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m 아들의 학교 문제로 배운 많은 것들

화에 관해, 받아들임에 관해, 이타심, 진정으로 안다는 것

by Momanf


평온한 삶에 가끔 균열이 생기면 그렇게도 다짐했건만 감정적으로 휩싸이게 되고 눈물이 나고 상대의 말에 방어 또는 화를 내며 최선을 다해 상대의 잘못을 지적하고 깎아내렸다. 정말 고약한 사람들이라 치부하며 어떨 때는 실력이 전혀 없는 하찮은 인간으로 만들어 버렸고 그것이 내 정당한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것이라 여겼다.


제임스가 한 달 동안 미국 프리스쿨 3세 반에, 적응을 하면서 처음에는 potty 가 완벽하게 이뤄 저야 한다는 규칙 때문에 갑작스럽게 기저귀를 떼는 훈련을 했고 아이는 울면서 힘들어했고 나는 피곤하고 힘들었다. 디렉터는 아이가 배변훈련이 안되면 2세 반에 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했고 그것에 마음이 아팠지만 생각과 고민 끝에 받아들였다.


하지만 아들은 근 2주 만에 완벽하게 성공했고, 나는 성취감을 느끼며 우리 아들을 대견스럽게 생각했었다. 성취감을 느끼자마자 학교에서 아이가 선생님의 말을 잘 따라오지 않는다고 하거나 다른 아이들을 꼬집고 방해하고 물을 쏟는 등의 행동을 한다고 했다. 우리 부부는 발달 지연의 과거를 얘기하고 그들은 제임스를 다시 한번 미국에서 테스트받을 안내서를 우리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제, 어제 제임스는 학교에서 It wasn’t my best day라는 종이를 매일 거쳐 2번 받았다.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첫날에 아이가 다른 아이를 꼬집어서 문제였다고, 다른 아이들이 제임스와 놀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말하라는 말에 상처를 받았고 아이에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내 아이가 너무 가여웠고 갑자기 꼬집는 문제가 생겨 나도 남편도 당황하며 야단치고 심지어 아이를 꼬집어 얼마나 아픈지를 느끼게 하며 가르쳤다. 롤플레이도 하고 상황을 자꾸 인지시키고 나쁜 행동이라 거듭 얘기했다. 나는 막막하고 힘들었다. 우리 아이가 미움받는다 생각이 들어서일까 마음이 너무 아파 울었다.

그리고 어제, 다른 반 아이를 또 꼬집었다고 아이를 울렸다고 화가 나 보이는 다른 반 담임선생님이 자기가 교육 석사 받은 내용을 강조하듯 자기의 석사 표시와 함께 집에서 나쁜 행동을 어떻게 가르치는지 잘 모르겠네요. 지도 부탁드린다고 온 글에서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처음에는 너무 분노해 나는 학사 2개고 MBA 석사를 했고 남편은 경제 정치 학사, 법 박사, 교육 석사까지 한 우리는 나름 배운 사람이라고 혼자 노트에 긁적이다 유치한 생각이 들어 우리는 교육을 충분히 받은 사람들이라고 정정하다 그마저도 그 말에 들이받는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집에서 뭘 가르치는지 모르겠다는 식의 선생의 말, 다른 아이들이 놀기 싫어한다고 전하라는 선생의 말에 선생님들이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을 하냐면서 아이의 입장에서 하나도 생각 못해주는 파렴치한 인간들로 여겨졌다. 물론 17명을 2명의 선생님이 이끌어야 하니 힘든 점을 알지만 그것을 강조하며 규칙을 잘 따라야만 하는 걸 강조하는 변명처럼 느껴져 화가 났다.

