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커홀릭 그리고 번아웃
성장, 배움, 도전을 추구하는 24년 차 서비스 기획자입니다. 고등, 초등 아들을 둔 워킹맘이고 2022년부터 갭이어를 보내고 있어요.
판교 테크노밸리에 있는 플랫폼 회사를 오래 다니다 보니, 서판교에 어느덧 9년째 거주하고 있어요. 이동통신회사에서 기획자 커리어를 시작하여 통신 네트워크의 발전과 함께 새로운 서비스를 기획하여 2천만 사용자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일들을 해왔습니다. 생각해 보면 참,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훌륭한 경영 시스템 아래에서 훌륭한 사람들과 함께 재미난 일을 마구마구 벌일 수 있었으니깐요. 덕분에, 커뮤니티, 콘텐츠, 미디어, 앱 마켓 플랫폼, O2O 커머스 플랫폼, 신규사업기획에 대한 경험을 쌓았습니다.
30대에는 그저 일이 좋았습니다. 하는 일 '모바일 서비스 기획'이 너무 재미있어서, 그 일을 좀 더 잘하기 위해 언론대학원(야간)을 다니며 업무와 공부를 병행하며 '모바일 영화 서비스의 이용행태 연구'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고, 회사의 스폰서십으로 KAIST에서 1년간 정보미 디어 MBA 과정을 공부하였습니다.
30대에는 그저 일과 육아에 매몰되었던 것 같아요. 낮에는 매니저로서 밤에는 엄마로서 나 자신은 온데간데 없는 시기였습니다. 40대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깊은 고민도 하지 않았고, 마음의 준비도 하지 않았어요. 30대의 체력과 넘치는 열정은 40대 이후에도 우상향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깐요.
그렇게 준비없이 맞은 40대에는 긴 고민과 방황의 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30대 처럼 우상향 할 줄만 알았었는데, 인생이 그렇게 녹록지 않더라구요. 인생은 객관식 문항의 연속이고 주어진 선택지에 어떤 답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다른 길이 펼쳐지죠. 2023년 40대의 마지막 해를 보내고 있으니, 대략 10년간 기나긴 길을 지나왔네요. 30대의 나는 무엇이든 마음만 먹은 대로 잘 되었다면, 40대의 나는 일을 통한 성장의 즐거움과 함께 한계도 체감했습니다. 아이들이 커가는 과정을 온전히 함께하지 못하는 데 대한 미안한 마음도 컸었구요. 어느 순간 일, 육아 모두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저글링하며 우왕좌왕하는 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많이 힘들었어요. 그렇게 준비 없이 맞은 40대를 받아 들 일 수 없었던 저는 우울증, 불안장애 진단을 받았었고, 2번의 육아휴직을 통해 아이들을 돌보며 자신에게 질문을 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자신만의 단단한 내면을 만들어 가는데 집중했던 것 같아요.
2019년 봄, 2번째 육아휴직을 끝으로 SK와의 20년의 인연은 정리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앞으로 10년은 스타트업 씬에서 좀 더 자기 주도적인 성장을 하고 싶었고, 스타트업 대표들을 옆에서 도우면서 저도 언젠가는 제 일을 만들고 사업을 해보면 좋겠다는 막연한 꿈을 갖게 되었어요. 해서 시리즈 A 단계의 로보틱스 스타트업에 조인하여 3년간 프로덕트 리더로서 마켓 인텔리전스, 프로덕트 전략 수립, 프로덕트 기획, 개발, 사업화까지 담당하는 압축된 성장 경험을 했고, 그 과정에서 번아웃이 왔지요.
2022년 3월 큰 아이가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고 둘째 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들어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싶어, 퇴사를 하고 갭이어를 보내고 있습니다. 24년간 조직에 속한 채로 개미처럼 일만 하다가, 끝이 없는 쉼이 계속되니 불안함도 있었습니다. '이러다 아무것도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되어, 갭이어 기간에도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혔었죠. 동네 산책로를 하염없이 걷고 달리며 내 마음 깊은 곳의 나에게 질문을 많이 한 것 같아요.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 걸까?
나는 무엇을 좋아하지?
나는 무엇을 잘하지?
나는 무엇을 할 때가 제일 행복했지?
나는 어떤 상황에서 제일 힘들었지?
앞으로 내가 생각하는 일의 의미와 방향성은 무엇일까?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은 뭘까?
물론 질문은 끝이 없이 계속되고 그때그때 처한 상황에 따라 변덕쟁이 날씨 마냥 생각도 바뀌고 있어요.
바뀌는 것은 당연해요. 가지고 있는 정보, 주어진 옵션, 나를 둘러싼 환경이 바뀌니깐 저의 마음가짐도 좀 더 유연하게 바뀌게 되더라고요.
2022년 가을부터 프리랜서 컨설턴트로서 조금씩 활동을 시작했어요. 'Startup Product의 방향성 수립을 위한 리서치 & 컨설팅 프로젝트'를 3개월간 진행하였고, 2023년 8월부터는 성남 이룸학교에서 디지털 IT 분야의 길잡이 교사로서 '로보티스트'를 꿈꾸는 청소년을 위한 보람찬 일을 하고 있지요.
약 2년간의 갭이어를 보내면서, 처음에는 24년간 했던 일의 범주 내에 갇혀 있었어요. 그동안 내가 해왔던 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살려서 재취업하는 길에만 매몰되어 '나의 노동의 가치 = 돈'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어요. 그런데, 매주 토요일 오후 5시간 동안 '길잡이 교사'로서 봉사를 하면서, '돈' 보다 '보람'이라는 가치가 얼마나 큰 기쁨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10명의 아이들 하나하나의 눈망울이 눈에 밟히고, 아이들 눈높이에서 생각하고 아이들이 원하면 저는 기꺼이 제 시간을 투입하여 아이들에게 더 도움이 되는 길을 안내하고 싶으니깐요.
심청이 아버지 마냥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 이후, 회사원으로서 IT 기획자의 삶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로 확장해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2023년 9월 21일 새벽.... 문득 꿈을 꾸다가 불현듯 3개월째 공실 상태인 5평 규모의 아파트 상가가 떠올랐습니다. 정말, 드라마틱한 아침이었어요. 커피를 좋아하고, 동네 카페 탐방하는 게 큰 기쁨인 저는 언젠가는 카페 사장이 되고 싶었어요. 근데, 그게 꼭 나중일 필요가 있을까? 지금, 작게라도 해 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어떻게 하면 될까?
그렇게, 한 때 워커홀릭 기획자의 무인카페 창업 Story가 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