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 3:1-6
이스라엘 자손이 그 본성에 거하였더니 칠월에 이르러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인지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그 형제 제사장들과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그 형제들이 다 일어나 이스라엘 하나님의 단을 만들고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번제를 그 위에 드리려 할쌔 무리가 열국 백성을 두려워하여 단을 그 터에 세우고 그 위에 조석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며
기록된 규례대로 초막절을 지켜 번제를 매일 정수대로 날마다 드리고
그 후에는 항상 드리는 번제와 초하루와 여호와의 모든 거룩한 절기의 번제와 사람이 여호와께 즐거이 드리는 예물을 드리되 칠월 초하루부터 비로소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으나 그때에 여호와의 전 지대는 오히려 놓지 못한지라(But the foundation of the temple of the LORD was not yet laid.)
70년 포로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돌아오자마자 성전을 쌓기 전, 제단을 쌓아 예배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본다. 세상일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언뜻 생각하면 성전을 쌓고 나서 제단을 쌓고 예배를 정식으로 드려야 될 것 같은데 복잡하고 번제, 소제, 전제, 화목제등 지낼 것도 많은 이 예배부터 드리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무슨 이유였을까? 성전을 후딱 먼저 짓고 장소가 확보된 곳에서 제사를 지내면 되지 않았을까?
에스라 4:1-6:12
스룹바벨과 함께 온 1차 귀환자들이 돌아와 성전 기초를 완성시키는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겨왔다며 함께 성전을 짓자고 거짓말을 하며 다가온다. 하지만 거절하자 금방 본색을 드러내고 건축을 방해하기 시작한다.
이 방해는 느헤미야서에 이르는 돌아온 3차 포로 귀환의 성전벽 재건에까지 방해를 한다.
온갖 억측과 거짓말이 난무하는 상소들이 고레스왕, 다리오왕, 아닥사스다 왕까지 미친다.
이 방해가 16년 동안 이루어진다.
귀환 후 2년은 폐허 된 땅으로 돌아와 무너진 집과 성벽 수리, 농사짓고 가족들과 정착할 곳을 마련하는 등 생활 기반을 세우는 데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때, 가장 1순위로 삼은 것이 제단을 세우고 절기를 지키며 예복을 회복하며 성전의 기초를 놓았다. 그 후, 16년간 방해를 받고 마침내 다리오 왕이 조사 후, 고레스의 칙령이 진짜임을 확인하고 건축 재개를 허락한다. 재개 후 약 4년이 거친 포로 귀환 후 약 22년 만에 성전 건축이 완성된다.
바벨론을 떠날 때, 왕의 허락도 하기 위해 감동을 주시고 폐허 된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사람들의 마음도 감동을 주셨던 주님이, 생활 기반을 세우고 예배에 쓸 물건까지 준비시켜 주셨던 하나님이 왜 이런 방해를 받도록 내버려 두셨을까? 왜 이 시간에 즉각적으로 도움을 주시지 않으셨을까?
이 역사적인 사건을 생각하다가 성전을 '우리 마음'으로 바꿔보았다.
그러니 간단하게도 이런 결론이 나왔다.
우리 마음 건축/완성=성전건축
우리 마음의 기도/예배=제단 쌓기
더 확장하면 성전건축을 성화로 보고, 완성된 상태로 본다면, 우리는 바벨론에, 포로에서 끌려 나온 것이 사탄에게서 구원받아 다시 폐허 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상태다.
내 마음은 구원을 받아 주님과의 연합으로 방향은 돌아왔지만 피폐해져 있다.
하지만 주님이 준비시켜 주신 필요들(사람, 말씀, 교회등) 통해, 예배와 기도를 통해 성전건축, 즉 성화를 목표로 삼고 성전 기초, 내 마음의 초석을 세운다. 교회에 가고 말씀을 공부하고 주님을 알아가는 전심을 다하며 성전 건축, 성화에 열심을 다한다.
하지만 방해가 있다. 영적인 방해다. 모든 필요를 주시는 주님이 방해를 주신 것은 우리에게 그것이 유익하다는 증거다. 그 방해가 우리에게 필요한 까닭이다.
왜? 이 방해의 시간에 우리가 배우고 깨닫기를 바라는 것이 분명히 있다. 그래서 이 방해를 허락하셨다. 방해도 일전의 고레스의 감동이나 사람들의 감동, 은과 금/ 성전 물건/가축등의 재물들과 같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필요했고 우리의 영적인 성전 건축에 필요했다.
여기까지 위의 모든 질문에 답을 하면 두 가지 결론에 이른다.
1. 성전건축 전, 성화되기 전 기도와 예배를 우선순위에 두게 하셨다.
