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협은 양측이 각자의 입장차이를 양보해 중간 지점을 찾는 것이다. 양쪽 모두 조금씩 포기하면서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는 것을 목표로 한다.
반면 배타는 의견이 다른 사람이나 집단을 배제하고 거부하는 태도다. 자신의 이익이나 가치관을 고집하면서 타인을, 다른 의견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특히 하나님을 믿고 세상과 더불어 가야 하는 우리 크리스천에게 이 문제는 아주 중요한 문제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복음, 즉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자세를 취해야 하고 나머지 비본질 부분에서는 타협이 답이라고 생각한다.
복음이란, 예수님이 누구신지, 왜 오셔서 무엇을 하셨는지에 관한 진리다.
이것은 창세기 3장 우리의 원죄에 대한 문제와 인간의 영적상태가 어떤지를 정확히 인지하고 이해하는데서 우리 스스로가 구원하지 못하는 존재임을 인식하는 데부터 시작한다. 주님은 공의를 위해 인류 전체가 죄인이기에 심판으로 영벌을 해야 했지만 인류를 사랑하시고 자율의지를 통해 짓게 된 죄를 누구보다 이해하시기에 예수님이 필요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죄인인 인류를 살리시기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내려놓고 종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우리 대신 이 땅에 죽기 위해 오셨다. 예수님은 이 땅에 우리를 위해 죽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고 우리 대신 죽으셨기에 우리가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죄에서 구원을 받고 에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리고 심판과 영벌에서 구원받고 영생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이 복음은 그 누구와도 타협할 수 없다.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이고 예수님이 우리 죄 때문에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셔서 우리 가운데서 성령으로 임하셔서 영생의 길로 인도하신다. 우리를 죄와 세상과 구별되어 거룩하게 살게 하심은 팩트고 진리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일하신 우리를 구원하신 살아있는 하나님이고 다른 종교를 하나님과 같은 선상에서, 종교중 하나로 취급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이것은 타협할 수 없는 일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분노하신 순간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다는 사람들이 본질을 훼손시킬 때이다. 성전에서 분노하신 사건은 사람들이 성전, 곧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공간에서 예배하지 않고 장사를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타협할 수 있는 것은 복음의 반석 위에서 성경의 다른 해석과 예수님을 믿고 전하는 다양한 형식이다.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고 그 복음을 정확히 알지만 주님의 말씀대로 제대로 살지 못하고 넘어지는 사람들, 자신의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성을 바꾸는 사람들, 타인에게 상처를 주며 심한 잘못을 했지만 돌아와 울고 회개하며 진정으로 용서를 구하는 사람들과는 타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또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배타해서는 안된다. 비록 하나님을 믿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지만 이들과 더불어 타협하며 살아야 한다. 세상사람들과 타협한다는 말이 그들과 잘 지내기 위해 복음을 버린다는 것이 아니다. 함께 지내지만 복음 때문에 내가 선택하고 지키는 부분에 대해서는 명백히 밝힐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편안한 일이다. 누구든지 타협가능한 듣기 좋은 이야기다. 하지만 예수님의 복음과 죄문제에 대해서는 홍해 갈라지듯 배타적인 성격이 드러난다.
진리에 대해서는 반드시 배타성이 드러난다.
우리는 이 복음의 지점과 절대로 타협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사탄과 타협하는 일이다.
사탄은 예수님을 흐리고 하나님을 추상적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냥 듣기 좋은 말만 듣고 사람들끼리 복음으로 배타적이기 보다 복음을 빼고 타협하며 대충 즐겁게 살라고 유혹한다.
왜냐하면 복음만이 영적으로 죽은 우리를 살리고 우리를 진정으로 구원하고 참 진리를 보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진정으로 사망에서 영생으로 옮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