나는 엄마라서 내 아이의 입장을 더 생각하는 것도 사실일지 모른다. 아빠가 미국인이라도 엄마와의 상호관계가 거의 대부분이고 엄마 껌딱지인 우리 아들은 영어가 낯설고, 한국말도 늦게 시작해 이제 겨우 한국말로 소통하는 재미에 빠졌는데 갑작스러운 영어권에 던져졌고 어린이집에서 보호양육을 받다가 갑자기 프리스쿨에서 교육을 받게 되었으니 아이에겐 이 상황이 다 버겁다. 아이가 다정한 성격이라 말이 통하지 않으니 친밀하게 다가간다는 게, 혹은 놀자고 하는 표현으로 때리고 꼬집는 새로운 행위를 한다는 게 나는 보인다. 하지만 남들에게는 아니다. 이해한다. 나도 예전엔 다른 아이들이 소리 지르고 때리고 하면 그 속의 의미를 알기보다는 집에서 뭘 배우나 했으니까. 선생님들 반응도 이해한다.


하지만 또 마음 한편엔 선생님이니 갑작스러운 환경과 언어문화 차이에 놓인 아이가 보이는 제스처를 엄마처럼 이해해줄 수 있었으면 했던 내 기대가 컸던 것 같다. 그 기대를 저버리니 나는 실망했고 분노했다. 이러한 분노로 나는 어젯밤 잠이 들면서 이 학교를 그만둘 때, 최악의 학교로 기억하겠다고 교회학교이면 하느님을 말씀을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냐며, 특수한 환경에 처해진 아이를 이해하기보단 말 잘 듣고 규칙 잘 따르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어린아이를 부모 교육 못 받은 아이 혹은 아이들이 놀기 싫어하는 아이로 규정지으며 이 학교에서 밀어내고 있는 그들의 민낯을 얘기해주겠다. 이 학교가 우리 아이에게 맞지 않는다. 너희 학교는 말 잘 듣는 일개미 같은 아이들을 키우고 싶을 뿐이니까. 하면서 크게 한방 소리 지르고 나올 것이라 다짐했다. 인터넷에도 올리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문득, 내가 퍼붓는 저주로 그 상대가 나처럼 이렇게 며칠을 울고 잠 못 자고 마음 아파하고 힘들어하면서 나에게 분노하고 내 아들과 내 가족, 나에게 저주의 말을 퍼붓거나 욕을 해대면 나에게 뭔가 안 좋은 기운으로 다가와 불행해질 거란 생각이 순간 스쳐 지나갔다. 그러면서 그 선생님들이 나와 우리 가족을 아프게 했던 말이 이미 고의였거나 아니었거나 죄를 저질렀구나. 역으로 타인에게 나도 말로나 글로 상처를 이만큼 줬구나 되새겨보았다. 그렇다면 나의 잘못된 말과 글도 어쩌면 타인에게 이만큼의 분노와 아픔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분노는 아무리 화려한 말로 수식하고 치장해도 다른 사람의 영혼에게 상처를 주는구나. 특히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영혼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구나란 생각에 미치며 내가 분노의 말을 퍼붓거나 그런 생각을 했을 때, 상대도 나와 같은 과정을 겪을 거라 생각하니 복수의 말을 그만두어야겠다는 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는 고의든 아니든 우리를 아프게 했다. 그것으로 죄를 지어 내가 최악의 기분을 겪고 증오하는 파장으로 그 글과 말에 대항하며 직접적으로 얘기하지 않았어도 부정적인 파장으로 보냈다. 그것이 그들의 인생에 미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우주는 하나이니 타인에게 왜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되는지, 왜 행동으로나 시선으로 또는 편견을 갖고 외면하거나 싫어하면 안 되는지를, 왜 친절하고 사랑으로 대해야 하는지 크게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선생님들은 우리의 모든 사정을 잘 알지 못한다. 거꾸로 말하면 나도 그 누군가의 사정을 잘 모르면서 판단하고 화를 내고 상대를 아프게 했던 일이 많았다.

학교로 받은 분노는 차츰 내 분노, 내 편견을 깨닫게 했으며 반성하게 했다. 그리고 내가 나와 타인을 자꾸 구별하며 옳다 틀렸다, 좋다 싫다로 구분하는 일이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깨달았다. 타인이 나와 제임스, 우리 가족 사정을 일일이 모르듯 나 또한 타인을 일일이 알지 못하면서 판단하고 충고하고 비난했었다.


