 좀 이해가 되고. 무튼 그렇게 관찰하다 이름이라는 소재와 연결이 되었다.
우리는 무언가 이름을 짓고 분류하며 그것을 정의하고 성격을 분석해 나열해 그것을 안다고 말한다. 사물이며 심지어 사람까지도 말이다. 하지만 보는 측면에 따라 그 사물의 모습이 다르듯 그 사람이나 동물, 사물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물론 반복해 보이는 패턴으로 성격이나 성질을 짐작할 수는 있지만 그 이름을 붙이고 정의를 내리는 일은 우리가 얼마나 그것의 혹은 그 사람의 측면만 보고 있음을, 그것도 우리가 정한 위나 아래 옆면. 그 보는 이가 정한 각도로 그것을 보고 지레 판단하고 있지 않은가를 생각해본다. 그렇다면 이름은 단지 그것과 그 사람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이해하는 정도만으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시간 따라 시시각각 변하고 상황과 감정 따라 변하는 사람은 더 알 길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해 안다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가장 가까운 내 남편, 내 아이도 기분 따라 상황과 생각 따라 시시각각 변하고 있는데 내가 보는 기준의 잣대로 정의를 내려버린 건 아닌지 생각했다.
문득, 이경선은 무엇인가 누구인가?
쌍둥이와 비숑 걸 리의 엄마이고 제이미의 아내이자 우리 시누들에게는 sister-in-law이고 조카들에게는 aunt, 내 학생들에게는 선생님, 미술 선생님의 학생, 해금 선생님의 학생, 발레 선생님의 학생, 운동하는 동네 아줌마, 학부모, 글 쓰는 사람, 친구, 언니. 참 많은 이름들이 그냥 하는 일과 연결되어 명명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하는 일 분류 안에서의 이경선이 보이는 성격으로 이경선을 다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겠구나 생각했다. 타인의 시선에서 내가 보는 이경선을 다양한 각도에서 생각해보며 정의를 내려보다 그만두었다. 대부분 내가 하고 있는 일과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인디언의 이름들이 생각났다. 늑대와 춤을, 주먹 쥐고 일어서, 새를 발로 차, 머릿속의 바람, 돌 종아리, 열 마리의 곰, 많이 웃다, 백인 군인들, 가기 싫다, 얼굴에 내리는 비, 앉은 소, 어디로 갈지 몰라, 아직 끝내지 못한 일, 너 잘 만났다.
나보다 남들에게 더 많이 불리는 이름. 이렇게 인디언 이름 식이라면 그 이름을 통해 나를 돌아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남들이 보는 기준의 이경선은 내가 어쩔 도리가 없다.
하지만 내가 명명하는 이름은 나를 돌아보고 그 이름에 맞게 살려고 노력하지 않을까의 생각이 종착력에 닿았다.
먼저, 우리 가족에게서 나는 퀘렌시아(안식처) 라는 이름으로 명명, 친구에게는 무조건 너의 편, 그림을 그릴 때는 내 그림은 나만 그릴 수 있어, 발레 할 땐 발레리나, 해금 배울 땐 잘 모르지만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을정도면 되, 팝송을 연주하는 게 목표야, 글을 쓸 땐 나는 철학적인 작가, 명상을 할 때에는 Untethered soul, 자연은 너는 글과 그림과 내 철학의 소재라 너를 예찬하는 devotee로 살리라, 모르는 사람은 미소와 안녕하세요? 이런 식의 이름을 짓기로 했다. 거기에 옷을 바꿔 입듯 그 상황 순간에 따른 기분도 이름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지금 “아침 햇살의 에너지와 상쾌한 공기를 신선하게 머금은 한 송이 아름다운 꽃 같은 행복한 기분의 철학적인 작가”라는 이름을 명한다.
가족들이 모두 일어나면, 나는 곧 “명상과 글로 행복 충만한 에너지 가득의 창의력 넘치는 엄마와 즐겁고 따듯한 기분으로 사랑을 전하는 아내의 퀘 렌시아”가 “어제 많이 먹어 저울 최고점을 찍었지만 똥배 힘 꽉 주고 최선을 다하는 발레리나”, “맛난 것을 먹자 무조건 네 편이야”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