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08. 4차원을 넘어서는 해석

by Momanf



인간이 사물과 현상을 보고 이해하는 구조는 시간을 포함해 4차원이 전부다. 이마저도 시간을 빼고 그냥 현상을 보고 판단하는 2차원적인 해석이나 조금 더 그 현상이 왜 일어나는지 이해하려는 3차원 적인 해석, 거기다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키며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하기도 한다.

나는 이 차원을 인간관계에 적용해보고 싶다.

1차원이 선을 의미한다면, 우리가 어떤 현상을 보고 바로 판단 정죄하는 것이 1차원이다.

2차원은 면을 의미한다. 우리는 어떤 현상에 대해 우리 마음대로 판단하거나 넘겨짚어 저 사람은 저렇게 보인다, 이 사람은 이렇게 보인다. 보이는 것으로 앞 뒤 상황을 추측한다.

3차원은 입체다.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저 사람은 저런 사람이다,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 그 사람의 보이는 모습을 너머 저 사람의 정체성이나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현상과 사건으로 1차원에서 2차원 3차원까지 연결 지어 빌드업한다.

1차는 눈으로 본모습에서 바로 해석하고 2차는 앞 뒤 상황까지 추측하거나 예측, 3차는 그 사람의 가치관과 모든 생각까지 판단하는 과정으로 흐른다.

이것으로 끝난다면 자칫 위험해질 수 있는 판단으로 끝이 난다.


하지만 이 현상과 사람을 보고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 왜 이런 행동을 할까? 알기 위해 노력한다면 현상과 사건은 재해석된다.

시간인 4차원이 첨가된다면, 다시 1차원으로 돌아가 다시 판단할 수 있다.

이 사람이 이렇게 행동한 이유는 앞 전에 어떤 사건이 있었고 이 사람 마음에 어떤 부분이 과거와 연결되어 작동하고 반응했는지를 이해하게 되어 편견을 버리고 다시 1차, 2차 , 3차원의 시간을 재배치하고 이해하게 된다.

최소한 어떤 현상을 보고 4차원까지 생각해 봐야 그래도 그 현상과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겠다.

그리고 앞으로의 예측이 가능하고 미래에는 이 현상과 사람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사건에 연루된 그 상대도 자신을 분명히 자각하고 미래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대비할 수 있다.

인간에게는 4차원이 어떤 현상을 이해하고 상대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 같다.


에스겔 10:9
내가 보니 그룹들 곁에 네 바퀴가 있는데 이 그룹 곁에도 한 바퀴가 있고 저 그룹 곁에도 한 바퀴가 있으며 그 바퀴 모양은 황옥 같으며 그 모양은 넷이 한결같은데 마치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것 같으며 그 모양은 넷이 한결같은데 마치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것 같으며 그룹들이 행할 때에는 사방으로 향한 대로 돌이키지 않고 행하되 돌이키지 않고 그 머리 향한 곳으로 행하며 그 온몸과 등과 손과 날개와 바퀴 곧 네 그룹의 바퀴의 둘레에 다 눈이 가득하더라.
내가 들으니 그 바퀴들을 도는 것이라 칭하며 그룹들은 각기 네 면이 있는데 첫 면은 그룹의 얼굴이요 둘째 면은 사람의 얼굴이요 셋째는 사자의 얼굴이요 넷째는 독수리의 얼굴이더라.


에스겔서를 보면 네 바퀴의 환상이 구체적으로 적혀있다. 바퀴 안에 바퀴가 또 있는 형상으로 행할 때 사방으로 향한 대로 돌이키지 않고 머리 향한 곳으로 향하며 온몸과 등과 손과 날개와 바퀴 곧 네 그룹의 바퀴의 둘레에 다 눈이 가득하다. 그 네 면에는 그룹, 사람, 사자, 독수리의 얼굴이 있다.

나는 이 환상이 주님이 바라보는 차원이고 시각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4차원과 비교하면 주님이 바라보시는 눈은 무수히도 많다. 네 짐승의 몸에 모두 눈이 있고 그 곁에 네 바퀴 둘레도 다 눈이 가득하다. 그 도는 바퀴가 시간과 이 세상을 모두 빠짐없이 감찰하시는 주님의 시선으로 여겨진다. 주님은 그 한 사건을 가지고도 사회(그룹의 얼굴) 를 생각하시고 한 사람(사람의 얼굴)을 생각하시고 예수님(사자의 얼굴) 을 생각하시고 전도자, 교회(독수리의 얼굴) 의 입장을 동시에 생각하신다고 해석이 된다.


주님이 한 인간을 보시고 어떤 현상을 이해하시는 데는 이런 가득한 눈의 차원으로 보시고 전체로 보시기에 우리가 어떤 사람을 판단하고 현상을 판단하는 기준이 주님께 절대로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누군가나 현상을 얼마나 쉽게 다 아는 듯이 말하고 그 사람의 한마디 말이나 행동을 가지고 인신공격을 서슴없이 한다. 마녀사냥을 하고 폭력적인 말로 정의하고 감옥에 처넣듯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전체를 무시하고 모욕하고 조롱하고 함부로 대한다.

나이가 들수록 미성숙하게 저차원적으로 판단하고 정의를 내렸던 모든 것이 죄스럽다.

한 사람은 우주고 역사인데 너무 단면을 가지고 전체로 보지 않았는지 반성된다.

하나님처럼 사회적인 차원, 한 인간 존재로서의 차원, 예수님의 관점과 교회의 관점으로, 또 원인과 결과가 뭔지, 과거에 그 사람에게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행동했는가를 이해할 수 없다면 아예 입을 닫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작은 관점과 차원으로는 정말로 이 세상에서 우리가 입을 댈 수 있는 사람과 상황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107. 율법은 의가 아니라 죄의 거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