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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manf Oct 27. 2022

50.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방법


기독교인으로 1년 9개월 정도의 시간을 보내고 성경말씀에 많은 시간을 투자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무엇을 놓고 기도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내가 결정하는 습관들 때문에 결정하고 나서 “도와주세요” 하는 기도를 더 많이 하며 살고 있다.


얼마 전부터 한글학교 교감 선생님 자리를 권유받은 나는 하나님이 세우시면 순종해야지 생각하고 그것이 세우는 일이라고 생각해해야겠다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계속 마음에서 화가 밀려오거나 걱정들이 밀려왔고 남편과 친구들과 의논해 다양한 의견을 들었지만 선뜻 마음먹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영성 어머니처럼 지내는 집사님께서 “이걸 두고 주님께 기도로 여쭈었나요?” 질문하셨고 나는 그제야 기도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나 혼자 결정하고 “주님, 교감할 테니 도와주셔야 해요!”하며 기도해왔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 날밤 이렇게 기도했다.

먼저 여쭤보지 못해 죄송하다는 회개 기도와 주님 징표를 보여주시면 하라는 말씀으로 알아듣고 하겠으니 이런저런 증거를 보여달라고 구체적으로 지목하고 기도를 끝냈다. 그리고 “주님, 답변 주세요.”하며 그렇게 이틀을 기도했다. 나는 이 기도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도 파악하지 못했다.


그런데 아침 묵상 중, 에스더 6장을 읽다가 말씀을 주셨다. 그 장을 읽을 때, 우리가 자율의지로 선택하는 것 같아도 주님 섭리 안에 있고, 그렇다고 우리가 주님 시키는 대로 산다는 말이 아닌, 우리가 선택을 하지만 주님의 섭리 안에서 물이 흐르듯 주님의 계획대로 결국 흐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때, “나는 너를 로봇으로 만들지 않았다. 네가 남편과 친구들과 의논하듯이 나와도 그렇게 대화해야 하는 게 아니겠니? 그 과정에서 우리가 결론을 찾고 최종적으로 네가 결정을 하게 되는 거지, 나는 하라, 하지 마라 징표를 보여주는 점쟁이들이 모시는 귀신이 아니다.”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다.


주님이 살아계시다는 말을 매일 하면서도 살아있는 친구들과 가족들과는 의논하는 일을 내 주 되시는 주님께는 의논조차 하지 않고 없는 분으로 취급한 나의 무례함이 죄스러웠다.


그때부터 나는 주님과 교감 자리에 대한 문제를 다각도로 의논했다. 내가 걱정하고 염려하는 부분, 내가 하면 어떻게 할 수 있다 하는 포부. 그저 매일매일 친구들에게 하듯 자연스럽게 나의 생각들을 주님께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주님이 친구들보다 더 좋은 점은 속마음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다 말씀드릴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때부터 놀랍게도 사소한 질문, 걱정까지도 응답해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책으로나 친구의 입으로나 다양한 경로로 내가 궁금해하고 걱정스러워했던 부분에 대해 답을 주셨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 3일 동안 매일 눈물 글썽이며 주님께 감사했다.

긍정적인 대답을 받은 확신이 들면서도 끝까지 내 마음에 기쁨이 없다는 사실을 그다음 날  새벽 주님께 고백하게 되었다.

고백 후, 아침에 잠결에 주신 찬양 들으며 강아지와 산책을 시작했다.


찬양을 듣는 동안 주님이 전혀 뜻밖의 장면을 보여주셨다.