2. 방해가 우리에게 유익이다.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주님이 허락하셨다. (믿기 어렵겠지만)
자, 그럼 두 번째 답부터 이야기해 보겠다. 방해가 왜 우리에게 유익이고 필요일까?
성화의 과정에 준비를 완전히 시켜주시는 주님이 방해를 허락하시며 우리를 좌절하게 하시고 오래 기다리게 하신 이유가 뭘까? 왜 성화를 먼저 완성하게 두시지 않으시고 성화가 되기 전에 예배와 제사를 가장 우선순위로 시키셨을까?
성전건축을 준비시키셨던 분이 누구인가? 우리인가 주님이었나?
전적으로 주님이었다. 그 말은 성전건축을 완성시키시는 분도 주님이시라는 말이 된다.
우리를 죄에서 전적으로 구원해 주신 분도 주님이시다. 그래서 이제 내 마음을 성전으로 짓기 위한 준비가 되었다. 하지만 내 마음의 성전, 성화를 완성시키시는 분도 주님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사이에서 우리는 크게 착각하고 헷갈려한다.
그래서 방해라는 우리에게 '필요'한 요소를 주신 것이다.
우리 힘으로 안되게 하시고 정말로 이 일은 완성될지, 얼마큼 기다려야 될지,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겪게 하시는지 하나님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상황을 주신다.
도대체 왜?
준비도 마침도 모두 주님이 하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다.
철저하게 우리의 능력과 힘이 아닌 주님의 목적과 계획, 그리고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시고 준비와 결과까지도 완성시키시는 분이 전적으로 주님이심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우리는 늘 우리의 힘이라 착각하거나 우리에게 영광을 돌린다. 과정이 잘되면 시작과 준비를 완성시켜 주신 주님을 금방 잊고 만다. 또 언제나 순조로운 일은 예배와 기도를 잊고 자기가 잘 완성되었기에 사역을 잘 한다고 착각한다. 또 당장 방해가 오면 그것의 겉표면을 자기 힘으로 다듬어서 다른 사람에게만 인정을 받고 금방 평탄하게 넘어가려고 한다.
다윗이 언제 넘어졌나? 아무런 방해가 없을 때 넘어졌다.
자기가 전쟁터에 가지 않아도 될 만큼 강력한 왕권을 자랑할 때, 어슬렁 거리며 왕궁을 돌다 밧세바의 발가벗은 몸을 보고 죄에 넘어져 충신을 야비하게 죽이고 아내를 빼앗지 않았나?
오히려 그가 사울에게 쫓기며 골리앗의 고향에 들어가 침을 흘리며 미친 사람 흉내를 내기까지 철저하게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의 그는 오히려 주님과 가장 가까웠다.
시편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다윗은 가장 절망적인 곳에서는 오히려 주님과 언제나 함께였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윗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때의 다윗은 사울이 자기에게 너무 쉽게 들어와 두 번씩이나 자기 손으로 사울을 죽일 수 있었지만 손을 대지 않고 하나님이 해결하신다며 오직 주님께 순종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그랬던 그가 평탄하고 여유 있고 시간이 남을 때,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있을 때 죄악에 무릎을 꿇었다.
영적으로 위험한 상태는 평탄할 때, 일들이 잘 될 때이다. 이때가 가장 위험한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방해'를 우리에게 '필요'로 주셨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할 일은 너무 간단히 알 수 있다.
준비시키시는 분도, 목적대로 이끄시는 분도, 목적을 완성시키시는 분도 모두 주님이시기에 나는 내 힘을 내려놓고 성실히 기도와 예배의 자리로 나가는 것이다.
제사의 종류처럼 회개하고 감사하고 찬양하고 간구하는 자리로 나가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그렇다면, 첫 번째 질문으로 돌아가 왜 성전건축 전, 성화되기 전 기도와 예배를 우선순위에 두게 하셨을까? 왜 중요했고 어떤 의미가 있는가?
왜 옛날의 제사들은 흠 없는 어린양을 키우다가 죽이고 아침저녁으로 제물에 바치기 위해 많은 동물을 죽이고 절기마다 죽이고 언제나 죽일까? 왜 그 힘들고 수고수로운 일을 맡기시고 계명으로 지키게 하셨을까? 기계도 없이 사람의 손으로 무엇이든 만들고 제사 지낼 동물들을 하나하나 죽이고 각을 뜨고 태우는 그 일이, 그것도 날마다 해야 하는 그 일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시간과 정성과 수고와 마음과 인내가 따르고 제물들이 따라야 했을까? 왜 하나님은 제사를 가장 중요시하시고 우리에게 그것을 따르기를 바라셨는가?
