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모든 점들이 연결되는 순간
나는 좋은 부모나 어른들의 본보기가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자식 6명 중, 우리 아빠를 포함해 4명이 이혼하고 재혼을 했다.
형제들은 날마다 싸웠고 칼부림까지 했으며 자식들은 자기들의 부모에게 매일 소리 지르고 따지고 자기 자식에게 손찌검을 하는 것은 부지기, 자기 아버지, 즉 내겐 할아버지를 때린 자식도 있었다.
나는 매일 바람 잘 날 없는 그런 집구석에서 어린 시절부터 끔찍한 폭력에 노출되었다.
아빠는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새엄마의 머리를 맥주병으로 때려 119가 왔고 새엄마의 머리에는 피가 흘렀다. 나도 아빠에게 어릴 때부터 맞았다. 집에 큰 불도 났었다.
나는 내 가족이 너무너무 싫었고 아빠가 자상하고 친엄마가 있는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나의 가족이 나의 시작점이었다.
20살이 되니 용돈을 벌어 쓰라는 말에 닭갈비집, 학원, 라이브카페, 숯불갈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거기다 특차에 붙었는데 아빠가 못 보내주겠다고 하며 적성에도 맞지 않는 인터넷비즈니스과의 2년제 전문대를 들어가라고 했다. 나는 전문대 들어간 것이 부끄러웠다. 그러다 집을 나왔고 친구들은 캠퍼스를 누리는 동안 나는 일을 해서 먹고사는 것이 급해 휴학을 해야만 했다.
집을 나와 당장 먹고살아야 해서 여기저기 이력서를 넣었는데 마침 영어학원에서 연락이 왔다.
학원 데스크 선생님으로 들어가 학부모/학생 상담, 관리 및 청소, 스케줄 관리, 선생님 관리등의 전반적인 업무를 맡았다. 그곳은 영어학원이었는데 원장님은 내게 영어 공부를 시키셨고 나는 아이들을 돕겠다고 자발적으로 자료들을 만들었다. 첫 만난 캐나다인 선생님과 친구도 되었다.
나는 그렇게 유치원 단계의 영어책으로 아이들을 도우며 나도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학원에서 일하는 동안 전문대도 겨우 졸업했다.
나의 20대는 정말로 다사다난했다.
학력 및 부모 콤플렉스로 절어있었지만 동시에 영어 실력이 늘자 영어를 가르칠 수 있게 되었다. 수업을 하며 영어 실력이 더 늘었고 외국인 선생님 계약서 관련 및 학원 전반적인 관리도 가능하게 되었다. 약 4년 반 후, 윤선생에 들어가 최연소 팀장이 되어 매 달 나와 팀을 1등으로 이끌 만큼 열심히 일했다. 과외도 많이 들어왔다. 학군이 가장 좋은 신설 영어유치원 및 학원에 교수부장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선생님을 가르치고 책도 만들고 학생들도 가르치고 외국인 교사 채용도 담당했다. 거기서 자리 잡자 또 다른 곳으로 스카우트되며 내 몸값은 더 올라갔다.
하지만 전문대 졸업의 학력에 늘 콤플렉스가 있어 29살에 4년제 영문과로 편입하게 되었다.
돈은 벌어야 했기에 공부방을 차렸지만 기존에 과외하던 학생들로만 현상유지하는 수준이었다. 그토록 내가 원했던 영어 영문학을 하며 정말 공부에 매진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20대를 되돌아보니 집 나와 영어 선생을 하면서 영어 실력은 늘었고 돈을 벌며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4세부터 45세까지 다양한 학생들을 가르치고 집집마다 방문했다. 그리고 전문대 학사와 4년제 학사 두 개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또 중간중간, 애견관리사 자격증도 따고 세무 회계 공부도 하고 웹디자인도 배웠다.
이것이 나의 둘째점이었다.
20대 후반, 지금의 남편을 만났고 그는 나의 첫 미국인 남자친구였다.
여행을 좋아하는 그의 안내로 전 세계 여행을 하며 살기 시작했다.
지혜롭고 경험이 많은 그와 사귀기 시작하며 자연스레 결혼을 꿈꾸기 시작했고 행복한 가정이 어릴 때부터 꾸던 꿈이었기에 그것이 나의 최종 목표가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계속 나의 목적이 무엇인지 몰라서 여러가지 탐색을 했다.
11년 영어 선생 경험을 끝으로 연극무대를 배워볼까 하다가 국제회의전문가 꿈을 꾸고 유학길에 올랐다. 거의 1년 반 미국 대학에서 어학공부를 했고 돌아와서 꿈꾸던 국제회의 전문가 일도 시작했다.
그 사이 결혼을 했다. 국제회의도 오래 하지는 못하고 다시 심리학 공부를 더 할까? 국제회의를 석사로 들어가 더 해볼까 하다가 남편의 권유로 MBA를 들어갔다.
