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좋아하는 사람들만 노골적으로 전화해 불러낸 그 A에게 화가 났다.
꼭 나를 의도적으로만 빼는 것 같고 급기야 “나는 네가 싫어.”라는 메시지로 여겨져 화가 났다.
그동안의 일말의 모든 사건들이 “내가 싫다.”하는 증거로 수집처럼 맞춰져 갔다.
나 또한 급기야 A가 인간적인 예의가 없다. 인연을 끊겠다로 결론을 맺었다.
그러는 중에 B와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쓴 글이 떠올랐다. 죄성을 강화하는 이 짜증, 분노, 험담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이 각성되었다.
그 생각이 죄인인 나의 자각,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집중하게 했다.
이 관계가 주님이 주신 관계라면, 또 마음이 어떻게 바뀔지도 모른다는 열린 결론을 두었다.
그런데 이야기 도중, 전혀 다른 친구 C가 갑자기 떠올랐다.
내가 예전에 B를 챙기느라 나에게 서운해하던 친구 C.
그 순간, 견고히 쌓아뒀던 합리적이었던 내 판단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때, B를 챙기기 여념이 없었다. B가 이제 막 주님을 알게 되니 귀하다는 생각밖에 없어 자주 만났고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일을 집중해서 하는 것이,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다른 사람을 아프게 했었다니.
그 순간, 내 속상한 마음에 적용이 되었다. A가 나를 싫어해서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집중하고 매달린 것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A는 그저 자기가 좋아한 친구 초대 하기에만 신경이 팔려 있었던 것뿐이었다. 나에게 상처 주려는 의도는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나에게 서운함을 느꼈던 그 친구 C가 떠오르니 괜히 신경 써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해졌다. 동시에 좋아한 것을 했을 뿐이었던 친구 A를 나를 상처 주려는 나쁜 사람으로 여기고 욕했던 것이 너무 미안해졌다.
무엇보다, 남을 험담하고 화를 내며 죄성을 강화시키고 있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이 모든 갑작스러운 마음의 변화는 내 마음이 아니었다. 주님이 하신 일이었다.
내가 미워하던 친구를 주님께서 보내주신 인연이라는 증거였다.
그리고 이번 일을 통해,
우리는 의도하지 않을 때도 끊임없이 남에게 상처 주고 상처받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모든 인간은 가해자이며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한다는 큰 가르침을 얻었다.
그러니 내가 맞고 상대가 틀렸다는 공식이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아무 생각 없이 했어도 상대는 상처를 받는다. 또한 나도 상대의 아무 의도 없는 것으로부터 상처를 받는다.
함께 살아가는 모든 인간은 끊임없이 상처를 주고받는다.
그렇다면 산속에 들어가 혼자 살아가야 할까? 그것은 비겁하고 어리석다. 상처를 주는 존재라서 인연을 다 끊고 혼자 사는 방법이 가장 옳은가?
모든 살아있는 것은 상처를 입는다. 바람에도, 비와 눈에도, 강렬한 태양에도, 스쳐 지나가는 풀벌레와 새들에게도. 상처를 입는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다.
그저 내가 받은 상처만 몰두하지 말고, 나는 매일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살아가자. 그렇다면 우리는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상처를 주고받는 존재니 서로를 가엽게 여기고 존중하고 이해하며 사랑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럼에도 살아있는 것은 아름답고 찬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