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병실의 폐암 말기 환자인 진태 할아버지를 아이들은 Angry 할아버지로 부르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2주일 동안 병원에 들러 인사를 해도 한 번도 제대로 받아주지 않았고 늘 화난 얼굴로 투덜대는 일이 잦았다. 병실 내 그 누구도 할아버지에게 쉽게 말을 걸지 못했다.
수경의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병실에 도착했고 새어머니는 인사를 마치자마자 보온병을 열었다.
“몸에 좋은 영지버섯 달인 물이니 좀 마셔봐.”
새어머니가 컵에 그것을 따르며 수경에게 내밀었고 아버지는 수경이 마시는 동안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픈 건?”
아버지가 물었고 수경이 고개를 흔들었다.
“없어요. 아프면 모르핀을 맞으면 금세 괜찮아져요. 여기서 지내니 덜 무서워요.”
수경이 웃는 얼굴에 힘을 주며 대답했지만 부모님의 얼굴빛이 어두웠다.
“장사하시느라 힘드신데 애들까지 돌봐주시고. 감사드려요.”
수경이 호스피스 병원에 들어온 후, 새어머니가 아침 일찍 집으로 와 아이들을 깨워 아침을 먹여 어린이집으로 보내주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해야 할 식당 준비를 사람을 고용해 함께 했다. 쉬는 날은 오전에 병원에 와 이렇게 수경을 만나고 저녁에 수경의 집으로 가 Ryan과 아이들에게 저녁을 차려주고 1주일 먹을 반찬을 만들었다. 부모님이 아니었다면 수경은 호스피스 병동에서도 아이들과 Ryan 걱정으로 안절부절못했을 것이다. 버섯 달인 물을 다 마시고 수경의 빈 잔을 새어머니가 받아 세면대로 가 씻는 사이 아버지와 수경은 말없이 TV를 봤다. Angry 할아버지는 시사프로그램을 보시며 혀를 차거나 가끔 욕까지 했다. 할아버지 곁에는 며칠 전 새로 바뀐 간병인이 앉아 있었고 멍하니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이고 속이 천불이 난다. 정치를 저따위로 하고 원. 어이. 물 한잔 쥬슈.”
Angry 할아버지는 간병인에게 짜증을 내며 말했고 간병인은 무표정으로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컵에 따라 할아버지에게 내밀었다.
“다른 환자도 있는데 조금만 조용히 해주세요.”
수경의 아버지가 Angry 할아버지를 보며 말했고 할아버지는 못 들은 체하며 기침을 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TV를 보며 더 이상 욕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수경은 그가 아버지 눈치를 보는 것 같아 내심 든든했다. 새어머니가 자리에 돌아와 수경의 침대나 테이블을 닦아 주었다.
“괜찮아요. 좀 앉으세요.”
수경은 병실에서도 쉬지도 못하고 부지런히 일하는 새어머니가 안쓰러워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새어머니는 앉자마자 보리와 준이를 돌보며 일어난 에피소드를 수경에게 들려주었다. 수경은 그 얘기를 들으며 웃었고 곁에 있던 아버지도 시선은 TV에 있었지만 그 얘기를 듣는지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오늘은 글쎄, 준이가 할머니 왜 머리를 흰색으로 칠했냐고 묻대? 내가 무슨 말이냐고 묻자 내 머리를 만져보며 지워지지도 않는다고 얼마나 걱정인지.”
새어머니는 그 장면을 떠올리며 웃었다. 예전에 함께 아이들과 그림을 그리다가 옷에 묻은 물감이 지워지지 않아 걱정했던 장면이 떠올라 수경도 웃었다.
“내가 요새 걔들 보는 낙으로 산다. 얼마나 웃기고 귀여운지.”
수경이 새어머니 손을 잡으며 말했다.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아이들이 두 분 사랑 덕분에 제가 없어도 밝은 얼굴로 병원 왔다가 집으로 돌아가요.”
새어머니도 수경의 손을 꼭 잡고 다른 한 손으로 토닥이며 말했다.
