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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주님은 사랑하기에 '진노'하신다

by Momanf



세상 사람들은 '사랑'의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벌'에 대해서는 부정하는 경향이 많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가 좋아하는 것, 우리가 선택하는 모든 것을 지지하시고 기뻐하신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모든 것을 허용하고 용서하신다고 한다.

주님을 엄마로 바꿔서 예를 들어보자.

엄마가 나를 사랑하기에 내가 좋아하는 사탕을 많이 먹고 패스트푸드를 먹고 좋아하는 게임을 하는 것을 지지하고 이해하며 잘한다고 말해야 하나?

귀한 자식일수록 매한대 더 때리라는 옛말처럼 '사랑'하기에 모든 것을 무절제하게 허용한다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죄에 대한 '진노'가 잘 나와있는 부분은 창세기 3장이다.

죄가 인간에게 들어오자 주님은 여자는 고통스럽게 출산하고 남자를 사모하고 남자는 여자를 다스리는 벌을 주셨다. 남자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고살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생명나무를 더 이상 먹고살 수 없는 벌을 받았다.

주님의 명령을 어기고 '죄'에 '진노'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신다.

하지만 주님은 '벌'을 내리시기 전에, 예수님을 주신다고, 해결책부터 제시하신다. 뱀이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뱀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셨다.

뿐만 아니라 최초의 '에덴동산에서의 첫 살인'으로 동물 가죽으로 아담과 하와의 수치를 가려주시고 그들을 떠나서 혼자 내버려 두시지 않고 늘 함께 하신다. 주님은 공의로우시기에 진노하시지만 인간을 끝까지 사랑하신다.


선악과를 먹고 불순종해 죄가 들어온 이래 지금까지,

주님은 성경에서 수많은 인물을 통해 끊임없이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계신다.

어찌 보면 하루란, 그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죄대신 죽으셨다는 복음을 전달받고 회개하고 그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으라는 '기회'다.

믿지 않는 자에게 주시겠다는 주님의 벌과 마지막 심판은 겁을 주려기 보다는 믿지 않는 죄에서 돌이켜 하루속히 예수님을 믿고 구원의 자리로 나오라는 그분의 부르심이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심판은 그분의 성품에서 흘러나오는 완벽한 공의와 거룩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분의 자비와 은혜를 거부할 때, 하나님이 개입하신다. 심판이 내려지는 것은 죄의 파괴적인 피해를 끝내기 위함이다.

최후의 심판이란 무서운 현실은 예수님과 그분의 지고한 희생을 더 높여준다. 우리가 받아야 할 그 끔찍한 진노의 잔을 예수님이 대신 마시고 해결하셨다.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일은 그 최후의 심판을 받으라는 협박이 아니라 '사랑하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자기 아들로 그 끔찍한 진노를 받게 하시고 그분의 이름을 믿는 사람을 '구원'해주시겠다 약속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려면 죄를 회개하고 구원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우리의 한계를 이해하신 주님이 우리 스스로가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 예수님을 주셨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죽으셨고 이것을 복음으로 여기고 믿기만 하면 누구라도 구원받을 수 있게 우리의 죄문제에 해결책으로 주신 주님의 깊은 사랑이다.

한 명이라도 더 빨리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시고 있다.

주님의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진다 아니 다를 놓고 논할 시간에, 심판에 대해 주님이 사랑이 있다 없다를 놓고 비난할 시간에 우리의 기회는 하루하루 멀어져 간다.

그리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때에 주님이 재림하신다.

구약에서 오랫동안 선지자들을 통해 예수님이 오신다는 것을 끊임없이 밝혀왔고 그가 진짜 오셨듯이

재림도 우리가 차일피일 미루고 주님을 듣고도 거부하며 지낼 때, 갑자기 올 수 있다.

마지막 심판 때가 지나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 기회가 없다.

마지막 심판이 일어나면 정말로 믿지 않는 자가 구원을 얻지 못하기에 이렇게 복음을 들을 하루가 주어진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주님을 믿는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하루에 한 사람에게라도 복음을 전하고 완강히 거부하고 믿지 않으려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임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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