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은 Ryan의 오후 수업으로 가족들이 평소보다 늦게 오는 날이라 수경은 재욱과 성경 공부에 참여했다. 성경 공부가 끝나고 병실로 돌아오는데 병실 앞 벤치에 동네 친구 지원이 앉아 있었다.
“어머. 언니”
수경이 얼른 지원에게 다가가 그녀를 불렀다.
“이게 어쩐 일이야. 자기야?”
지원은 수경을 보자 눈물을 글썽이며 일어나 수경의 손을 잡았다.
“어떻게 아시고 여기까지 오셨어요?”
수경은 들고 온 종이 가방을 내밀었다.
“입맛 없어도 잘 챙겨 먹으라고 반찬 좀 해왔어.”
둘은 병실에 들어서며 TV를 시청하는 점돌 할머니와 남편에게 목례로 인사를 드렸다.
“고마워요.”
수경이 반찬을 침대 곁 냉장고에 넣어 두며 말했다.
“요즘 수경 씨나 애들이 잘 보이지도 않고 어쩌다 보면 아이들이 할머니 손 잡고 다니고. 보리 아빠도 영어 과외를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양해를 구하시지, 수경 씨에게 몇 번을 연락해도 답이 없지 이상했어.”
지원은 수경이 내미는 의자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어린이집 원장님 붙잡고 무슨 일인지 알려달라 졸랐어. 수경 씨 이곳에 있다는 말에 내가 얼마나 놀랬는지...”
“죄송해요. 경황도 없었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드려야 할지 막막해서 연락을 못 드렸어요.”
지원도 그 말에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아프지 않길 바래.”
지원이 차마 수경의 눈을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호스피스 병동으로 온 이유가 그것 때문이에요. 이곳에서는 아프면 금방 손을 써줘서 사람답게 살 수 있어요.”
수경은 맞은편 점돌 할머니 눈치를 슬쩍 보며 말했다.
할머니 부부는 TV에 몰두하신 듯 남편과 TV를 보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이들 반찬 같은 건 내가 가끔 신경 쓸게. 우리 아이들거 만들면서 보리 준이것도 함께 만들어 먹음 되니 어렵지 않아.”
수경은 지원의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해요. 그렇지만 너무 무리하시지 마세요. 친정어머니가 챙기시니까 너무 걱정 마시고요.”
지원은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 사이에는 한동안 적막이 흘렀다. 수경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지원을 이해했다. 같은 나이의 어린 자녀들을 키우는 엄마로서 지원은 지금 그 누구보다 수경의 심정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 어떤 위로의 말을 해줄 수도 없을 것이다.
“사실 요즘 마음이 많이 착잡해.”
지원은 고개를 들어 수경을 보며 말했다.
수경은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 눈짓으로 무슨 말인지를 물었다.
“수경 씨 이렇게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지, 내 친구는 남편이 바람을 피워 못살겠다고 힘들어하지. 인생이 많이 허무해.”
지원은 고개를 떨구며 힘없이 말했다.
“주위에서 너무 엄청난 일들이 한꺼번에 생겨서 언니도 요즘 좀 힘들겠네요”
“글쎄 남편이 20대 새파랗게 젊은 여자들이랑 차에서 그 짓을 했대. 친구 남편이 친정아버지 생신 날 출장 가야 한다고 해서 애들 데리고 친정으로 며칠 가있던 적이 있었어. 돌아와 보니 여자를 집으로 데려와 안방에서도 그 짓을 했다나 봐. 부들부들 떨려서....”
지원은 갑자기 수경이가 아프다는 것도 잊은 채 목소리를 높이다 병실 안에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 부부를 의식하고 입을 다물었다.
“어머 어째요?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대요?”
수경도 지원의 말에 공감하며 심각하게 물었다.
“어느 날 친구가 저녁 준비를 하는데 대파가 없는 거야. 그래서 남편에게 부탁했고 남편이 마켓에 갔는데 안방에서 전화벨이 울리더래. 그래서 남편 전화인가부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계속 울려서 안방에 들어가 남편 가방에서 전화기를 꺼냈는데 자기 남편 전화기가 아니더래. 일단 전화를 받았는데 친구 목소리를 듣자 상대편 사람이 끊더래.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지. 남편이 어디서 휴대폰을 주어서 찾아 주려나 보다 싶었던 거야. 그런데 이상한 게 그럼 왜 전화를 끊을까 싶었대. 자기 목소리를 들은 후, 더 이상 전화벨도 울리지 않았고.”