“애들 걱정하지 마. 네가 아주 잘 키워서 애들이 밝고 어딜 가도 사랑받겠어. 내가 어린이집도 데리고 가보니 우리 보리 준이가 거기서도 인기 최고더라.”
수경은 눈물이 핑돌아 고개를 숙였다.
“가끔 동네 친구나 은주도 애들 먹일 거, Ryan 먹을 거 싸가지고 오고. 애들 걱정하지 말어. 우리도 있고 네 친구들도 있고. 든든한 아빠도 있으니까. 그제는 은주가 남편이랑 애들 데리고 와서 저녁 먹고 있대? 내가 잠깐 사골 끓인 거 애들 저녁 먹이라고 들렀거든. 푸짐하게 차려 잘 먹이고 있더라.”
그렇게 부모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TV를 보는데 새어머니가 시계를 확인하더니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내가 오늘은 약속이 좀 있어 나가 봐야겠다. 모레쯤 장사 일찍 마쳐놓고 또 올게. 버섯 달인 물 그때까지 다 마셔라. 새로 달여 올 테니.”
새어머니는 수경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그렇게 말했고 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경이 따라 일어서려는데 아버지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나오지 마라. 좀 쉬어라. 모레 오마.”
그렇게 부모님은 짧은 인사를 하고 떠났다. 부모님이 나가시자마자 진태 할아버지의 큰 딸이 병실로 들어왔다.
“아버지.”
“네가 여길 어디라고 와? 몹쓸 년”
딸이 들어서자마자 할아버지가 옆에 있던 신문을 잡아채 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딸은 한숨을 쉬며 바닥에서 신문을 주웠다.
“아버지. 좀 그만하세요. 이러니 아무도 병원에 못 오잖아요. 며느리들도 욕할 것 없으세요. 올 때마다 이렇게 역정을 내시니 누가와요?”
“돈만 다 받아 처먹고 애비 나 몰라라 하는 불효 막심한 것들.”
할아버지는 딸을 노려보며 말했다.
“아버지. 누가 돈만 다 받아 처먹어요?”
딸은 힐끗 간병인과 병실에 있던 수경의 눈치를 봤고 수경은 괜스레 옆에 있던 책을 잡았다. 수경도 듣고 있기에 민망했다.
“아버지 제가 학회 때문에 지난주 미국에 있었어요. 오자마자 병원으로 제일 먼저 온 거예요. 역정 그만 내세요.”
딸이 간병인이 내어주는 의자에 앉으며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부모 알기를...”
할아버지는 딸에게 눈을 한번 흘기고서는 조용해졌다.
“몸은 좀 어떠세요?”
“왜 선산 땅 다 팔아먹으려고 니 오라비가 곧 죽을지 알아오라든?”
딸은 어이없어했다.
“혹시 저 식사를 못했는데 밑에 가서 도시락 좀 사다 주실 수 있으세요?”
딸이 간병인 앞에서 민망했는지 그녀에게 부탁했고 간병인은 자리를 떠났다. 수경은 피곤해서 자리에 누워 자는 척을 했다.
“아버지 이렇게 화낼 이유 없으세요 저희들 공부시키면서도 돈 먹는 괴물들처럼 말씀하시고. 그럼 자식 넷을 왜 낳으셨어요? 부모가 자식 입히고 먹이고 공부시키는 게 당연하지, 그게 뭘 그렇게 못마땅하세요? 아버지 돈 잘 벌어 저희 남매들 몸은 편했지만요 엄마부터 저희들까지 아버지 그 언어폭력에 하루라도 마음 편한 날 없었어요. 그래서 엄마나 우리들 아버지 말처럼 돈 먹는 괴물 안되려고 얼마나 이 꽉 깨물고 노력했는대요? 아버지 덕분에 저희들 공부 많이 한 것 인정해요. 그래서 다들 앞 날 걱정 없이 자기 앞가림할 수 있으니 재산 안 물려주셔도 돼요. 누가 들으면 정말 저희들이 아버지 재산에 혈안 된 사람 같을 거예요. 아버지 돈 안 물려주셔도 되니 주기 싫으시면 모두 사회에 환원하세요. 저희가 지난번 아버지 재산에 대해 드린 말은 돌아가시기 전에 미리 마지막 정리를 하셔야 되지 않나 싶어 건넨 의견이었어요.”
