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온 오후, 수경은 오랜만에 깊은 낮잠을 잤다. 약 2시간쯤 자고 일어나 거실로 나가니 아이들은 미국에서 사 온 각종 비즈들을 실에 꿰어 팔찌를 만들고 있었고 Ryan은 파스타를 만드는 중이었다. 수경이 일어난 것을 본 보리는 마침 완성된 비즈 팔찌의 실을 묶어달라고 했고 수경에게 그 팔찌를 선물로 주었다. 곧 저녁식사가 준비되고 가족은 모여 앉아 수경의 부모를 만난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들은 처음 본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좋았다고 말했고 엄마도 엄마의 엄마, 아빠가 있다는 것을 신기하게 생각했다. Ryan은 수경의 아버지를 꽤나 고약한 얼굴을 한 풍채 큰 남자일 거라고 상상을 했지만 직접 만난 아버지는 말수가 적고 왜소한 늙은 남자였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죄책감 때문인지 수경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수경이 고모나 새어머니와 이야기를 할 때, 힐끗힐끗 곁눈질로 수경을 바라보는 것이 애처로웠다고 말했다. 수경은 막상 아버지를 만나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편했다며 함께 곁을 지켜준 Ryan과 아이들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늘 그렇듯 저녁을 먹고 아이들을 씻기고 재우고 나니 밤 9시쯤 되었다. Ryan도 피곤하다며 일찍 침실로 들어갔다. 수경은 낮잠을 잔 덕분에 잠이 오지 않아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거실에 모든 불을 끄고 소파 곁에 놓여 있는 스탠드 불을 켰다. 따듯한 차를 준비해 컵을 손에 쥐고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사실 아버지를 만나러 가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다. 아버지가 수경의 기억 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폭력적인 모습일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대한다면 더 이상 그때처럼 언어나 물리적인 폭력을 당하지 않으리라 마음도 먹었다. 혹시라도 마음 한구석에 여전히 남아 있는 분노를 아버지가 자극한다면 자신도 자신을 통제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런 상황이 닥치면 왜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느냐고 소리 지르며 그에게 무섭게 달려들 것 같았다. 그 생각을 하는 동안 실제로 분노도 일어났다.
‘내가 자식을 낳아 기르고 보니 아버지는 아주 무책임하고 미성숙한 사람이었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해야지, 폭력으로 가족들의 영혼에 상처를 주고 트라우마 속에서 살게 한 범죄자라고 말해야지’
수경은 그렇게 그를 비난할 말도 준비했었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끔찍한 폭력들과 외로웠던 어린 시절이 함께 따라왔다. 아버지와 함께 살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란 그런 것들밖에 없었다. 새엄마가 아버지가 휘두르는 맥주병으로 머리를 맞아 피를 흘리며 구급차에 실려가 머리를 꿰매고 들어왔던 밤, 아버지가 칼을 들고 주방에서 새엄마의 목을 잡고 죽이겠다고 협박했던 밤. 너무 겁이 나 자는 척을 하며 덜덜 떨거나 숨죽여 울었던 어린 자신과 자신이 당한 폭력도 떠올랐다. 7살쯤 인형이 너무 갖고 싶어 떼를 써봐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자 만원을 훔쳐 문구점에서 인형을 사 와 옷장 속에 숨겨두었다. 결국 그 인형 때문에 아버지에게 도둑년 소리를 들으며 어른 손목 굵기의 나무 몽둥이로 30분쯤 맞았다. 너무 아팠고 무서웠지만 새엄마는 그 폭력을 막아 주지 않았고 그렇게 울다가 지쳐도 위로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무언가를 요구해도 수경의 말에 귀 기울여주는 어른이 없다는 것을 수경은 그때 깨달았다. 어린 수경은 그날 이후 부모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 대신 자기 힘으로 해결하기 시작했다. 평소에 먹고 싶어 했던 비엔나소시지가 땅에 떨어진 것을 보고 친구들 몰래 주어 먹거나 슈퍼나 문구점에서 물건을 훔치기도 했다. 