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저녁에 샤워하고 나오는데 남편이 베란다에서 낮에 본 그 휴대폰으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좀 의심이 들기 시작한 거지.”
“그래서요?”
“다 잠든 밤에 친구가 몰래 일어나 그 휴대폰을 가지고 나가 확인했더니 글쎄...”
지원은 눈까지 찔끔 감으며 심각하게 말을 이었다.
“거기에 젊은 여자들의 벌거벗은 사진들이 있었대. 문자도 확인하니 다 야한 농담이고. 또 부인 몰래 언제 만나 놀거냐는 둥, 유부남은 이 맛에 짜릿하다는 둥. 어떤 사진은 남편의 차 안이었고, 자신의 안방이었대. 완전히 충격을 받았지. 그래서 다음날 경비실에서 CCTV 확인하고 차 안 블랙박스 확인하니 예상대로 여자들이 자기 집에도 왔었고 차 안에서도 그 짓을 한 거야.”
지원은 흥분하며 수경에게 말했다.
“어쩜 좋아?”
수경도 충격을 받아 말을 잇지를 못했다.
“그 사실을 지난주 금요일에 알았으니 지금 분노로 제정신이 아니야. 남편을 죽이고 싶대.”
“지난주 금요일이면... 오늘이 수요일이니 얼마 안 되었잖아요. 어머! 충격적이겠어요. 두 부부가 평소에 문제가 있었나요?”
“아니. 남편이 워낙 다정한 사람이라 아이 키우며 걱정 없이 살아서 친구가 충격이 더 컸나 봐. 남편이 아내뿐만 아니라 다른 여자들 모두에게 다정했던 거지.”
TV를 보던 할머니 남편이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은 자신의 목소리가 컸었나 싶어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할머니도 TV를 끄고 자리에 누웠다. 수경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 번도 의심할 일이 없었대요 그전에? 뭐 퇴근이 늦다거나 출장이 잦다거나?”
“인테리어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이라 늘 시간이 들쭉날쭉해서 눈치를 못챘대.”
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까지 있다면 그 배신감 어째요? 거기다 자기 안방에서 그 짓을, 아이와 타고 다니는 차에서까지?”
수경은 진심으로 충격을 받아 말했다.
“그러니 아이만 아니면 남편 죽이고 싶대. 주말에 아이를 친정에 보내 놓고 남편에게 얘기했대. 게임중독처럼 아무 감정 없이 여자들이랑 놀았다고 죽을죄를 졌다고 매달리며 용서를 구하고 있대. 평소에 워낙 아이를 끔찍이 사랑해서 이혼만큼은 안된다고 한다는데 신뢰가 깨졌는데 어떻게 함께 살아? 그 더러운 사진들. 안방에서, 그것도 자기 침대에서 젊은년들이랑 뒹군 장면을 어떻게 잊어? 그 더러운 남편과 어떻게 사냐고?”
지원은 말소리는 낮지만 화를 내며 말했고 수경도 한숨을 쉬었다.
“친구가 정말 괴롭겠어요. 저까지 이렇게 화나는데 언니는 친구일이라 더 마음이 안 좋으시겠어요.”
지원도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이도 아빠를 너무 찾고 좋아한대. 아이에게 워낙 잘했으니까. 가정 주부로만 살았기에 이혼하려 해도 아이 하나 데리고 돈 벌며 살 걱정에 막막한가 봐. 아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그런 남편과 다시 살자니 막막하고. 죽이고 싶은 남자랑 어떻게 살아? 너무 배신감을 느껴 자신도 목매달고 딱 죽고 싶은 심정인데 자식이 원수라고. 자식 때문에 죽지도 못하고 간단히 이혼할 수도 없다고 매일 술 마시고 울어. 밤마다 남편을 때리고 울고불고 소리 지르고 해도 분이 풀리지도 않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어느새 지원은 1인칭으로 말하고 있었다.