딸은 할아버지 옆에 앉아 조목조목 나직이 말했다.
“아버지 밖에서 사업하시는 분들과는 웃는 얼굴이고 집에 와 저희들에게 이렇게 스트레스 푸셨어요. 그런데 아직도 뭘 그렇게 저희들에게 화풀이하실게 남았어요?”
“마음에 드는 것 하나 없어. 똑바로 해야지. 똑바로. 네 엄마부터 헤퍼가지고. 어.”
딸이 참다못해 목소리를 높였다.
“돌아가신 엄마 얘기는 왜 하세요? 엄마 화병으로 돌아가셨어요. 아버지.”
딸은 의자에 일어나기까지 했다.
“헤프시다니요? 엄마 살아생전 저희 공부에 돈 아끼시지 않으셨지, 아버지 성화에 변변한 옷 한번 못 사 입고 사셨어요. 사실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는 다 엄마 덕분에 공부 많이 하고 이만큼 된 거예요. 아버지는 늘 그렇게 우리들이 돈 쓰는 걸 아까워하셨고요. 공부에 무슨 돈이 드느냐면서. 그래서 이제 그 돈 다 어디 쓰시게요? 옛날처럼 술 드시고 여자 만나는데 쓰시려고요? 그만 좀 하세요 제발. 정말 지긋지긋해요.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아셨죠? 저희 어릴 때부터 아버지 그러고 다니시는 거 다 알았어요. 그러니까 엄마 위해 모두 이 꽉 깨물고 공부했죠. 엄마에 대해 다시 한번 막말하시면 아버지 죽는다 해도 얼굴 보러 안 와요 저.”
화가 난 딸은 이제 이성을 잃은 것처럼 퍼부어댔다. 수경은 그 자리가 불편해 일어나 나가려고 해도 눈치가 보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년이 미쳤나? 어디 처와서 이 지랄이야? 누구 덕에 밥 처먹고 공부하고 부잣집 딸내미 소리 듣고 자랐는데? 지 엄마 하는 얘기에 놀아나서. 미친 여편네가 의부증이 있어가지고.”
“아버지! 미안하다 하세요. 잘못했다고 하시면 되지 왜 우리 엄마를 의부증으로 몰아가요? 그러니 속이 문드러져 돌아가셨잖아요. 아버지의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저도 이렇게 피가 거꾸로 쏟아지는 것 같은데 엄마가 오죽하셨을까요? 이제 아버지 알아서 하세요. 저도 이제 다시는 안 올 거예요. 앞으로 아버지 돈으로 간병인 쓰시고 아버지가 간병인 알아보세요. 여태껏 간병인만 해도 일곱 분이나 바뀌셨어요. 아무리 돈이 궁해도 저 같아도 아버지 같은 사람 못 모셔요. 이번 간병인도 그만두시면 아버지가 다 알아서 하세요. 정말 지긋지긋해요. 돌아가실 날 얼마 안 남으셔도 어떻게 끝까지 이럴 수가 있어요, 그래? 어떻게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 독불장군이세요? 아버지는 자기만 옳다고 믿고 이기적이며 반성 따위는 없는 사람이에요. 아버지는 사실이나 기억도 아버지 위주로 각색하고 그것이 진실인 양 우리들한테 이야기해요. 아세요? 아버지는 아마 정신병도 있을 거예요. 폐 보다 정신에 암 덩어리로 가득 차 있을 거예요.”
딸은 이미 얼굴까지 벌게져서 완전히 이성을 잃고 소리쳤다.
“이년이. 이제 이거 막말을 하는구나. 내가 돈 줄 생각이 없다는 거 아니까 천륜까지 저버리고 아비한테. 그것도 아파 죽는 아비한테 이년이 죽으라고 장사를 지내는구나.”
할아버지는 딸을 때기리라도 하려는 듯 손까지 높이 들고 소리쳤다. 딸은 침대에서 뒤로 물러나며 그동안 쌓인 마지막 울분을 토해 내듯 말했다.
