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라는 의미는 매일 어제와 다른 공간으로, 다른 시간으로, 다른 상황과 사람으로, 내 변화된 기분과 감정으로, 다른 생각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어제의 내가 같은 것 같지만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르고 내일의 내가 다르다.
이 사실을 명확히 인지한다면, 이 추상적인 시간이란 개념을 물리적으로 옮길 수만 있다면 우리는 좀 더 자유롭게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내가 아니라면 오늘은 물리적으로는 같은 것만 같은 장소와 시간이라도 어제의 나와 전혀 다른 기분과 생각으로 함께 하는 상황과 사람들이 달라져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어제보다 더 이전의 그 수많은 날들을 거슬러 올라가 소위 '과거'라는 시간으로 가보자. 그렇다면 더 시각적으로 분명한 차이가 있다.
옛날의 나, 그러니까 내 가정을 만들기 이전의 내 부모로부터 온 내 환경과 내 기억과 추억, 내가 처했던 환경이나 공간과 시간에서 나는 한참을 멀리 왔다.
그때 내가 배웠던 옳고 그름은 부모나 나와 함께 그 당시 지냈던 사람들과 상황, 사회에서 형성된 것들이다. 내가 그 속에서 상처받았다면 나를 지키기 위해 방어기제도 많았을 것이고 콤플렉스나 잘못되고 왜곡된 나만의 해석이 있었을 것이다. 아픔과 상처를 통해 고집이 생겨났을 것이고 그것들이 그때에는 물론 나를 지켜내는 무기였기에 강화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나는 이제 그곳에 없다.
그곳에서 살고 있던 어린 내가 아니다. 환경에 지배받던 어린 꼬마가 더 이상 아니다. 분명히 어두운 트라우마가 심했던 곳, 그 속에서 나를 지켜야만 했던 , 먹혀들던 방어기제였던 공격성이나 억울함, 내 권리를 주장하고 싸워야만 했던 모든 것들이 다른 곳에 사는 지금까지 필요한 것은 아닐 수 있다.
그때는 지독히 어려운 곳을 여행하며 내게 필요했던 것들이기에 지나치게 후회할 필요도 없고 왜 그랬을까 곱씹을 필요도 없다. 오히려 그때 나를 지켜주어서 고맙다고 말하고 완전히 이별하면 된다.
환경이 변하고 사람이 변하고 이제 더 이상 고통스러운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새 공간, 새 계절에 살고 있다면 이제 자기를 지켜왔던 방어기제들을 과감히 버려야만 한다.
그것이 필요 없는 장소에서 여전히 내가 장착하고 있다면 그것들이 새로운 환경에서 오히려 나에게 방해가 된다. 아니, 장착하고 살고 있는지 자신도 모르고 사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살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사건을 자신의 과거의 렌즈로 인식하는 한,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은 혼란에 빠지고 자신을 포함해 모두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
예를 들어, 예전에 내가 힘이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나를 무시해서 공격적으로 싸우는 것이 나를 지켰다면, 이제 사랑받는 상황에서 그 공격성은 더 이상 쓸모가 없다. 사랑받는 상황이 확실한 곳과 사람이라는 것을 내가 잘 인식하고 있다면, 분명히 장소는 바뀌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오히려 예전에 써왔던 그런 방어 기제는 상대를 왜곡하게 만들고 오히려 나를 사랑하는 상대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이런 점에서 결혼을 한 후에는 두 사람이 완전히 새 공간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서로 자기가 자라온 환경이 크겠지만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배우자와 새로운 환경으로 재 해석할 수 있는 합의된 렌즈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또한 케이스바이케이스이기에 누구와 비교할 필요가 없다. 비교할 수가 없다.
우리 각자는 물리적으로 같은 곳에 있는 것 같고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것 같아도 분명히 다른 곳에 있다. 그곳에 머무는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이 다르고 그곳을 지나는 사람의 자세와 대하는 자세가 다르고 어떤 렌즈로 보느냐에 따라 또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계절과 여행하는 공간이 다르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것은 분명히 다르다.
어제와 오늘도 오늘과 내일도 다른 계절과 다른 공간이다.
가능하다면, 지금 자신에게 반복되는 문제들을 정리해 보자.
나를 지켜준다고 생각했던 그것들이 지금 현재에 내게 필요한 것인가? 내가 버려야 할 것인가? 지킬 것인가?
내게 그 강화된 생각이 왜 이토록 나는 필요하다 여기는가?
이것이 분명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을 아는데도 왜 내가 고집부려야 하는 것인가?
내 결핍은 무엇인가?
…..
수많은 문제들은 자신을 지켜왔던 경험이거나 자신의 결핍으로 인해 고집스럽게 자신이 채우고야 말고 싶은 욕심일 경우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 더 이상 있지 않은 내가, 결핍의 대상이 이 현재의 대상에게는 요구할 수 없는 터무니없었던 욕심임을 깨닫는다면,
악바리같이 굴면서 모두와 싸워서 요구해서 내 것들을 지켜낸 경험이 많았기에, 이제 내게 무엇이든 아낌없이 주려는 공간에서 하나하나 싸우려고 든다면, 나를 사랑하는 상대는 얼마나 상처를 받을까 깨닫는다면,
바뀐 환경임을 인식하고 감사하며 돌아보지 않겠는가? 내가 준 상처가 무엇인지 조금은 분명히 바라보고 용서를 구하고 화합하며 살아갈 수 있지 않겠는가?
이제 변화된 공간을 충분히 누리고 기뻐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 과거의 고생이 고생으로 끝나지 않고 분명히 어떤 결실이 되어 선물로 주어졌음을 깨닫게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감격하고 누군가가 항상 나를 도와왔고 사랑했었던 것을 깨닫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