“왜 그랬대요 그 남편 정말? 안 살 것도 아니었으면서. 그렇게 매일 밤마다 맞아주며 이혼할 것도 아니었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지키고 싶어 했던 가정을, 아내를 그렇게 아프게 해요? 참 나쁜 사람이다. 정말.”
수경도 감정이 이입되어 속상해하며 말했다. 지원은 울기 시작했다. 수경은 휴지를 지원에게 건넸다. 단짝 친구인 은주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도 자기 역시 이렇게 마음이 아파 울 것 같았기에 지원의 눈물을 이해했다.
“마음이 너무 괴로워. 거기다 수경 씨까지 아프다고 하고. 정말 산다는 게 뭔지.”
지원이 두 손으로 얼굴을 막고 울었다.
“언니...”
수경은 지원의 등을 쓰다듬었다.
“언니. 괜히 저와 친구의 일로 언니가 너무 깊이 상심하지 마세요. 밝은 언니가 이렇게 친구들 때문에 처져 있으면 언니 가족이 얼마나 힘들겠어요? 나도 언니가 이렇게 아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언니가 속상해하고 우니 마음이 너무 안 좋아요. 그러니 가족들도 얼마나 걱정하겠어요? 조금 냉정하게 들릴진 모르겠지만 언니는 언니 가족에게 집중하시면서 친구는 조금 더 떨어져 제삼자 입장에서 도와주세요. 너무 감정에 휘말리지 않도록이요.”
지원은 계속 울었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해 어깨가 심하게 들썩였다.
“데체 사는 게 뭘까?”
지원이 울먹이며 말했고 수경도 그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말이에요. 아이 때문에 이혼을 쉽게 생각할 수도 없고. 살아도 영혼이 죽은 채로 살아갈 테니...”
수경도 막막해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했다.
“수경 씨 말이 맞아. 살아도 이제 사는 게 아니야. 남편이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 죽였어. 그저 몸뚱이만 남겨져 아이 때문에 살아가겠지.”
지원의 말에 수경도 슬퍼져 눈물을 흘렸다.
‘나보다 더 안됐다. 언니의 친구. 나는 비록 내 몸뚱이는 암으로 너덜너덜해져 죽어가지만 영혼만은 생생히 건강한 사람으로 사는데.... 그분은 살아 있어 아이 곁을 지키겠지만 앞으로 영혼이 죽은 채 힘겹게 살아가겠구나. 아이 때문에 살아내시겠지만 그분은 평생 뜯긴 마음으로 지옥에서 살아가시겠구나. 부디 그분이 더 이상 아픔이 없기를. 제발 그분의 남편이 진정으로 용서를 구하고 아내의 신뢰를 깨고 영혼에 상처를 준 대가를 기꺼이 감수하기를.... 그분이 너무 오랫동안 아프지 않고 얼른 회복되시기를....’
수경은 지원의 친구와 자신이 같은 시한부 처지에 놓여 있는 것 같았다. 단지 수경은 육신의 죽음을, 그녀는 영혼의 죽음을 겪고 있는 차이가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몸과 마음을 갖고 있지만 몸과 마음은 대부분 일치되지 못할 때가 많다. 몸과 마음이 일치된 것이 가장 이상적이고 건강한 삶이다. 몸은 건강하지만 마음이 아프거나 죽은 채로 사는 사람이 가장 많고 몸은 죽어가지만 마음은 건강한 사람도 있다. 수경은 옛날엔 전자였지만 시한부 이후 후자 쪽으로 바뀌었다. 자신이 선택해야 될 상황이라 해도 수경은 전자보다는 후자를 선택하고 싶었다.
지원은 그렇게 한참 수경의 앞에서 흐느꼈다. 서럽게 우는 지원의 등을 쓰다듬으며 수경은 지원의 마음속에 있는 복잡한 감정과 슬픔이 이렇게 모두 울고 난 후, 조금이라도 덜어지길 바랬다.