“뭐가 그리 억울하세요? 살아생전 가족들한테 돈 많이 벌어준다는 이유로 생색 내실만큼 내셨으면서. 밥 먹는 것부터 공부하는 것까지 감사하라고 저희들 눈치 주시며 아버지 맘껏 사셨잖아요. 아버지 나이가 이든 여섯이세요. 호스피스 병동까지 오셔서도 죽음에 대한 생각은 안 해보세요? 어떻게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이렇게 막무가내세요? 얼마나 젊디 젊은 사람이 여기 많아요? 그분들에 비해 아버지는 막말로 사실만큼 사셨어요. 그런데 뭐가 그리 억울해 이렇게 매일 화를 내세요? 아버지만큼 마음대로 사시다가 늙어 돌아가시는 건 호상이라고 불러요. 그렇게 잘나신 분이니 장례도 혼자 치르세요! 아버지, 돌아가실 때 그 돈 다 못 가져가세요. 아버지는 아버지가 왕이니 그 돈으로 국상처럼 어마어마하게 장례 치르세요.”
딸은 붉어진 얼굴로 최대한 소리 지르는 걸 자제하면서도 마음 밑바닥까지 차 있는 분노를 터트리고 병실 문을 나갔다.
“저 미친년이. 저년이 돌았구나. 저 죽일 년”
할아버지는 화가 나 욕을 하면서 숨을 가파르게 쉬었다. 병실에 수경과 할아버지 단 둘 뿐이라 수경이 걱정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딸의 울분도 이해가 되었지만 수경이 듣기에도 잔인한 말이었다. 할아버지는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수경은 놀라서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물었다.
“간호사를 부를까요?”
할아버지는 기침을 하면서 휴지통을 찾아 피를 뱉었다.
“신경 꺼. 나 안 죽어.”
수경은 할아버지의 역정에 당황해 자리로 돌아가려고 몸을 돌렸다.
“병들어 누워 있는 것도 불효야. 알아? 부모가 식당 하며 애까지 봐주고 병원 들러 이것저것 해먹이고. 자랄 때는 뼈 빠지게 일해 공부시키고 시집보냈는데 부모 앞서 죽는다고 누워있는 자네 걱정이나 해.”
할아버지 말이 수경의 가슴을 깊이 찔러 수경은 휙 돌아 할아버지를 노려봤다. 자신은 그저 할아버지가 걱정돼 말을 붙였을 뿐인데 이런 모진 소리를 들으니 화가 나기도 했고 무엇보다 눈물이 났다. 수경은 할아버지를 노려보며 울면서 말했다.
“네 맞아요. 할아버지. 저 불효를 저질렀어요. 그런데 부모님께 불효 저지르고 어린 자식들 건사하지 않으려고 제가 일부러 암에 걸렸겠어요? 저는 아이들한테도 죄인이고 부모한테도 죄인이에요. 그래서 암에 걸려 고통스러운 것보다 그 생각에 더 고통스러워요.”
수경은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간병인이 막 도시락을 사들고 들어왔다. 수경이 할아버지를 향해 서서 우는 것을 보고 얼른 수경에게 다가가 팔을 잡고 위로했다.
“할아버지가 왜 그렇게 모진 말로 다른 사람 마음을 아프게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할아버지 말은 정말 너무 아프네요. 며칠 병실을 같이 쓴 인연으로 저한테도 이렇게 아픈 말로 가슴에 대못을 박는데 할아버지 가족들은 그 오랜 시간 어떻게 견뎠는지 모르겠네요. 할아버지, 그러지 마세요. 할아버지 말은 폭력이에요. 너무 심하세요.”
수경이 소리 내어 크게 울었다.
“누가 아프려고 일부러.... 불효를 저지르려고 일부러 아프나요? 참 어떻게 말씀을 그리 하세요? 제가 지금 암으로 죽는 것보다 그게 더 아픈데.”