내 불우한 어린 시절이었다.
사랑받고 싶어 다른 사람 눈치를 보고 잘 보이려 과장하고 때로는 숨기기도 했던 나, 부모가 나를 떠났고 친구들이 나를 떠났기에 불안했다. 그 불안감을 감추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쿨한 척하면서도 여전히 거절당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약속이 취소되는 것조차도 나를 중요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화를 내기도 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가면을 썼다. 나는 누구에게 거절도 잘하지 못하고 약속 취소도 잘 못한다. 좋은 모습만 보이고 잘 보이고 싶어 하고 항상 다른 사람이 먼저 내게 다가오기도 바란다. 내가 다가가면서도 자신감이 없고 모든 사람들이 나를 주목하고 나를 어떤 약속에 데려가 주기를 기대하고 항상 내 주위에 머물러 주기를, 나를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적나라한 내 모습이었다. 완전히 보여주는 것조차도 창피하고 두려운 내 불안감이었다. 그것은 때로는 내가 잊기도 하고 살고 나도 정확히 바라볼 수 없었던 감정들이었다. 화를 내는 것으로 외면해오던 감정이었고 내 약함을 드러내는 것 같아 더 강한 가면을 써야 했던 감정들이었다.

그때, 주님 음성이 들렸다.

“내가 언제 네게 일하라고 교감 선생님 하라고 했니?”

나는 그 질문에 당황했다. 내가 요즘 성경 공부하고 모든 일상이 말씀 묵상하고 공부하고 생각하는 것으로 할애하고 복음에 관해 고민하니 그런 나를 그곳에 세워 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 하나님의 일꾼으로 본보기를 보이며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답게 행동으로 복음을 전하라는 의도가 아니었으면 무엇이었나? 나는 그 질문에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이유가 아니라는 것은 질문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너를 일 시키려고 그 자리에 세우려는 게 아니라 네 마음속에 있는 그 사랑받고 싶어 다른 사람 눈치를 보고 사는 그 불안감을 깨뜨리고 자유롭게 해 주기 위해 그 자리에 세우는 것이다.”

“너는 그 큰 공포와 불안감의 족쇄에 묶여 나를 알면서도 누리지 못하고 자유롭지 못해 네가 너무 불쌍하다.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 내가 너를 교감으로 세워 그 모든 다양한 인간관계를 경험하게 함으로 니 속에 있는 너를 잡고 있는 그 모든 고통의 뿌리를 꺼내려는 것이다. 그리고 너를 자유롭게 해 주기 위함이다. 너를 자유롭게 훨훨 날게 해 주기 위함이다.”


나는 걷다가 그 자리에서 오열했다.

내가 예상했던, 예상할 수도 없었던 주님의 대답이었다.

내 마음속 불안과 공포를 나보다 주님이 더 잘 알고 계셨다. 내 모든 고통과 스트레스의 원인과 나조차도 알 수 없는 화와 모든 내면의 문제의 근본이 되는 부분을 지적해 주셨다.

나조차도 그것이 모든 것의 원인이라 생각 못했고 좋아졌다 착각했었던 그 문제를. 하나님은 뿌리까지 뽑아내 없애고 족쇄를 끊어내 자유롭게 해 주시겠다 하셨다.


나는 순간, 내가 주님 위해 무언가를 할 것처럼, 나를 교감으로 세우시는 것은 내가 주님 위해 일해드리는 것처럼 교만을 떨었다. 그래서 끝까지 마음에 기쁨이 없었던 것이다.

살아 있는 주님, 나를 사랑하고 내 죄 때문에 죽으신 예수님이라 매일매일 입으로 고백하면서도 주님 일하는 것도 싫어해 기뻐하지 않고 뭔가 내가 해드리는 것처럼 굴기도 했고 아예 묻지도 않고 맘대로 결정해버리려 했던 이런 나를, 내인의 문제를 해결시키고 나를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 그런 결정을 하셨다니.

주님의 사역을 하라고 일을 시키시는 주님이 아니라 그런 것은 우리들의 생각일 뿐, 오히려 주님은 오직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고 진정으로 자유를 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만 관심을 두고 일하심을 보았다.


이런 교만하고 더럽고 이기적인 내 죄에 대해서는 야단도 치지 않으시고 나의 아픔을 없애시려고 ‘교감’으로 세우겠다고 자상한 목소리의 아버지가 사랑하는 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그 큰 사랑에 목이 메어 울고 또 울었다.

주님께서 일 시킨다고 생각해 화를 내고 툴툴거리며  받아들이지 못했던 내 모습이 기억난다.