수경이 중학생이 되자 술을 마신 아버지는 자신만이 인생의 피해자이고 희생자인 것처럼 굴며 수경에게 재워주고 먹여주는 것에, 공부시켜주는 것에 감사하라고 말했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며 커서 자신에게 다 갚으라며 수경에게 빚을 지웠기에 수경은 기본적인 숙식조차도 눈치를 봤다. 수경에게는 아버지가 아니라 고아원 원장처럼 여겨졌다. 가게에 딸린 방에서 자야 했고 바깥에 있던 주방에서 물을 데워 빨간 대야에서 목욕을 해야 했고 개수대에서 세수를 해야 했다. 화장실은 자동차 상사와 공동으로 써야 했기에 어두운 밤에 밖으로 나가야 했다. 배변을 참다가 중학교 때, 치질 수술까지 했지만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사는 환경을 전혀 개선시켜 주지 않았다. 부모는 장사를 해야 하니 알아서 챙겨 먹고 다녀라는 아버지의 말에 굶는 날이 많아 늘 위장병을 달고 살았던 학창 시절. 고등학교 때부터 아버지에게 반항하기 시작하면서 술만 마시면 주먹으로 얼굴을 맞고 발로 차이며 폭력을 당했던 일들. 얼굴에 시퍼런 멍이 들어 학교를 갈 때면 선생님이나 친구들에게 날아온 공에 맞았다고 거짓말을 해야 했고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버스에 올랐다. 아버지가 물리적으로나 언어적으로 폭력을 가할 때면 수경은 이런 세상에서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며 죽이라고 벽에 머리를 찧기도 했지만 그의 폭력은 멈추지 않았다. 새엄마나 자신이 폭력을 당할 때면 몇 번이나 아버지를 칼로 찔러 죽이고 소년원에 들어가 버릴까 고민하기도 했었다. 그 기억들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수경의 일상에서 문득문득 떠올랐다.
수경은 마시던 차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두 팔로 자신의 두 무릎을 가슴으로 끌어당겨 자신을 안아주었다. 자신 앞에서 미안하다며 울던 새어머니의 얼굴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버지를 안았을 때, ‘고맙다 와줘서’ 하던 그 말이 가슴 가득 울림이 되어 하루 종일 생각이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고아원에 버리지 않아 감사하자. 어쨌건 내가 나를 지킬 수 있는 나이까지는 그래도 더 험한 세상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잖아. 정서적으로 채워지지 않아 책을 많이 읽을 수 있었고 나 자신과 대화를 하는 시간도 많았어. 부모가 관심이 없었으니 자유롭게 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힘을 얻었다고 생각하자. 내가 꿈이 많았던 건 어쩌면 그 덕분이었을지도 몰라.’
수경은 오후에 보리가 만들어준 비즈 팔찌를 한참을 쳐다보며 다시 만난 부모의 모습으로부터 아픈 기억들의 비즈를 시간의 줄에 꿰기 시작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내가 만들어지기 위한 소재가 아니었을까? 다른 환경이었다면 작은 것에 감사하고 혼자의 힘으로 그토록 열정적으로 살았을까? 영어를 할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Ryan을 만날 수도 없었겠지. 그렇다면 내가 시한부라는 판정을 받았기에 Ryan과 화해하고 부모를 용서하게 되었을 거야. 그래서 가족이 이토록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된 거겠지. 그러니 외면하고 싶었던 과거나 아파 죽게 된 나도 버려야 할 것이 아닌 오늘날에 나를 만들어준 재료인 거야.’
자신의 손목에 매달린 색색의 비즈들이 꿰어진 예쁜 팔찌가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하나 보면 부정하고 버리고 싶을 볼품없는 비즈들을 이렇게 엮어 팔찌를 만드니 아름다워 보였다.
고통스러웠던 과거나 고통스러운 암도 완전한 수경이 되기 위해 필요했다. 이 모든 것들을 엮어야 완전한 작품이 되는 것이었다. 부모를 받아들이고 서로를 용서해야만 하고 그들에게 죽는다는 사실을 알려야 했다.
암성고통은 버리고 싶은 비즈 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다음으로 꿰게 될 비즈들은 가족과 친구들의 사랑, 무엇보다 부모의 사랑이 될 것이다.
비즈들이 모두 꿰어지면 처음 실과 마지막 실을 묶는다.
묶는 것은 죽음이지만 팔찌는 완전한 수경의 인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