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manf Mar 23. 2023

64. 이 세상의 어떤 신이 이와 같을 수 있을까요?

사순절이라 잘 믿고 잘 사는 법의 말씀을 유튜브로 들었다.

[내가 오랫동안 조용하며 잠잠하고 참았으나 내가 해산하는 여인같이 부르짖으리니 숨이 차서 심히 헐떡일 것이라. 내가 산들과 언덕들을 황폐하게 하며 그 모든 초목들을 마르게 하며 강들이 섬이 되게 하며 못 들을 마르게 할 것이며 내가 맹인들을 그들이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이 알지 못하는 지름길로 인도하며 암흑이 그 앞에서 광명이 되게 하며 굽은 데를 곧게 할 것이라 내가 이 일을 행하여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리니. 조각한 우상을 의지하며 부어 만든 우상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는 자는 물리침을 받아 크게 수치를 당하리라. 너희 못 듣는 자 들아 들으라 너희 맹인들아 밝히 보라. 맹인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내가 보내는 내 사자 같이 못 듣는 자겠느냐 누가 내게 충성된 자 같이 맹인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 같이 맹인이겠느냐. 네가 많은 것을 볼지라도 유의하지 아니하며 귀가 열려 있을지라도 듣지 아니하는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의료 말미암아 기쁨으로 교훈을 크게 하며 존귀하게 하려 하셨으나  이사야 42:14-21]


하나님 아버지는 늘 든든하게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보호하시는 분의 이미지가 있고, 이사야서 42장은 특별히 어머니 이미지의 하나님을 생각해 본다.

해산하는 여인은 고통 중에 새로운 생명을 낳는다고 말씀하신다. 그 아이는 바벨론의 포로기를 거친 유대인들이고 이집트에서 고통받았던 민족이 될 수도 있다.

이사야 42:14 하나님은 ‘오랫동안 조용하며 잠잠하고 참았으며’.라고 하신다.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하는 그 고통을 임신한 여인처럼 참고 참으면서 오래 참으면서 해산할 때를 기다렸다고 말한다. 임신한 여인이 참으면서 아이를 뱃속에서 성장시키듯 바벨론 땅에 사는 유대인들을 하나님은 참으면서 성장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여인이 해산할 때처럼 하나님은 바벨론 포로에서 풀려나는 그때를 해산할 때라 말씀하신다. 참 하나님임을 드러내시겠다고 하신다. 그분을 믿고 참으로 따르는 새로운 백성이 탄생할 때 어떤 세력도 이 탄생을 막아서지 못하게 하겠다고 얘기하고 있다. 그 어떤 방해 사건이 있더라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하나님. 반면 따로 태어날 그분의 새로 탄생할 백성들에게 경고의 말씀과 동시에 슬퍼하시는 말씀을 하신다. 하나님은 해산할 이 백성을 맹인이라고 부르신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야’ 하고 말하는 그 백성들이 얼마나 불충성하고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동시에 한탄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기대와 슬픔이 동시에 느껴지는 것 같다.

아이를  품고 모욕을 견디면서 아이를 낳고 이 아이가 탄생하게 하는 데에 어떤 장애물도 놓지 않겠다. 어떤 세력도 물리치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기쁨과 다짐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힘들게 낳을 거지만 자기의 백성이라고 불리는 이 사람들이, 자기에게 충성한다고 하는 이 사람들이 자신들의 앞길을 알지 못하는 맹인처럼 앞길을 분별하지 못하고 불충성하게 하나님을 배반할 건지를 알고 계시는 분의 슬픔이 동시에 있다.

 이집트에서 이끌어 나왔을 때, 모세가 하나님과 있는 동안에 금송아지 우상을 삼던 그들처럼 바벨론 포로에서 구해졌을 때도 그렇게 또 자신을 배신할 사람들을 아시는 하나님의 슬픔.

오래 시간 참으면서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을 겪으시면서도 이 백성을 탄생시켜서 다시 그분과 깊게 사귀는 백성을 만들 기대를 갖고 계시지만 동시에 그들의 배반과 어리석음을 예상하시는 그 고통의 역설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백성을 해산해주시고 이 백성을 인도하겠다고 하신다.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부족함 동시에 본다. 주님의 기대와 슬픔을 동시에 본다. 우리는 하나님께 어떤 모습을 보여 드려야 할까?

우리를 탄생시킬 기쁨과 우리가 배반할 슬픔을 동시에 안고 계시는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잘잘법 사순설 묵상 24일”암흑이 그 앞에서 광명이 되게 하며 이사야 42장 14-21절 김학철 목사님 말씀 중)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죄인이 될 것을 아심에도 지으시고 구원의 계획을 처음부터 준비해 두셨다. 우리의 주님은 우리에게 전적으로 자율의지를 주셔서 주님과의 동등한 관계로 사랑을 주고받고 싶으셨다. 사랑이 일방적이면 보호와 돌봄이 되지만 평등한 관계일 때,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기에 주님은 우리에게 자율의지를 주셔서 우리를 그 분과의 동등한 입장으로 끌어올려 주셨다.

창조주가 조물주에게 주신 그 큰 사랑을 우리가 감히 가늠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에 어떤 신이 동등한 입장에서 사랑하자 하나?

창조주의 기업에 동참시키시는 신이 있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애걸복걸하며 돌이키고 회개하라고 지치지 않으시고 붙드시나?

끊임없이 공급하시고 간섭하시면서 지키시나?

더욱이 주님을 거스르는 이 죄인들을 위해 귀한 아들까지 내어 목숨을 바칠 신이 대체 어디에 있을까!

오직 우리의 하나님 예수님뿐이다.

그런 주님과 반대로 우리 인간은 어떤가?

토기장에게 왜 우리를 이렇게 밖에 만들지 못했냐고? 남들과 비교하며 불공평하다 주님을 반박하는 우리 모습들을 돌아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63. 아무 일 없는 하루가 주님의 축복임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