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기억의 편집

by Momanf

은주를 만나고 돌아온 밤. 수경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루 종일 친구가 오열하던 모습이 생각나 일상을 살면서도 몇 번이나 혼자 눈물을 훔쳤다. 가족들이 모두 자는 밤 수경은 처음 은주를 만났던 열여덟 때를 떠올려 보았다. 그때는 정말로 낙엽 굴러가는 것만 봐도 웃음이 나오던 시절이었다. 수경은 거실 책장에서 오래된 사진첩을 꺼내 스탠드 불 앞에 앉아 사진첩을 넘겨보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 누가 찍어주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놀이터에서 친구와 손을 잡고 있는 사진이 있었고 중학교 때 촌스럽게 자른 단발머리 사진도 있었다. 고등학교 소풍 사진 속에 은주와 함께 어울려 놀던 친구들도 있었다. 막 스무 살, 화장을 아주 진하게 하고 은주와 찍은 촌스러운 두 사람의 사진들도 있었다. 월드컵 경기를 응원하러 가 함께 얼굴을 맞대고 찍은 스물두 살의 사진들도 있었다. 그렇게 은주와 늘 함께였다는 사실은 사진첩에 빽빽하게 함께 찍은 사진들이 말해주고 있었다. 수경은 먹먹한 기분을 느끼며 사진첩을 넘겼다. 그 시절 너무나도 아끼고 좋아했던 옷, 유행이랍시고 한 너무나도 촌스러운 머리에 수경은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사진첩을 보며 그 시간으로 돌아가 그날의 감정과 사건을 떠올려 보기도 하고, 지금은 만나지 않는 그때 친했던 친구들을 생각해 보기도 했다. 다행히도 사진 속에는 그 어떤 아픔을 겪고 있는지 보이지 않는 미소진 얼굴들이 많았다. 하기야 사진첩에 남겨지는 사진이란 소풍이나 명절, 생일, 여행 등 사람들의 행복한 순간을 기록하기 위한 것들이다. 특히 휴대폰이 없던 그 시절에는 특별한 날이어야 카메라를 준비했고 추억을 셔터로 눌러 필름으로 현상을 해야 하는 수고로움도 있었다. 그 시절 사진이란 것 자체가 평범한 사람에게는 기억하고 싶은 좋은 순간만을 찍어둔 것이었기에 모두 다 미소를 지었다.

삶에서 느끼는 그 많은 다양한 감정들과 다양한 사건들은 편집되고 사람들의 기쁘고 행복한 순간만을 담아내는 것이 사진이다. 우리는 불행한 순간은 사진에 담아두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순간들은 빨리 잊으려고 애를 쓴다. 울거나 싸우거나 화가 날 때 사진을 찍는 것은 신문기사에 실릴 사진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옛 사진들을 보는 수경은 자신이 기억하던 과거가 꼭 나쁜 일만 있었던 게 아니었음에 안도했다. 수경은 한참을 사진과 함께 그때로 돌아가 추억 속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가 한 장의 사진을 발견하고 그 사진에 시선을 멈추었다. 부모가 운영하던 가게 안에 있던 자신의 방 안에서 떡뽂이와 다양한 쿠키들, 통닭과 음료수가 테이블에 있었다. 초가 꽂힌 생일 케이크 앞에 촛불을 끄고 있는 자신과 그 맞은편에 앉은 친구로 보이는 세 사람의 등진 모습이 사진 속에 있었다. 수경은 케이크에 꽂힌 초의 수를 세어보았다. 14개였다. 수경의 기억 속에 이 장면은 없었기에 수경은 사뭇 놀랐다. 수경의 기억 속에는 한 번도 부모가 자신의 생일을 차려준 기억이 없었다. 한 번도 가족들의 축하를 받은 기억이 없었고 축복은커녕 부모에게 필요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시켜 주는 날이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집을 나온 스무 살 생일부터 자신만의 특별한 생일 의식을 만들어 아침부터 공들여 메이크업과 머리를 했다. 백화점에 가서 평소에 갖고 싶었던 고가의 선물을 샀고 서점에 가 책을 한 권 구입했다. 그 책을 친구나 가족 삼아 혼자 고급 레스토랑에 가 코스 요리를 주문해 먹으며 읽었다. 그렇게 이 세상에 태어난 자신을 스스로가 축복해 왔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불행만 있는 것 같아 끝까지 생각해보는 것조차 싫었다. 그런데 사진 속에 열네 살 생일의 촛불을 끄며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과 손뼉 치고 있는 친구들이 새어머니가 차려준 음식으로 생일 파티를 하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잊어버린 건 이보다 더 많지 않을까? 어쩌면 내 기억 속에는 두렵고 학대받던 기억 말고 다른 것도 있었던 게 아닐까? 사실은 좋은 날도 가끔 있었고 아버지나 새어머니의 사랑을 느꼈던 날도 있지 않았을까? 아버지가 나를 때린 장면이 너무 무서웠고 나를 막아 주지 않던 새어머니에게 배신감이 느껴져 그 장면만 곱씹어 기억하며 살았기에 좋았던 기억들을 잊어버린 건 아닐까? 말살시켜 버렸던 내 기억 속에, 부모로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던 아버지나 새어머니가 있지 않았을까? 나도 어쩌면 사랑과 보호를 느낄 때도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내가 기억하는 그들보다 내 부모는 더 나은 사람이지 않았을까? 그들을 내 인생의 죄인으로 낙인찍어 매도하고 증오하고 원망만 해왔었다. 내가 그들을 외면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해왔었다. 그 누군가에게 부모 얘기를 할 때면 그들을 악질로 묘사하며 내가 얼마나 힘든 삶을 이겨낸 사람인지를 설명했다. 그런데 그 기억에 다른 이야기도 있었다....’