간병인이 간호사실로 나가 귀띔해주었기 때문에 미정이 급하게 병실로 들어왔다. 할아버지는 수경의 울음에 헛기침만 하고 창문 밖으로 얼굴을 돌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경은 울고 또 울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미정이 그녀의 팔을 잡고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수경 선생님, 나오세요. 저랑 산책해요.”
미정과 수경이 병실에서 나와 산책길을 걸었다. 미정은 수경이 울 수 있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함께 걸었다. 한참을 울고 난 수경의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저한테 불똥이 떨어졌네요.”
수경은 미소를 지으며 미정을 쳐다보았다.
“네?”
미정이 궁금한 얼굴로 물었고 수경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큰 딸과 싸우셨어요. 마침 저는 조금 피곤해 침대에서 좀 쉬려고 누워있다가 두 분 대화를 들었고요. 딸이 화가 나 떠나신 후, 할아버지께서 기침이 너무 심하셔서 괜찮으시냐고 여쭙다 봉변당했네요.”
둘은 웃었다.
“미안해요 수경 선생님. 진태 할아버지께 모진 소리 들으신 거요.”
수경은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 잘못이 아닌데요.”
“할아버지는 1인 병실을 쓰고 싶어 하셨어요. 그런데 제가 할아버지를 뵈니 너무 외로워 보이셨어요. 다른 사람들과 지내면서 분노도 좀 푸셨으면 했고 덜 외로우시길 바랬어요. 그래서 제가 일부러 개인 병실이 다 찼다고 기다리셔야 한다고 말하며 4인 병실로 모셨어요.”
수경은 미정의 말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본의 아니게 따님 얘기를 들었어요. 돈도 잘 버셨고 자식들 모두 공부도 많이 하시고 다 잘 되셨는데 왜 그렇게 사나우실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분노에 차 모진 말을 하시 필요가 없으신 것 같은데. 늘 화나 계세요.”
미정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속속들이 잘은 모르겠지만 호스피스 병원으로 처음 들어오셨을 때, 큰 따님께서 오셔서 할아버지에 대해 이야기 해준 적이 있어요. 할아버지의 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라고. 할아버지의 아버지께서 어느 부잣집에 종살이를 하시다 맞아서 돌아가신 것 같아요. 그걸 또 10살쯤이셨던 진태 할아버지가 목격한 거죠. 자기 아버지가 부자에게 맞아 죽은 후,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이일 저일 가리지 않고 돈을 버셨나 봐요. 어린 나이부터 ‘돈돈돈’ 한 거죠. 몸이 부서져라 가리지 않고 일하며 세상에 쓴 맛을 많이 보셨대요. 결국에는 부자가 되었고 가정을 이루었지만 그 상처들을 사랑하는 가족들과 살며 치유하는 대신 가족들에게 억눌렸던 분노를 터트리며 힘들게 하셨나 봐요. 죄 없고 힘없는 아내나 아이들이 그 분노의 희생양이 되었죠. 할아버지의 화는 워낙 오래되고 깊어서 습관이 되었고 이제 할아버지 자체가 돼버렸죠. 병에 걸려 돌아가시게 된 사실이 억울해 화가 더 심해졌어요. 아무래도 다른 환자분들을 위해서라도 할아버지가 원하시는 1인실 병실로 모셔야겠어요. 간병인도 이곳에서만 벌써 세 번째 바뀌었어요. 저는 할아버지를 조금이나마 덜 외롭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할아버지는 아마 돌아가실 때까지 마음을 바꾸실 것 같지 않아요.”
미정이 긴 한숨을 쉬며 말했고 그 말을 들은 수경도 한숨이 나왔다
. “이제 더 이상 저한테는 아무 말도 하시지 않을 것 같아요. 그리고 할아버지 이야기를 듣고 나니 어쩐지 할아버지가 측은해요. 저는 할아버지와 함께 병실을 써도 괜찮아요.”