주님은 애당초 사역하라고 부탁하지도 묻지도 않으셨다. (아마 아직 자격이 될 것 같지도 않다)


그날 내가 만난 주님은 내 마음 안에 아픔과 두려움을 보시고 그것의 뿌리까지라도 다 뽑아 나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으신 분이셨다. 아직도 족쇄에 묶여 있는 나를 안타깝고 슬픈 눈으로 바라보며 불쌍하다 하셨다. 그래서 수술하시는 의사 선생님 마음으로 내 오랜 아픔과 문제를 유발하는 종기를 도려내시겠다고 하신 것이었다. 그것이 교감되라는 이유였다.


예전에 딸에게 수영 가르칠 때, 금방 손만 뻗은 거리에 몸만 던지면 내가 잡아준다고 시도해보라 해도 두려움에 떨면서 수영장 벽만 잡고 오지 못해 30분 넘게 나와 딸이 실랑이를 벌였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 나는 “왜 이렇게 엄마를 못 믿고 두려워하냐?”며 딸에게 화를 내기까지 했다.

딸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나도 나도 그날 꼭 수영시키겠다는 일념이었기에 오랜 시간 실랑이 끝에 마침내 손을 벽에서 떼고 나에게 점프했다. 그 처음이 힘들었지 그때부터는 내가 귀찮을 정도로 나에게 점프하더니 이제 수영을 잘하게 되었다.


두려움이 사로잡힐 때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

물에 빠질 수 있다는 공포만큼이나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싶지 않다는 공포가 내게는 컸다. 그래서 주님은 이제 나를 물로 데려가 자유롭게 수영할 수 있게 가르치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교감’의 일이 평탄하지 못할 것을 나는 이미 이렇게 잘 알고 있다. 나는 실제로도 두려움으로 수영을 잘 못하기 때문에 딸의 두려움이 무엇인 줄 잘 알았다.


나는 내 딸보다 더 사람들이 나를 미워할까 봐 주님 품을 믿고 나를 던지는데 더 많은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울고불고 불안에 떨며 화도 내고 도와달라고 없었던 일로 하자고 중도에 포기하고 싶어 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님은 교감선생님으로 세우며 나를 자유롭게 물속에서 놀 수 있도록 물의 공포에서 극복하게 해 주시려는 것처럼 내 그 사랑받고 싶어 하는 불안을 극복하고 세상과 관계의 물속에서 자유롭게 수영하며 놀도록 가르쳐 주실 것이다. 광야에서 주와 함께 함을 깨닫고 불속에서 단련되어 정금같이 되어 나올 것이다.

교감이라는 자리가 딸에게 수영 가르쳤던 과정처럼 꼭 내 문제를 없애줄 시간으로 삼으실 것을 알았기에 나는 완전히 그 자리에 순종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 자리가 나를 41년 동안 사로잡고 있었을 만큼 강력한 불안의 뿌리를 제거하는 일이라 대수술이 될 것이고 나는 많이 두렵고 아프고 힘든 과정을 겪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수술이 있어야만 완전히 건강한 사람이 되어 자유롭게 살아갈 것을 알고 주님께서 집도하는 의사시며 내 곁에서 보살펴주실 아버지임을 알기에 나는 주님을 따를 수 밖에는 없다.

그리고 오랫동안 겪었던 그 고통을 없앨 수 있다는 기대와 반가움과 동시에 그 과정이 순탄치 않을 것이니 두려운 마음도 있다.


하지만 나와 함께 하실 주님을 믿는다. 그래서 기쁘다.

그렇게 나를 사랑하시는 까닭에 목숨까지 내어 주셨으니 주님의 교감 권유가 내게 유익임을 확신한다. 그리고 그 고난은 내게 반드시 축복이 될 것이다.


나는 이렇게 하나님께 뜻을 구하는 방법을 배움과 동시에 내 모든 말에 응답하시는 주님을 만났고 나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마음을 들을 수 있었다.

간구와 기도는 주님과의 관계를 깊게 만드는 것이라는 점에서 꼭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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