반성은 선생님들을 이해하게 되었고 앞으로 타인에게 왜 친절해야만 하는지, 왜 편견을 갖지 말아야 하는지를 크게 깨닫게 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에게도 좀 더 관대한 시선으로 대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부모가 한 배를 탄 동지라는 생각도 강하게 들었다.

아무리 분노하고 화가 난대도 상대를 다치게 하지는 말아야지 강한 약속도 나 자신에게 했다. 내가 후련해질 수 있다고 내가 똑똑하다고 퍼붓는 말들이 눈앞에서는 상대를 후려갈기고 때려눕히는 것 같아도 부정적인 파장으로 흘러 상대의 영혼을 송두리째 아프게 하고 나에 대한 화와 저주는 내가 부메랑처럼 다른 사건으로 맞을 거란 생각에 미쳤다. 분노를 조심해야겠다.


그리고 아침에 류시화 시인님 글을 통해 그것들과 연결해 많은 것을 배웠다.

바마티 주석서 관련한 이야기에 서서 남편 바차스파티가 처음부터 자신은 고서 번역하는 일과 수행자의 길을 위해 결혼할 수 없음을 밝혔지만 바마티는 결혼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림자처럼 바라지 않고 무한한 사랑으로 12년간 그를 돌보고도 남편이 번역을 마쳐서 이제는 수행자가 되기 위해 집을 떠난다 했다, 그는 “내가 떠나면 당신을 무엇을 할 것이오? 혼자서 어떻게 살아가겠소?” 물었을 때, 그녀의 말이 인상 깊었다. “나를 당신에게로 데려오고 당신을 보살필 기회를 준 운명의 힘이 나를 보살펴 주겠지요. 당신의 진실하고 헌신적인 추구가 나에게도 영감을 주겠지요.”

그녀의 말은 현재 내가 처한 상황에서 옳고 좋고 맞고 아니고를 판단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 집중하고 감정을 넣어 상황을 판단해 감정으로 이끌지 말라는 의미로 여겨졌다. 시간이 지나야 이것이 나빴는지 좋았는지 알게 될 것에 대해 하나씩 주어진 상황을 최선을 다해 받아들이고 최고의 선택을 하자. 때론 불편한 감정으로부터 내 감정이 크게 요동쳤고 그것으로 나는 이렇게 글을 쓰고 싶은 충동으로 내 마음을 풀어내고 있으니 나쁜 것만은 아니지 않으냐 싶었다. 오히려 프렌쉽 스쿨이, 나를 분노하게 했던 선생님께 고맙다는 마음을 가져야 되지 않을까 여기기에 이르렀다. 그들과 이 상황을 통해 나는 내면을 확인하고 나 자신과 대화하고 내 최고의 관심 주제인 화에 대해 느끼며 과정을 지켜보고 그것에서 진정으로 숨겨진 메시지가 뭔지를 내 기대나 내 반응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아이에게도 더욱 무한한 사랑이 끓어올랐다. 알게 모르게 어린이집에서 지쳤을 아이가 안쓰럽고 애처로워서 더 작은 일에 크게 칭찬하고 계속해 멋있는 사람이라고 칭찬해 주었다. 이 계기가 아니었으면 내 행동을 반성하거나 아이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바마티의 사랑을 배우고 싶었다. 그저 주어진 것을 운명이라 여기고 기대하는 마음조차 생각지 말고 최선을 다해 사랑하라는 점이다.