결혼 3년 후, 아이를 본격적으로 가질 준비를 했고 인공수정, 시험관 3차례 실패하며 아이를 간절히 원했다
나는 정말로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고 36살, 쌍둥이 엄마가 되었다.
나의 세째점이었다.
부모의 그늘인 줄 모르고 나는 아빠의 폭력적이고 강한 성격으로 많이 싸웠다. 남편과 생각하는 것, 문화, 언어가 너무 달라 많이 싸웠다. 그 와중에 3살 된 아들이 자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부부는 이혼까지 생각하고 부부상담까지 했었는데 아이가 자폐 검사를 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한 달 동안 처음으로 싸우는 대신에 한 팀이 되었다.
나는 나의 꿈만 찾으며 나에게만 집중했었는데 더 이상 이경선이 우선시되면 안 되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쌍둥이 엄마가 먼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다행히 아이는 발달지연이란 진단을 받았고 그때부터 아들을 위해, 함께 키우는 딸을 위해 내 꿈을 위해 매진하기보다는 아이와 가족에게 집중하게 되었다.
그것이 나의 넷째점이었다.
발달지연 교육을 1년 정도 마친 후, 미국으로 건너와 살기 시작했고 코로나가 터졌다.
나는 집안에서 처음으로 다양한 활동과 만들기 등으로 홈스쿨링을 시작했다.
사실 그때 아이들도 좋아했지만 어떻게 놀아주어야 할지 몰랐던 나도 처음으로 즐거웠다. 그리고 뭔가 뿌듯했다.
또 아이들이 나의 선생님이 돼주었다. 아이들을 통해 스스로 많이 깨닫고 반성하고 울기도 하고 많은 책과 강연을 통해 좋은 엄마가 되기를 노력했다.
그리고 미국 온 지 1년 반 만에 하나님을 만났다.
나의 다섯째점이었다.
하나님을 만나고 20년 만에 아빠를 용서하게 되어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에 만나러 갔지만 아빠가 거부했고 미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나는 아빠를 집 나온 20살을 마지막으로 생전 보지 못하고 이별하게 되었다.
아빠에 대한 미움과 그리움, 아쉬움 등으로 장례가 끝나고도 한참 우울증을 겪고 분노했지만 그때, 뜨겁게 하나님을 만나 나의 온전한 아버지로 받아들이고 아빠의 문제로부터 해결되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와 동행한 지, 이제 막 4년이 되었다.
나는 매일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성경 공부를 한다. 교회도 다니고 관련한 일을 하고 있다.
또, 그동안 한글학교 교감선생님으로 2년 반을 일했다
이것이 나의 여섯째점이었다.
나는 이제야 내가 최종적으로 꿈꾸었던 가정과 좋은 엄마의 목표가 나만의 꿈이 아닌 하나님의 꿈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 모든 삶을 이 목적대로 이끄셨고 철저히 경험하게 하셨다.
자라온 과정 중의 아픈 경험으로 다른 사람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고 주님은 내게 이제 나의 가정을 사역지로 내 손에 맡겨 주셨다.
힘든 시간을 15년 지나오며 우리 부부는 많이 성숙해졌다. 다양한 연령대의 아이들을 가르친 경험과 내가 꿈꾸고 바라던 엄마를 아이들에게 되어주려고 노력하며 살고 있다.
무엇보다 지금은 나에게 확실한 모델이 되어주시는 하나님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계신다.
그래서 최근에 부쩍 더 부부관계와 자식관계에서 더 이상 내 방식이 아닌 주님의 방식으로 살기를 원하고 주님의 렌즈로 영적인 해석을 하며 살기를 원하게 되었다.
나의 현재점은 일곱째 점이다.
하지만 이것이 내 종착지가 아니다.
현재진행형으로 나의 시작점부터 지금까지의 연결점으로 나를 회복시키시고 온전히 나의 하나님이 되어주시겠다는 언약을 이루어가시는 중이다.
그리고 내가 나갈 방향이 이제는 보이는 것만 같다.
나는 지금 몇 개의 다양한 글을 통해 책을 출판하고 글을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고 싶어 하는 꿈을 꾼다.
또, 내 고통스러웠던 경험을 통해 가정 상담사가 되어 사람들을 돕고 싶었다. 그래서 작년에 남편과 쌍둥이가 중학교 들어가면 다시 대학으로 가서 준비를 하기로 합의했다.
앞으로 내가 나아갈 방향은 글로 상담으로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나의 여덟째 점이 될 것 같다
일곱째점에서 내 인생 전체를 돌아보니 지금 내가 또 꿈을 꾸고 있는 상담자와 작가가 결코 내 꿈만은 아닌 것 같다. 하나님의 꿈이라는 확신이 든다. 내 가정에서 내가 온전히 회복되고 내 가정이 회복되면 주님은 나를 꿈꾸는 방향으로 몰고 가시리.
내 꿈인 줄 알았더니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꿈이었다.
다음 지점으로 갈 때까지 난 내 가정에 또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경험하며 준비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