수경은 10세 소년이었던 할아버지가 자기 눈앞에 맞아 죽어가는 아버지를 보며 울부짖는 장면이 연상되었다. 그 울부짖는 소년은 온 생애에 거쳐 할아버지 삶에 남겨져 있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맞아 죽던 아버지를 지켜보기만 해야 했던 나약하고 비참했던 자신을 계속 붙잡고 살았기에 할아버지는 정작 자기 앞의 행복을 보지 못했다. 스스로가 치열하게 일해서 번 돈을 자신감으로 여기고 가족들을 사랑하는 것으로 자신의 상처를 치유했더라면 할아버지는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되돌릴 수도, 되돌아갈 수도 없는 과거를 붙잡고 죽을 때까지 열 살로 살기를 결정하면서 할아버지는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잃었나?
“할아버지가 너무 가여워요. 너무 아픈 과거에 집착하며 사느라 정작 가장 중요한 자신과 가족을 보지 못하고 사셨네요. 그렇게 사시다 외롭게 돌아가신다고 생각하니 안타까워요.”
수경의 말에 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아까 할아버지가 한 말은 제 마음에 담아 두지 않을래요. 앞으로 할아버지가 무슨 말씀을 하거나 화가 난 얼굴 하셔도 상처받지 않겠어요. 다른 사람의 말에 상처를 받고 받지 않고는 제 선택이잖아요. 할아버지가 그저 안타깝네요. 얼른 그 분노에서 벗어나 가족들과 화해하고 남은 시간 조금이라도 더 마음 편히 지내시면 좋겠어요.”
“맞아요. 할아버지 말에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그렇게라도 폭력을 휘두르셔야 할아버지가 살아가실 수 있나 봐요. 너무 오랜 습관이 돼서. 제가 상담을 하고 몇 번이나 정신과 상담, 신부님과 스님, 목사님까지 다 동원해봐도 할아버지의 분노는 어쩔 도리가 없었어요. 사실 제가 큰 따님께 전화해 한번 다녀가시라고 설득했어요.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나서 유감이에요.”
죽음 앞에서도
깨닫지 못하는 것들,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죽는다는 사실이 더해져 분노에 차 복수하 듯 세상을 할퀴는 사람들도 있다. 자신이 만든 감옥에 자신을 가두어 분노를 표현하며 이리저리 부딪쳐봐도 결국 멍드는 건 자신뿐인데. 그 작은 공간 안에서 온 몸을 사면의 벽에 부딪치며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안타깝다. 얼른 감옥에서 나와 너른 세상에서 편안히 자유를 만끽했으면. 그 감옥 속으로 도움의 손을 내미는 사람을 끌어들여 아프게 하지 말고 밖으로 나와 그 손잡고 자연 속에서 산책을 했으면. 자신이 서있는 이 산책길에 서서 수경은 바랬다.
수경이 다시 병실로 들어갔을 때는 재욱도, 점돌 할머니와 남편도, 진태 할아버지도 모두 돌아와 있었다. 수경은 오후에 새어머니가 끓여온 영지버섯 달인 물을 종이컵에 담아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나눠주었다.
“드세요. 저희 어머니께서 영지 달인 물을 가지고 오셨어요.”
Angry 진태 할아버지에게 수경이 잔을 내밀며 말했다.
“할아버지 말이 모두 맞아요. 저 불효를 저질렀어요. 잘못했어요. 저도 어쩔 수 없었으니 용서해주시고 가끔 저랑 이야기하며 제가 모르는 아버지 마음. 할아버지가 모르는 딸 마음에 대해 대화 나누실래요? 제가 죽기 전까지는 우리 아버지 마음 조금이라도 헤아려 효도할 수 있게요. 그리고 아까 오신 따님 뵈니 할아버지 닮아 이목구비가 시원하고 키가 아주 크대요? 정말 멋있었어요.”
할아버지가 수경을 물끄러미 보더니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수경이 내미는 잔을 넌지시 받았다. 할아버지는 수경의 미소를 외면하고 이내 TV로 고개를 돌렸으나 수경은 그것이 할아버지의 긍정적인 태도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진태 할아버지가 수경에게 열 살 소년으로 보였다. 수경은 할아버지 마지막을 조금 귀찮게 해 드려야겠다고 다짐했다. 홀로 그 좁은 방 안에 갇힌 채로 열 살 소년이 죽는다는 게 너무 마음이 아팠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