[어떤 것을 바라볼 때 다만 바라보라. 어떤 것을 들을 때 다만 들으라. 어떤 것을 감각할 때는 다만 감각하고, 인식할 때는 다만 인식하라. 그것들에 ‘나의 마음’을 개입 시키지 않을 때 그대는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괴로움의 끝이고, 자유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볼 때는 거기 오직 봄만이 있어야 한다. 들을 때때는 거기 오직 들음만이 있어야 한다. 감각할 때는 오직 감각만이 있어야 하고 인식할 때는 오직 인식함만이 있어야 한다. 류시화]



[삶은 그렇게 한다. 우리가 진정 원하는 일을 주저하며 하지 않고 있을 때, 삶이 우리르 절벽으로 떠다민다.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 삶을 충분히 살지 않고 있을 때 갑자기 사고를 겪고 직장을 잃고 배우자가 떠나고 암 진단을 받는다. 그것은 더 이상 미루지 말라는 신호이다. 남몰래 간직해 온 꿈과 계획을 언제까지나 매장시키지 말고 파종으로 바꾸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여행을 회피할 때, 여행이 우리를 떠나게 한다는 말은 진리이다. 류시화]

나는 오랫동안 화라는 내게 가장 강렬한 문제를 인식해왔었다. 분노를 하면 감정에 휩싸여 상대를 아프게 하고 온몸으로 화를 표현하며 내 몸까지 아픈 상황을 여러 번 겪었다. 매일 그런 폭풍우 같은 화가 지나고 나면 문제를 인식하고 변화해야겠다 다짐하면서도 막상 시작을 못하고 미뤄두다 똑같은 상황을 맞이하곤 했다. 아이들에게도 함께 있어주긴 하지만 적극적으로 개입해 놀아주지 못하는 것 같아 몇 번이나 계획을 세웠지만 매일매일 조금씩 할 일이 있다는 핑계로 미루기도 했었다. 영어를 하지만 한없이 부족한 생각에 영어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한 노력을 해야겠다 생각하면서도 그 또한 생각만으로 끝나며 아이 상황을 학교와 이야기할 때, 세련된 언어를 구사할 수 없음에 한탄했다. 어쩌면 이 상황은 이렇게 내가 미뤄둔 문제라고 여겨지던, 혹은 진정으로 변화하고 내가 해야만 한다고 여겨지던 생각을 더 이상 회피할 수 없음을 절벽에서 나를 밀어 일깨워준 것이 아닐까? 나는 지금부터 안전만을 생각하고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미뤄놓았던 모든 것을 한번 찬찬히 생각해보고 절벽으로 떨어져 울기전에 하나씩 적극적인 자세로 해내야겠다.



또 다른 이야기는 두 사람이 기도를 했는데 신이 한 사람 기도만 모두 들어주는 것이었다. 배를 표유 하고 있던 두 사람의 기도 중 한 사람의 먹을 것, 여인, 무인도에서 떠날 배였는데 그 기도가 전부 행해진 것이었다. 기도가 전부 이뤄진 사람이 사랑하는 여인과 배를 타고 여전히 기도를 하고 있는 다른 사람을 놓고 떠나버리려고 했다. 신의 기도에 응답받지 못하는 그 사람이 무능하거나 죄가 많은 사람일 거라 여기며. 그때 신이 나타나 너의 기도에 내가 응답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기도하는 그 사람의 응답을 들어준 것이라 했다. 그 사람은 자기를 놓고 떠나려는 이를 위해 그동안 저 친구가 기도하는 것을 들어달라고 기도했던 것이었다. 먹을 것, 여인, 무인도에서 떠날 배. 자신만이 살려고 하는 기도를 했던 그 떠나려던 사람의 응답을 들어준 게 아니었다.

어쩌면 내가 지금 이렇게 행복하게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이 내가 무엇인가를 잘해서 혹은 내 기도에 응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은 내 백이라던 그 신념만이 아니라...

나를 위해 기도하고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이들의 마음 덕분이 아니었던가를 생각해보았다. 그러면서 앞으로 나의 기도도 나를 위해서만이 아닌 다른 이를 사랑하고 염려하고 평온함을 바라는 기도가 되어야겠다고 깨달았다. 내 자식과 남편, 가족 친구를 비롯해 내가 분노했던 선생님들께 멀리서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겠다.