“언니. 본의 아니게 저까지 언니를 우울하게 한 것 같아 미안해요. 하지만 저는 걱정 마세요. 언니에게 솔직히 고백하면요..., 암으로 저는 죽어가지만 영혼은 오히려 회복되었어요. 아이러니하게도 건강하게 지낼 때는 삶이 그리 귀중한지 모르고 살았어요. 하지만 아프고 나서 20년 동안 만나지 않고 살았던 부모님을 다시 만나 미움으로 응어리진 마음을 풀었어요. 남편과 불화도 깊었지만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고 감사하며 더 많이 사랑하게 되었어요. 남겨질 아이들이 가장 걱정되긴 하지만 현실을 바꿀 수 없으니 그 어느 때보다 아이들에게 집중하고 있어요. 그리고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도 일기로 쓰고 있어요. 비록 아이들 곁에 엄마가 없지만 아이들 마음속에 미소 속에 언제나 제가 함께 할 거라는 걸 믿어요. 그래서 내 육신은 죽어가지만 그 어느 때보다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 영혼이 매일 소생하니 비록 제 시간은 짧지만 행복하다 죽는 거니 괜찮다고 할래요. 시간이 짧아 아쉽다는 점도 비교할 대상에 따라 길지도 몰라요. 저보다 더 이른 나이에 사고나 병으로 죽는 사람도 아주 많으니까요. 우리 모두는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시한부예요. 언니에게 힘든 일이 닥쳐도 꼭 제 말을 기억하고 주어진 하루를 행복하게 살길 바래요.”
수경의 미소를 보며 지원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한참을 더 울고 나서야 지원은 수경을 보며 말했다.
“수경 씨, 오히려 부럽다. 진심으로 너무 행복해 보여서.”
수경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거 봐요. 암에 걸려 호스피스 병동에 있는 저한테도 부러울 게 있죠?”
수경이 웃으며 하는 농담에 지원도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부디 그 친구분에게 제 얘기를 전해주세요. 제가 지금도 가장 마음이 아픈 건 어린 자식들을 두고 떠나야 한다는 거예요. 제 입장에서는 사랑하는 자식 곁을 오래 지킬 수 있는 그분이 가장 부러워요. 이렇듯 자신의 입장에서만 보면 최악의 상황도 비교 대상에 따라 달리 생각할 수 있으니 그분이 잘 극복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믿었던 남편이었는데 용서가 안 되는 건 당연하죠. 하지만 남편의 잘못 때문에 자신의 삶까지 송두리째 흔들리지 않길 바래요. 이미 남편은 그럴 가치가 없을 정도로 너무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잖아요. 남편 때문에 더 소중한 자신을 너무 고통스럽게 하지 말라고, 더욱이 그런 사람 때문에 죽을 이유는 없다고 말해 주세요. 물론 힘들겠지만 자신이 행복할 권리, 아이가 행복하게 살 권리에 집중해 최선의 선택을 하길 바란다고 전해주세요.”
지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경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언니. 나는 언니가 언니 일이 아닌 나나 친구 때문에 이렇게 힘들어하며 우니 마음이 너무 아파요. 각자 잘 알아서 할 테니 언니 일인 양 너무 신경 쓰고 아파하지 말아요.”
수경은 진심으로 지원이 걱정돼 그렇게 말했고 지원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때, 친구 은주가 병실에 들어왔다.
“어머. 손님 와계셨네?”
“언니, 제 친구예요. 왔어?”
지원이 울었던 흔적이 남아 있는 얼굴이 민망한지 고개를 숙이며 일어났다.
“아. 막 가려던 참이에요. 앉으세요.”
지원이 은주에게 의자를 내주며 말했다.
“언니. 괜찮아요. 함께 차 한잔 하러 나가요.”
수경이 지원의 팔을 잡으며 말했고 지원은 고개를 저었다. 너무 울어 빨갛게 부어 올라 있는 얼굴이 낯선 이에게 창피하게 여겨질 수 있겠다는 생각에 수경은 더 이상 그녀를 붙잡지 못했다.
“나 갈게. 몸 잘 챙기고.”
지원은 수경의 손을 잡으며 또 눈물을 글썽였다.
“네. 언니도 건강하시고 가족들에게 안부 전해주세요.”
“응. 전화할게.”
“네 언니. 고마워요 와줘서.”
지원은 그렇게 인사를 남기고 떠났고 은주가 의자에 앉았다.
“은주야. 나가자. 카페 가자. 할머니 주무시는데 여기 너무 시끄러웠다.”
“어? 그래.”
두 사람은 은주가 챙겨 온 종이 가방을 들고 카페로 갔다.