수경은 그 열네 살 생일 사진을 보며 혼란스러워졌다. 부모에게 알 수 없는 죄책감과 함께 어쩌면 자신도 피의자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20년 동안 그들을 외면한 채 살아오며 나만 아팠던 게 아니라 나도 그들을 아프게 했구나. 그들을 나쁜 인간, 무능하고 미성숙한 인간으로 만들어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나에게만 있는 것처럼 그들을 죄인 취급했다. 미안하다는 말을 못 하는 건 너무 미안하기 때문이라고 치부해버리며 오로지 내게만 그들을 면죄할 수 있는 특권이 있는냥 굴었다. 자식이 부모를 부정하는 것과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만큼 부모를 더 아프게 하는 일이 있을까? 그런데 나는 이 두 가지 모두를 내 부모에게 저질렀다.’

수경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내 독선적인 기억은 마음대로 각색하고 편집한 오로지 나에게만 유리했던 스토리였구나.’

‘기억이란, 애초부터

내가 느끼는 대로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내가 기억하고 싶은 대로

또, 내가 떠올리고 싶은 대로

간직하는 것은 아닐까?’

수경은 사진첩에서 빼냈던 생일 파티의 사진을 조심스럽게 다시 밀어 넣었다.

‘나도 태어난 것에 축복을 받았었던 적도 있었구나.’

기억보다 어린 시절이 나쁘지 않았다는 사실이 수경을 안도하게 했다. 울던 날만 기억되었던 어린 시절에 촛불에 초를 불며 미소 짓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기억하지는 못해도 어린 시절에는 Ryan이 쌍둥이들에게 그렇게 하듯 아버지가 자신을 안아도, 업어줬을지도 모른다. 품에 안고 우유를 먹여 준 적도, 기저귀를 갈아 준 적도 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품에 안고 자신에게 미소도 지었을 것이고 딸의 뺨에 입을 맞춘 적도 있을지 모른다. 사랑한다, 소중하다고 말해줬을지도 모른다. 내가 태어난 생일이 특별한 날이라고 말해 주었을지도 모른다. 기억나지 않지만 무슨 선물을 받고 싶냐고 묻거나 자신이 직접 수경을 위한 선물을 골라 들고 와서 수경을 기쁘게 해 주려고 노력했을지 모른다.

보리 준이를 돌보는 자신과 남편의 모습, 쌍둥이 생일을 준비하던 자신들이 지금은 기억하지 못하는 수경의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어린 자신에게 해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자 마음에 기쁨이 차 올랐다.

‘나는 단지 기억을 못 했을 뿐이다. 그동안 내가 부러워했던 내 친구들의 어린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

그렇게 기억은 생각나지 않으면 새롭게 채워 넣고 편집하고 각색할 수 있는 것이었다.

기억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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