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보다 나은 말만 해야 한다.
이 세상에 다양한 언어가 많지만 모든 공간과 시간과 관계에서 모든 것을 아우르는 가장 적절한 말을 표현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시시각각 무언가에 판단하고, 한 둘만 모여도 판단으로 무언가와 누군가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이야기 하고 자기가 상대방보다는 조금 더 나은 양 충고를 한다.
판단을 내리고 입 밖으로 무언가를 꺼내는 순간, 그 감옥에 죄 없는 사람을 밀어 넣는 것처럼 내 사고는 판단에 갇히고 만다.
매일 우리는 끊임없이 사고한다. 보고 듣고 느끼고 맛보고 냄새를 맡으며 그 정보들을 관찰로 끝내지 않고 대부분 판단으로 전환한다. 그 판단 중에는 혼자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들이 있고, 언어로 입 밖으로 밀어내 다른 사람에게 꼭 전하는 말로 표현된 판단도 있다. 입 밖으로 나온 말들은 이제 내 사고가 한계를 가지고 차가운 철장 문에 등 떨 밀리는 느낌이 든다. 그 순간, 내 판단은 결과가 변할 수도 있는 열린 가능성과 철저히 분리되는 것만 같다.
판단은 언제든지 죄를 지을 수 있는 잠재적 죄수고 언어는 감옥이다. 무수히 많은 상념들이 지나가지만 어떤 생각들은 잠깐 왔다 잊히기도 하고 어떤 판단은 과거 경험에 의해 긍정적인 판단이 있었다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또 어떤 것들은 과거의 경험으로 된 부정적 판단으로 움켜쥐고 언어라는 감옥으로 밀어 넣어 죄수가 되게 한다.
여기서 판단이 죄수가 되는 판가름은 언어라는 감옥에 넣느냐 넣지 않느냐가 된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언어라는 감옥에 판단이라는 죄수를 집어넣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판단을 죽을 때까지 하는 것이고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언어로 그것들을 정의하고 정리하는 일을 끊임없이 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거기에서 큰 쾌락을 느끼기도 하고 집단에 소속된 느낌을 강하게 받기에 꽤나 유혹적이다는 데 있다.
또한 세상도 끊임없이 나를 판단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며 우리들을 서로 비교하게 될 것이다. 또 판단 후, 언어라는 감옥에 넣어 끊임없이 그것은 이것이다라고 죄수 딱지를 붙인다. 그리고 내 사고 속에 그 판단은 그 언어와 함께 묶여 비슷한 언어만 봐도 그 판단, 그 경험이 소환되곤 한다.
우리는 안팎으로 언어란 감옥 속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언어가 감옥이 된다고 해서 말을 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언어에 묶이지 않을 말을 하면 된다. 언어에 가능성을 열어 다른 사람의 의견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가 하는 말들을 통해 판단이 묶이고 우리의 사고는 그때부터 오류를 범한다. 내가 하는 말이 타당하기 위해 먼저 합리화를 하고 거짓말까지 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 대해 내 기준으로 판단하고 누군가에게 험담을 했다면, 그 판단이 맞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자기 합리화를 하고 또 상대를 동조하게 하려고 거짓말까지 조금 보태게 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원하는 대로 상대가 내 의견에 동조하게 되면 자신의 판단이 강화가 되어 내가 욕한 사람은 분명히 나쁜 사람이다라는 정의를 맺게 된다. 그래서 내가 그 욕한 사람에게 무례하게 굴거나 함부로 해도 된다는 결론을 갖고 행동이 발화가 된다. 말이 입 밖으로 나간 순간, 나의 판단의 오류일 수 있는 가능성을 닫고 자기가 되려 상대를 오히려 자기와 맞서 싸우도록 유도하는 가해자가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그것들이 요즘에 모르는 사람에게 하는 악플이기도 하다.