은주가 따듯한 차를 만들어 들고 와 수경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너 아프다고 와서 저렇게 울고 갔니? 엄청 운 얼굴이던데? 누구야?”
“아. 같은 동네 사는 보리 준이 같은 반 친구 엄마. 아니 꼭 내 문제만은 아니고. 친구 남편이 바람을 아주 심하게 폈대. 배신감 때문에 분노하며 매일 술 마시며 언니에게 전화해 우나 봐. 거기다 내가 안 보이고 연락이 안 되니 어린이집 원장님께 물어서 여길 온 거야. 친한 친구가 그리 되었지, 동네에서 친하게 지내던 나는 여기 있지..., 그러니 언니가 마음이 안 좋아 많이 울었어.”
“누가 보면 저 여자 남편이 바람피운 줄 알겠다. 얼굴이 퉁퉁 부었던데. 너무 울어서.”
수경도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너무 많이 울더라. 엄청 친한 친구인가 봐.”
주무신 줄 알았던 점돌 할머니가 카페로 내려오셨다. 마침 은주가 호박죽을 준비해 와 수경이 할머니를 부르며 일어섰다.
“할머니, 이리 오셔서 호박죽 좀 드세요.”
할머니가 수경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걸어오자 은주가 얼른 할머니가 앉을 의자를 뺐다. 점돌 할머니가 은주에게 고맙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 앉았다.
“아까 많이 소란스러웠죠? 죄송해요. 울고 있는데 중간에 말을 끊을 수도 없고 해서. TV 보시는데 불편하셨죠?”
점돌 할머니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들으려고 들은 게 아닌데... 그거 친구 얘기가 아니라 그 사람 본인 이야기야.”
수경이 할머니의 말에 깜짝 놀라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애기 엄마 아프고 곧 이 세상에 없을 사람이니 여기라도 와 자기 얘기 터놓고 울고 간 거야. 친정이나 친구 만날 할 얘기가 아니잖아. 그렇다고 혼자 그 엄청난 사실을 묻어두자니 가슴이 터질 것 같고. 자식 때문이라도 정신 차려야 되는데 싶어 여기에 와서라도 속 좀 풀고 간 거야. 자기 친구 얘기하는 것처럼 하며.”
은주와 수경은 놀라 서로 입이 벌어져 마주 보았다.
“어떻게 아세요? 전 친구 얘긴 줄로만 알았어요.”
할머니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남편도 젊었을 때 바람 꽤나 폈지. 허구한 날 바람피우다 결국 살림 차려 나갔어. 내 나이가 지금 74인데 남편이 나 40쯤인가. 내가 애 셋인데 그때 우리 막내아들이 10살, 큰 딸이 17살. 작은 딸이 15살. 남편이 그냥 집 나가서 서류상 이혼도 못하고 하루아침에 과부가 돼서 애들 건사하고 살았어. 자식들 먹여 살리느라 안 해본 일 없었지. 물건을 떼어 팔다가 어쨌든 돈이 조금 모여 국수 장사를 시작했지. 국수 장사가 그래도 생활비는 됐어. 큰 딸은 지 엄마 고생 덜어준다고 일치감치 공부 포기하고 공장 들어가 일하고.... 그래도 걔가 워낙 성실해서 곧 야간 학교 들어가 공부도 꾸준히 했어. 둘째 딸은 언니가 벌어준 돈으로 전문대학은 들어가 회사에 들어가 번 돈으로 지 막내 동생 공부 다 시켰어. 막내는 누나들 덕분에 미국까지 가서 지금은 박사 받은 교수가 됐어. 저희들끼리 번 돈으로 첫째 누나 시집보내고. 그래도 내 자식들이 애비 없이 살아 그런가 우애가 돈독해. 애들 덕분에 남편 없어도 힘을 내며 살았지. 살다 보니 우리 남편이 마누라 때리는 게 여사이던 시절에 오히려 고생한다고 내 손 어루만져주던 기억만 나더라. 이리 귀한 자식들의 애비라 생각하니 미운 마음도 사라졌어. 나는 우리 아저씨 함께 살 때보다 그때 더 사랑하며 살았어. 그런데 내가 나이 칠십 되던 해에 집 나갔던 남편이 30년 만에 돌아왔어. 애들은 그때 지금이라도 이혼하라며 난리가 났지. 그런데 나는 또 다 늙어 오갈 데 없는 영감이 불쌍해 하루 이틀 집에 머물게 하고 밥 차려 먹이다 한 해, 두 해 흘렀지. 애들 출가시켜놓고 적적했는데 남편이랑 친구처럼 함께 사니 썩 나쁘지도 않았고. 그이가 내 눈치, 애들 눈치 때문인지 집도 잘 치우고 내 밥상도 잘 차려주고. 뭐 늙어서 나 호강시켜주는 셈 쳤지. 또 고마운 건 그나마 이 여자 저 여자 좋아 다녔으면서도 다른 집에는 씨를 안 주려고 노력했는지 밖에서는 자식 하나 안 만들어 왔더라고.”
