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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Apr 26. 2021

#07 장래희망은 정만섭 아저씨

KBS 클래식FM ‘명연주 명음반’

올초 새 다이어리에 나는 다음과 같은 목표를 적었다.


post-정만섭 아저씨 되기


서른여덟 살이 쓰기에는 완성도가 떨어지는 문장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우린 이제 다 알게 되었지만, 다른 사람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문장을 적으며 나는 스스로를 대견해했으며, 무척 설레었다. 이제껏 되고 싶었던 존재라고는 고고학자 밖에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목표가 일상에 새로운 리듬을 부여하는 듯 했다.


정만섭 (아저)씨는 KBS 클래식FM에서 매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방송되는 ‘명연주 명음반’ 진행자이다. ‘명연주 명음반’은 고전음악 전곡 감상 프로그램으로, 모든 선곡은 아저씨가 한다. 특히 집중 감상곡 코너에서 좋은 신보나 전설적인 레코딩을 소개하고 전곡 감상하는 것이 이 방송 특징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정만섭 아저씨는 국내에서 배철수 아저씨 다음 가는 장수 DJ로, 내년 가을이면 이 프로그램 진행 20주년을 맞는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저씨의 저 유명한 선곡표와 이제는 중단된 다시듣기 서비스를 기웃거렸다. 내가 사랑하게 될 많은 앨범을 여기서 소개 받았을 것이다. 머레이 페라이어의 바흐 파르티타, 이자벨 파우스트, 어쩌면 밀슈타인과 모리니의 바흐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도 그 중 하나일지 모른다.


다시듣기 서비스 중단이 아쉬운 이유는 당연히 환상적인 음원의 무한한 보고를 잃었기 때문이다. 희미한 기억이지만, 아저씨는 일본 등 세계 각지에서 구한 본인 소유의 희귀 LP를 전파로 내보내기 위해 개인적으로(그러니까 집에서) 심혈을 기울인 녹음 작업을 한다셨다. 이 장면을 마음에 떠올리며 나는 음악을 향한 아저씨의 사랑에 감탄했고, 그가 수많은 음악을 듣고 알고 소유한다는 사실에 부러웠다.


물론 음원 저작권 등에 관한 문제가 있을테니 다시듣기 중단은 받아들여야만 하겠지만, 이 여파로 아저씨만의 음원 소개를 잃었다는 상실감은 도무지 어째야 할지 모르겠다. 아저씨는 음악 ‘제공’을 프로그램 최우선 목표로 생각하는 듯 하다. 2시간 방송이지만 대곡의 경우 1시간을 넘기기도 하는데, 한곡이라도 더 소개하려면 1분이 귀하다. 음원 제공 다음으로는 청자의 감상을 중시하는 것 같다. 이렇게 우선순위를 음악과 청자에게 내준 후에야 곡 설명 차례가 온다. 내가 기다리는 건 바로 이 대목이다.


아저씨의 음악 소개는 사실과 감상이 곡마다 다른 비율로 결합되는데, 바로 이 소개에 힘입어 시큰둥하던 레코딩에 다시 귀 기울이고(내가 훌륭함을 아직 못 알아봤을 수 있으니까), 곧 처음 듣게 될 음악에 마음 설레게 되기 때문이다. 실제 들은 후 좋아하게 되는지 아닌지, 아저씨 의견에 동의하게 되는지 아닌지는 덜 중요한 문제다. 편식 심한 나에게 아저씨는 무엇이든 듣게 할 수 있는 신통한 능력을 발휘한다. 나는 아저씨의 선곡을 신뢰한다.


올해만 해도 나는 아저씨 덕분에 찰스 매커라스의 모차르트 전집을 발견하는 쾌거를 이뤘다. 방송된 곡을 다 듣고 만족스러워 하고 있었는데, (대략) 이런 멘트를 하셨더랬다.

“찰스 매커라스가 더 많은 모차르트를 녹음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쉽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라도 남아있는 게 어딥니까, 다행입니다.”


올해의 발견 첫 손에 꼽는 글렌 굴드와 줄리어드 4중주단의 슈만 피아노 4중주에 대한 코멘트도 잊히지 않는다.

“이 녹음 과정에 어려움이 많았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글렌 굴드는 번스타인 지휘에 전혀 따르지 않고 본인의 페이스로 연주하는데요, 줄리어드 현악 4중주단이 어떤 단체입니까. 지지 않고 연주합니다. 놀랍게도 이 대결 속에서 명작이 탄생했습니다.”


과정과 결과물의 아이러니에 대한 간결한 표현. 시간과 숙고, 그걸 가능케 한 음악에 대한 깊은 사랑이 농축된 아저씨의 촌철살인이야말로 이 프로그램의 묘미이자 특장점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이 즐거움이 소급 불가해진 것이다. 2시부터 4시. 월급생활자인 내게는 허락되지 않는 시간이다. 나는 시간과 돈을 교환해야 하는 사람이니까. 협업과 의사소통이 많은 업무 특성 상, 이어폰을 꽂고 사무실에 앉아 있지 말라는 건 일종의 불문율이다. 이제 지나간 음반/음악 소개는 그렇게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그럼 위에서 인용한 즐거움은 언제 얻은 것인가. 여기서 코로나의 역설이 끼어든다. 그래도 운이 좋은 회사원인 나는 엄중한 겨울 동안 거의 재택근무를 할 수 있었고 그 덕에 7시 눈뜰 때부터 5시 국악방송이 시작할 때까지 온 집안에 클래식FM이 번졌던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안될 것 같긴 한데(죄스럽다..) 이것만은 행복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장래희망으로 돌아가서, 어떤 인터뷰에서 아저씨는 말했다. 죽도록 듣는다고. 게을러서 정적인 활동인 ‘듣기’를 한다고 했지만, 게을러서는 할 수 없는 부지런한 듣기였으리라 짐작한다. 그래서 정말 게으른 나는 이미 틀렸지만, 무엇보다 아저씨의 정확한 소개평을 오래오래 듣고 싶지만, 그래도 즐거운 꿈을 꾼다. 내 장래희망은 정만섭 아저씨 뒤를 잇는 명연주 명음반 DJ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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