결국 험담을 하지 않아야 한다. 또, 내 판단을 믿고 상대에게 짜증내거나 화를 표현하는 언어도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 쉽게 언어로 자주 화를 표현한다면 내 판단을 계속 언어라는 감옥 속으로 밀어 넣는 일을 반복하게 되고 그 판단이 언어 속에 갇혀 매일 습관적으로 상대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버린다. 상대도 결국엔 이 억울한 상황을 지속적으로 경험하게 되면 이제 조그만 문제도 방어하고 나와 싸울 태세를 취한다. 결국 내 판단이 상대를 내 부정적인 언어에 가두고 다른 좋은 가능성들을 모두 배제하고 그 사람을 내가 생각하는 그 나쁜 사람이 되도록 내 머리에서 끊임없이 채찍질한다.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 되어야만 내 화나 짜증을 합리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이 내가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이라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가?
진정 내가 사랑하는 남편과 자식을 내 습관적인 화나 짜증의 언어로 내 부정적인 판단을 묶어서 그들에게 되려 “내가 화를 내야 하니, 당신은 게으른 남편, 혹은 눈치 없는 남편, 너는 원래부터 말을 잘 안 듣는 아이, 소리를 질러야만 말 듣는 아이가 되어야만 해.” 하며 오히려 내가 그들을 그렇게 정의 내리고 그들에게 그 정체성을 심어주고 강화를 하는 주체가 나일 수 있다.
남편이, 아이들이 아무리 잘하려고 발버둥을 치려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도 감옥에 있는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상대가 좋은 쪽으로 변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 오히려 상대에게 부정적인 나였다니… 내 본성은 아무리 사랑하는 상대라도 잔소리하고 화내고 짜증 낼 마땅한 이유를 찾느라고 그들에게 내 판단이 옳으니 내가 지시하는 이 말, 이 언어대로 따라와라. 모두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며 거짓말을 하고 있다. 결국 내가 옳다는 증거를 강화하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신이다는 생각이었다.
내 죄성은 정작 사랑하기 때문에 내 판단대로 따라오라 하면서도 사실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매일 습관처럼 강화했던 화와 짜증으로 “너는 내가 판단하기에 이런 사람이야. 변하지 마. 내가 또 짜증 내고 화를 내야 하니까 말이야.” 하는 메시지를 스스로에게, 또 사랑하는 상대에게 계속 주고 살아왔다.
참 미안하고 무섭다. 이토록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내 죄성이다.
어떤 판단을 하게 되었다면 입 밖으로 꺼내거나 부정적으로 표현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자. 그것에게 열린 가능성을 주기 위해. 또, 할 수 있다면 오감으로 들어온 정보를 통해 관찰만 할 뿐, 판단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자.
어떤 짜증도 화도 정당한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상대에게 표현해서는 더더욱 안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내 감정을 판단이 아니라 관찰하고 그것을 상대에게 잘 설명해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어는 그럴 때 필요한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관찰해 상대에게 설명하고 부탁하는 말.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이 생기고 표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화를 내면, 짜증내면, 못마땅하게 생각한다면, 상대는 내가 지적한 문제의 사람이 된다. 그것을 강화시키는 것, 그 자리에서 상대를 꼼짝없이 나올 수 없이 그 사람을 부정적인 언어로 밀어내는 사람은 나다.
내 말이 그 사람의 정체성이 되고 그 사람이 내 말로 가스라이팅 되어 자기 정체성을 만든다. 특히 상대가 나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나는 상대에게 더 큰 힘을 갖고 그의 정체성에 큰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된다.
결국, 이 말은 우리 아이들, 내 남편이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사람이다라는 뜻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가 그에 대한 생각과 말로 자기 정체성을 생각한다니. 너무 가슴이 아프다.
어떤 상황에서든 존중받아야 할 인간에게 짜증, 화를 쉽게 내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거듭거듭 죄를 지으며 내 죄성을 강화시키고 있었기에 주님 앞에서 복음이 희미하고 나를 보고 우리 가족들이 주를 보지 못한 것이었다.
옛이야기, 비난을 멈추지 않는다면 결코 관계는 회복되지 않는다. 반복한다는 것은 자기 화의 합리화를 위해서고 상대를 자기가 생각하는 그 부정적인 언어 틀에 기어이 집어넣는 일이 되니 잘못된 일을 반복해서 말하지 말고 잊어야 한다. 정말로 깔끔하게. 새로운 문제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새로운 문제를 판단하기보다 내 감정에 자꾸 걸리는 것들을 잘 관찰해 내 욕구를 잘 발견하고 그것을 상대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 또한 그 과정에서 나도 상대의 욕구를 알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