수경과 은주는 할머니의 인생 이야기를 심각한 얼굴로 듣고 있었다.
“고생 많으셨네요. 할머니. 너무 할아버지랑 사이가 좋으셔서 생각도 못했어요. 더군다나 할머니 얼굴이 너무 고와서 그런 고생을 하셨을 거라고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늘 사랑받고 편안하게 사신 줄로만 생각했어요.”
수경이 점돌 할머니의 팔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어떻게 할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었어요? 아휴”
은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애들도 처음에 남편한테 소리 지르고 나가라고 하고 염치도 없다고 욕하고 나보고 정말 속도 없다고 멍청하다고 하고.”
점돌 할머니는 그때 생각이 나는지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그래도 그 남편 덕분에 세 남매를 얻었잖아. 남편 덕분에 힘든 시간 우리끼리 똘똘 뭉쳐 살았기에 아이들 우애도 남들보다 더 두텁다 생각해. 하도 우애 있는 아이들이라 사위 며느리들도 서로가 서로에게 또 잘해. 그러니 남편이 뭐가 미워. 미운건 애당초 젊을 때 다 하고 없어. 처음 집 나가 한 2~3년 정도 힘들고 미웠고 했지. 나머지는 아이들이 너무 반듯하게 잘 자라 주어 기쁘게 생활했어. 자식들이랑 힘 합쳐서 일하고 공부하고 살았으니 참 좋았지. 남편 들어와 한 1~2년 재미나게 살다 내가 암에 걸린 거야. 그때부터 우리 아저씨 지금껏 참 많이 고생했어. 내 병시중 들라고 다시 왔나 봐. 우리 아이들도 한참 돈 벌랴 자식 키우랴 바쁠 나인데 우리 남편 없었으면 내 간호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 거야? 남편이 이렇게 내 병간호를 지극 정성으로 하니 자기들도 내 걱정 덜하고 지낼 수 있고. 요새는 지 아버지한테 소리도 안 지르고 눈도 안 흘겨. 이렇게 우리 아저씨는 자기 죄를 만회하는 거지. 아이들도 그리 생각하고 있을 거야. 지 아버지 건강도 챙기는 눈치거든. 내가 그래서 마음이 좋아. 죽기 전에 우리 아저씨가 다시 와 자식들 마음에 응어리 풀어 준 것도 좋고. 남편도 든든한 자식들 볼 수 있어 좋고. 내가 알아. 우리 아이들 심성으로는 우리 남편 혼자돼도 잘 모실 거야.”
은주는 할머니의 인생이 정말 대단하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점돌 할머니는 늘 그렇듯 인자한 얼굴로 은주를 귀엽다는 듯 보며 웃었다.
“전 머리채부터 잡았을 것 같아요 할머니.”
은주의 말에 모두 웃었다. 수경은 지원의 우는 얼굴이 떠올라 곧 마음이 무거워졌다.
“터놓고 울고 싶었어. 근데 친구들한테는 부끄러워 말 못 하고 친정 부모님들은 다 돌아가셨지, 부모님 있어도 친정에 가서 어찌 말해. 그래서 부모님 산소 가서 혼자 몇 시간을 속을 털어놓고 목놓아 울었어. 억울하고 자식들 데리고 살기 막막하잖아. 그리라도 얘기 안 하면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나도 그때 그랬어. 막걸리 한 병들고 가서. 그러니 오늘 그 친구 지 얘기하는 거야. 애기 엄마한테라도 말하고 울고나야 숨 쉴 수 있을 것 같아서.”