세 번째 주제는 화였는데 물론 내게 크게 다가왔다. 화가 날 때 사람은 자신의 진정한 언어가 나온다는 것이고 아무리 마음을 닦고 배워도 상대에게 똑같이 화를 내고 엉켜서 싸우는 꼴은 두 사람이 전혀 신분이나 학식, 혹은 그 사람의 됨됨이의 우열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치장하고 변장해도 본능적일 때 내 말이, 내 행동이 어떠한지를 되짚어 보게 했고 그것을 위해 내면을 잘 닦고 버릴 것은 버리고 진정으로 참된 본능적인 나의 발전을 위한 노력을 해야겠다.

[세상은 언제나 싸우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해독하기 어려운 언어로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로, 꽃과 돌멩이의 온기는 다르다고 서로 소리치지만 누가 꽃이고 누가 돌멩이인지 신조차 둘의 차이를 분간할 수 없다. 자신은 꽃이고 상대방은 돌멩이라는 신념 하에 서로에게 돌멩이를 던지는 사람들, 이것이 싸움의 역설이다. 그들이 우리의 삶조차 딱딱한 돌멩이로 만들게 하지 말아야 한다. 당신은 지금 누구와 싸우는가? 류시화]


[그리고 단지 입술을 통해서만 문장의 의미를 배운 것으로 앵무새처럼 의미 없이 떠드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문장은 얼마든지 살아서 실행에 옮겨질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류시화] 내가 책으로 영상으로 혹은 타인에게 배우고 있는 이 모든 배움들이 그저 문장만 읽고 단 하나라도 그 문장을 살려서 실행에 옮긴 것들이 있었는지를 생각해본다. 뭔가를 가슴 두근거리면서 깨달았다고 여기며 읽던 많은 책들이나 영상을 통해 삶의 비밀을 획득한 듯, 지혜를 파악한 듯 감동을 받은 기억들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잠깐 한순간에 머물고 떠나버렸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정보를 얻는 일에 급급해져 그 가슴 뛰었던 문장들을 잃어버리고 살다 또 마주하면 감동을 받고 또 스쳐 지나가듯 살았다. 진정으로 알면서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말이 크게 있었는지에 되새겨본다.

한 문장이라도 내가 실행에 옮기면서 살고 그 문장을 살려서 내 삶 속에 소중한 친구로 여기면서 살아가겠다. 앞으로 안다고 허풍을 떨거나 잘난 체하지 못할 것 같다. 정보의 홍수시대에 모든 사람들이 많은 정보를 듣는다. 그런데 실상 그 많은 정보의 한 문장, 한 단어라도 실행에 옮기고 사는 제대로 배운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진정으로 안다는 것은 하나라도 제대로 배우고 그것을 내 온몸으로 느낄 수 있게 실천해야 하며 그 실천이 습관이 되어 나와 고스란히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때서야 내가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나를 보고 배우고 영감을 얻는 것이 아닐까? 굳이 이야기를 하면서 모두 아는 척 떠들어 대는 것에 바쁜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깨닫게 된다.

늘 나는 내가 얼마나 멋있는가를 떠들지만 나보다 더 멋있게 살지만 내 말을 들어주고 있는 이들을 떠올려 반성한다. 앞으로 인간의 본능으로 말하고 싶은 욕구가 일렁이면 이렇게 일방적으로 글을 쓰고 내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SNS 이용을 하고 사람을 만나면 Listener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한 문장이라도 배우고 나를 감동시키면 그 문장을 살리고 실행할 때까지 나는 아는 게 아니다. 꼭 명심해야겠다.


이렇게 우리 아들 제임스를 통해 한 달 동안 끓였던 마음은 언제나 그렇듯 많은 깨달음과 지혜, 삶을 가르쳐 주어 이 또한 감사하다. 이 글이 끝날 때쯤 나는 아이들을 데리러 가기 전 꽃 3송이를 살 참이다. 그리고 한 달 동안 우리 아이를 위해 마음 끓이며 스트레스받은 선생님들에게 제임스를 떠올리며 스트레스를 떠올리지 말고 이렇게 예쁜 꽃이라고 연결시켜달라고,
내 아들은 꽃처럼 아름답다고 감사하다고 말할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