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고난
죄가 들어온 인간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연합된 존재에서 분리되는 영적 사망상태에 이르고 이것은 '우리가 주인'이라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우리의 본모습에 수치감, 죄책감, 두려움/불안(자신의 존재를 적나라하게 볼 때 느끼는 혹은 절대자나 나보다 우위에 있다고 여기는 사람한테 느끼는) 이 있다.
우리가 주인이라서 이런 나약한 존재가 나라는 것이 인정하기 싫고 불편하다. 또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들키면 무시당하기 쉽다고 생각하기에, 동시에 자신도 남을 자신 아래에 두는 경향이 있기에,
그래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좋은 배경이나 능력, 돈, 인기, 명예등으로 감추려 하고 '자기가 꽤 괜찮은 사람', '주인 되기 합당하고 남들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라는 생각 속에서 살고 싶어 한다. 이것이 우리의 욕망이다.
우리는 스스로 자기 존재의 본모습을 알 수가 없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상태이다.
세상에 수많은 심리 검사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완벽히 아는 사람은 없다.
또 안다고 할지라도 자기를 둘러싼, 무화과나뭇잎, 즉 썩어빠질 것들, 그 당시, 세상의 문화와 풍조와 분위기에서 가치의 기준을 두고 자기를 판단하는 정도로 자신을 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을 판단하는 것으로 '자기 자신'이라 여기고 평생 살아간다.
진정한 인간의 상태,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이라는 '거울'이 필요하다.
스스로 알 수 없었던 자아를 주님이 보게 하신다.
그런데 이 과정이 아프다. 수술을 하듯, 나를 둘러싼 모든 막을 걷어내야 그 속에 숨어있던 진정한, 날것의 내가 있다.
상처받기 쉽고, 그래서 수치감을 느끼고 죄책감을 , 두려움/불안감을 느끼는 '나'를 만나게 된다.
혼자로서 불완전한, 그래서 주님과 연합해야만 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과정은 우리 인간의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해 가는 시간이다.
이때, 우리는 많이 힘들고 아프다. 이것을 '고난'이라고 한다.
하지만 내 참 모습에 주님이 계신다. 나와 연합하고 싶어하시는 주님이 , 내 진짜 모습 옆에서 기다리고 계신다. 거기서 주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다
고난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 고난은 위에 말했듯, 진정한 '나'를 비춰보고 겉으로 꾸며진 모습을 모두 거둬낸 나의 진짜 모습, '민낯'을 만나는 과정이다. 이것은 내부의 고난이다.
내부에서 오는 고난은 꽤 괜찮은 사람으로 스스로를 여기고 살고 싶은데 자기 자신이 부서지고 미약한 존재이며 이기적이고 남을 짓밟는 사람이라는 것, 스스로 혼자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해야 하기에 마주하기 힘들다.
두 번째 고난은 죄로 인해 부서진 인간들의 상태에서 비롯되어 상대에게 가해지는 것이다. 개개인은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기에 이기적일 수밖에 없고 다른 사람을 짓밟고 올라가므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게 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은근히 방관하거나 뒤에서 조용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 빼앗고 거짓말을 하거나 혹은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돈이나 명예, 인기를 탐하며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개개인에서 자기의 가족을 지키고 가족에게 그 좋은 것들을 대물림해주겠다는 욕심, 개인과 가족 주변까지 확장된 기득권을 지키려 행하는 부정부패등으로 한 인간이 욕심을 내면 낼수록 거기에는 희생되는 사람들도 정비례로 많아진다. 이것은 외부의 고난이다.
내가 무엇인가 욕심내고 공정하지 못한 방법을 사용한다면, 똑같이 한 사람이 나로 인해 희생당하는 것이고 그에게 '외부의 고난'을 주는 셈이다.
외부에서 오는 고난은 자기도 갖고 싶었던 것을 가질 수 없게된 좌절,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지키던 것들, 자기가 사랑하던 것들을 잃게 되고 마지막에는 목숨까지 잃는 고통을 받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난'이 끔찍이도 싫다. 그래서 피해 가려고 대비하고 하루속히,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다. 나에게만큼은 다른 사람이 당하는 고통과 분리하고 그런 일은 당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모든 것이 순탄하길 기도한다. 고난을 당하고 싶지 않아 다들 열심히 살기도 한다.
외부의 고난은 우리 통제밖의 일이다. 그래서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이다. 나는 타인과 상황과 사건을 절대로 통제할 수 없다.