수경이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지만 한번 더 기회를 주라고 했으면 좋겠구먼. 내가 언젠가 우리 아저씨한테 물어봤어. 왜 자식 셋을 두고 나갔냐고?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도 아니고 애들한테 마음이 없어서 나간 게 아니라 그 상대방 여자가 농약 먹고 죽겠다고 했대. 그때 우리 아저씨도 그 여자를 사랑한 터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대. 그 여자 죽을까 봐. 그래서 그때부터는 그 여자랑 둘이 살면서 다시는 바람 안 피고 살았대. 그 여자 죽을 때까지 기다려 나이 70이 넘어 그 여자 죽고 왔대. 그래도 그 여자에서 자식은 안 놓으려고 병원 가서 묶었다고 했어. 그것이 나한테 대한 의리였다면 의리였겠지. 젊었을 때는 그냥 남자들이 그 짓이 좋으니 그냥 사랑하는 마누라 있고 새끼가 있어도 아무 생각 없이 이 여자 저 여자 찝쩍거리며 사랑하네 어쩌네 하며 철없이 돌아다녀. 우리 아저씨 늙어서 그렇지 또 젊었을 때는 한 인물 했거든”
“아니요. 지금도 멋있으세요.”
수경이 말했다.
“봐. 애 셋 아버지라도 남자는 철이 없어. 죽을 때 돼야 철들어.”
점돌 할머니는 웃었다. 수경과 은주도 할머니 말에 따라 웃었다.
“애기 엄마 친구. 자식 때문에 못 헤어지겠다 하고. 친구가 때리더라도 남편이 다 맞으며 미안하다 하니 남편이 그 친구에게 정 없어 그런 게 아니야. 아직 철없고 젊어서 그래. 물론 친구가 상심이 크고 앞으로 못 믿고 살겠지만 내 고운 새끼 이 세상에서 빛 보게 해 준 것 감사하다 하고 한번 더 기회를 주라고 하고 싶네. 나는 돌이켜 생각해보면 집안 살림밖에 못하던 내가 억척 국수 장사꾼 되고 내가 돈벌이를 할 수 있었던 것도 남편 덕분이라 생각해. 나이 더 들면 이 늙은이 말 이해할래나? 인생이 다 그래. 곧 죽겠어도 참고 살다 보면 또 참길 잘했다 싶은 게 있어.”
수경은 점돌 할머니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할머니는 없는 것, 잃어버린 것, 빼앗긴 것에 집중하지 않았다. 남편이 바람 나 어린 자식 셋을 놓고 집을 나갔음에도 자식을 남겨줬음에 감사하는 자세로 최선을 다해 살았다. 그래서 고생이라고는 몰랐을 법한 우아하고 온화한 할머니의 미소가 결국 자신의 마음가짐으로 빚은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남편을 안 보고 살아도 사랑했다는 할머니의 말이 떠올라 뭉클해졌다. 사랑하는 아이들 모습 속에서 할머니는 한결같이 할아버지를 사랑했을 것이다. 늘 할아버지가 정성스레 할머니를 돌보시던 모습을 떠올리며 수경은 두 분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처까지 보듬은 사랑, 서로를 아프게 했지만 용서의 기회를 주고 용서를 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었다. 아직도 할머니보다 한참 어린 수경은 어떤 말로 지원을 위로를 해야 좋을지 떠오르지 않았지만 할머니의 이야기를 전해주기로 했다.
수경과 점돌 할머니가 은주가 싸 온 호박죽을 맛있게 먹고 있을 때, 할머니의 남편이 카페로 들어왔다. 손에는 장미꽃 한 송이가 있었다. 할머니 곁에 있는 수경과 은주를 보며 할아버지가 쑥스러워하며 다가오자 수경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호박죽 좀 드세요.”
할아버지는 할머니께 장미를 내밀었다.
“요 앞에 어떤 청년이 왔다 갔다 하며 이 장미를 팔잖아. 비가 오는 수요일엔 장미래.”
장미를 받아 든 점돌 할머니가 20대 여자처럼 환하게 웃었다. 할아버지도 할머니의 미소에 기분이 좋았는지 빙그레 웃었다. 용서가 더해지면 사랑의 크기는 배가 된다.
은주와 수경도 마주 보고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