창세기 3장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세기 12: 7,13 너희는 어린양을 잡고 그 피를 집 좌우 문설주와 안방에 바르라. 내가 애굽땅을 칠 때, 그 피를 볼 때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레위기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히브리서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9: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새 질서가 올 때까지 맡겨둔 것이니라.
시작은 에덴동산에서 수치를 느낀 아담과 이브의 알몸을 가리기 위해 첫 살생이 일어나 피가 흘렀다.
피는 곧 생명이다. 피를 흘린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고 죄의 결과는 죽음. 피는 생명을 대신하기에 생명으로 생명을 대신해야 한다.
하지만 구약의 제사는 참된 제사, 뒤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일 뿐이었다.
짐승의 피는 인간의 죄를 완전히 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짐승은 인간과 같지 않았기에 제사를 아침, 저녁마다, 매년마다 반복해야 했다.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라
레위기 22:20 무릇 흠 있는 것을 너희는 드리지 말 것은 그것이 열납 되지 못할 것임이니라
인간이 죄를 짓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이 죄인이 되었다.
죄인이 죄인을 대신할 수 없다. 죄 있는 자는 불합격 제물이다.
인간의 죄문제는 인간 스스로 해결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빌립보서 2:6-8
그는 근본 본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자 완전한 인간이시다,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은 거룩하고 죄 없고 완전한 의를 가지셨다. 이는 죄인을 대신해 죽을 자격이 있다.
또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은 실제로 인간의 고통과 유혹, 죽음을 경험하시고 우리와 같은 육체로 오셨기에 "사람을 대신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셨다.
즉, 예수님만이 "죄 없는 완전한 인간" 이자 "의로운 하나님 자신" 양쪽의 조건을 동시에 만족시킨 유일하신 분이시다.
그렇다면 왜 다른 존재(천사, 선인)는 안되나?
인간: 같은 인류이지만 모두 죄인
천사: 죄는 없지만 인간이 아님
짐승: 제물로 쓰였지만 영혼이 없다.
디모데전서 2: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사야 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요한복음 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고린도전서 5:7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그분께 전가되었고 , 예수님의 의로움이 우리에게 전가되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인정받게 되었다.
우리는 죄를 드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의를 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완전히 구속될 수 있다.
히브리서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우리는 예수님 한 분으로 이제 그 많은 예수님의 그림자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된다.
제사가 의미하는 것은 결국 대속(Substitution)이다.
피는 피로 갚아야 하고 그것을 예수님이 단번에 치르셨다는 것을 매일 예배하고 기도하는 것이 결국 우리가 매일 해야 하는 일이다.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은혜도 준비도 하나님이 시켜주시고 성화도 주님이 완성하신다.
나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왜 오셨고 왜 예수님이어야만 했는지를 예배하며 내 죄를 회개하고 감사하고 찬양하고 간구하며 주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 하면 된다.
예수님을 알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면 하나님이 준비시켜 주셨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영생도 확보되었다. 해피엔딩으로 결말도 이미 주님이 확정해 주셨다.
그렇다면 '세상의 방해'를 통해 내게 '필요'한 것은 내가 성전을 짓기 위해 열심을 다해서 일하는 것이 아닌, 이 '방해'를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 진정으로 깨닫고 이해하는 것, 내 삶의 모든 전반을 내 능력과 지혜가 아닌 온전히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께 맡기고 완전한 순종하는 것이 나의 목표다.
그 속에서 주님 일하시는 손길을 보고 경험하며 아무리 큰 방해 속에서도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주님의 영광을 온전히 발견하게 된다.
목표를 위해서는 먼저 주님을 통해 내가 누군지, 내 목적을 깨닫고 계속해서 나를 믿지 않고 나를 부인하고 죽이는 일을 해야 한다. 시간이 더디게만 보이고 많은 방해를 통해 억울하고 싸우고 싶고 내 힘으로 대적해 싸우고 싶어도 주님의 뜻에 맡기고 인내해야 한다. 매일 넘어지고 내 부족을 발견하는 일이 내게 오히려 유익이다. 나는 스스로 할 수 없지만 주님은 해내심을 믿고 그날을 소망하고 다시 일어나 기뻐한다.
평안함을 바라지 않고 평탄하고 순조로운 인생을 통해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그것에 만족하는 것을 경계하고 그 안락한 삶만을 원하고 기도하며 살지 않아야 한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일지라도 주님 함께 하는 것에 감사할 수 있으며, 평탄할 때 늘 죄에 넘어지지 않도록 주님께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방해가 내게 유익임은 내가 온전히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온전히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