내부의 고난은 아프지만 '진정한 나'를 알고 내가 하나님과 연합된 존재로 다시 회복되는 것이기에 사실은 유익하다.
이 적나라한 사실이 '고난'의 실체라면, 우리의 마음가짐과 자세로 '고난'에 대처할 수 있다.
먼저, 내부의 고난은 아프고 힘들지만 궁극적으로 나에게는 유익한 일이다. '진정한 나'를 알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 연합해 구원을 얻고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얻어 '영생'으로 이르는 과정이다.
자기 것인 줄 알고, 자기인 줄 알았던 , 그래서 집착했던 모든 것이 썩어빠질 것들이고 내 존재를 감추고 있던 무화과나뭇잎이었음을 알고 버리고 버려나가면 오히려 삶은 더 심플해진다.
그 날것의 내가 비록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존재고 불완전 하지만 내가 얼마나 귀한 존재로 지어졌는지를 깨닫게된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창조주가 지었는지, 나를 얼마나 사랑하기에 나를 위해 죽기까지 하셨는지를 알게 되어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내 자존감이 온전히 회복된다. 무화과나뭇잎을 벗으면 하나님이 나의 온전한 가죽옷이 되셔서 감싸주신다
그래서 이 고난은 우리에게 축복이라 말한다.
외부의 고난은 우리 통제 밖의 일이기에, 잘잘못을 따져서도, 곱씹어서도 안된다. 그럴수록 자기 연민이란 늪에 빠져 잠식된다.
그냥 누구도 당할 수 있는 일에 당한 것뿐이기에 나만 특별히 재수가 없었던 일도 아니고 나와 다른 사람의 상태와 처지를 비교할 필요도 없다. 내 선택이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내가 잘해서, 내가 못해서와 상관 없는 일이다.
부모와 내가 자라난 가정과 사회, 국가, 그 시대, 내가 당한 사고와 내 현재의 생활에서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 다 내 통제 밖의 일이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 자신이다. 내 생각이고 내 마음이다.
무시할 수 있는 일은 무시하고 누군가 나에게 지속적으로 상처 주고 내가 원인이라고 하는 말로 괴롭히면나에게 끌어와 내면화하지 않고 과감히 버려야 한다. 관계에서 일방적인 것은 없다.
내 잘못은 돌아보되, 내가 모든 문제의 원인이라고 말하며, 내가 인간적으로 최선을 다해 무례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데도 상대가 나를 함부로 대한다면 그 사람의 말은 무시하는 것이 맞다.
그것은 내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의 문제고 그 사람이 빠진 자기 연민이고 자기당착, 독선이다.
외부의 고난에서는 우선 자기의 통제밖의 상황과 자기가 통제 할 수 있는 상황을 구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
‘이것을 어떻게 긍정적으로 바꿔볼까? 어떻게 다른 식으로 해석해 볼까? 어떻게 경험과 교훈으로 삼을까?’
이런 사람은 '외상 후 스트레스'에서 머물며 과거로부터 지속적으로 괴롭힘을 당하지 않는다.
오히려 '외상 후 성장'으로 삼아 상처받은 치료자로 거듭나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을 위로하고 도움을 주며 살아간다.
로마서 8:28절 말씀에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처럼, 창세기의 요셉의 이야기처럼, 주님은 외부의 고난을 통해 힘겨워하고 아파하는 사람들 옆에서 누구보다 더 아파하시며 지켜보고 계신다. 그들의 잘못이 아님을 누구보다 더 잘 아신다. 그리고 그 고난을 고난으로 내버려 두지 않고 역전해 승리하게 직접적으로 개입해 도우시고 적극적으로 그 사람에게 다른 사람의 관심과 사랑, 도움을 통해 보내주신다.
외부의 고난을 통해 주님이 모든 것을 합력해 좋은 것으로 바꾸시고 그것을 결국 그 사람에게 축복이 될 수 있게 적극적으로 도와주신다.
'고난의 본질'을 모든 사람이 잘 이해하고 '고난'의 종류와 대처를 통해, 궁극적으로 '예수님'만이 '해결책'이 되심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란다.
내면의 고난과 외부의 고난. 그 모든 곳에 '예수님'이 계신다.
예수님 안에서라면 우리의 고난은 더 이상 고난, 고통, 외상, 그리고 스트레스, 트라우마로 끝맺어지는 우울한 이야기가 아니다.
'축복' 역전의 주인공' '상처받은 치료자'로 이야기는 반전된다.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영화 '매트릭스'의 장면 중, 진실을 아는 약과 거짓말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약이 있다.
당신은 어떤 약을 선택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