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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May 02. 2021

#09 최고의 음악적 스릴과 쾌감

바흐 -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D단조 (밀슈타인 & 모리니)

떨린다. 내 최애 바흐이자 최애 기악곡을 최애 음반으로 소개하려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바흐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D단조, 나단 밀슈타인과 에리카 모리니의 1964년 녹음이다.


이 곡을 처음 접한 건 16살이나 17살 때였다. 지역 방송국에서 있었던 바이올린 선생님 공연의 마지막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음반을 갖게 된 건 10년이 더 지난 후이다. 추적해보니, 명연주 명음반 2012년 12월 31일 자 선곡표에 무려 10개의 까만 별을 달고 "must have"로 소개되어 있다. 3일 후, 나는 CD를 주문한다. 소유를 자랑하는 일이 많지 않은데, 과거의 내가 고마워진다. 지금은 이 음반이 품절된 데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유튜브에서도 음원을 찾을 길이 없어서다.

 

Nathan Milstein & Erica Morini, Bach 와 Vivaldi (1964)


가디너에 따르면, 바흐가 교육받던 17세기 말 독일에서는 (양립불가능해 보이는) 두 가지 음악적 흐름이 공존하고 있었다. 노래가 종교성 함양을 위한 핵심 도구로 기능하는 루터적 세계관의 지배 하에서도, 화려한 이탈리아식 기악곡이 교묘한 면죄부를 받고 음악가들 사이에 유행으로 번져갔던 것이다. 바흐의 이 걸작은 후자의 영향력을 상기시킨다.


이 곡을 생각할 때면 나는 두 개 이미지를 떠올린다. 하나는 불가분하게 얽혀 서로를 감아 올라가는 두 포도 줄기이고 다른 하나는 오차 없이 맞물리는 정교한 태엽이다. 두 개 모두, 곡을 이끄는 두 대의 바이올린에 대한 시각적 비유다. 이 곡이 협주곡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독주 바이올린 외 현악기들의 존재를 자주 잊곤 하는데, 내게는 이 협주곡의 오케스트라가 많은 부분, 반주 혹은 효과음처럼 들리기 때문일 것이다. 중요한 건 두 대의 독주 바이올린이다. 악보 상에 제1, 2 바이올린으로 표기되겠지만 의미 상 서열이 있다고 보긴 어렵다. 둘은 동등하게 자기의 노래를 부르고 때로 겨룬다. 그 대전제는 조화로움이다.


밀슈타인과 모리니의 1악장처럼 주관적으로 짧은 3분 57초를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수 백번 들었지만 늘 벌써? 하며 어리둥절한 사이 2악장이 시작된다. 1악장 비바체의 첫 D음에서 전곡에 거쳐 이어질 긴장감이 조성된다. 첫 독주자가 이끄는 긴박한(그러나 결코 무너져서는 안 된다) 1주제는 마음의 준비를 할 겨를도 없이 나를 매혹한다. 수 백번 새롭게 반복되는 일이다. 두 독주 악기가 캐논처럼 얽히며 등장하는 강렬한 1주제가 마무리되면 목소리를 가다듬고 2주제가 시작된다. 이성적으로 조분조분 말하는 듯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 그래프처럼 좁고 뾰족하게 위를 향한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마치 올림 활만 있는 것 같은 환상에 빠지곤 한다. 한 독주자가 먼저 말을 하고 곧 다음 주자가 자기 입장을 말한다. 목소리를 높이며 전면에 드러났다가 곧 상대에게 자리를 내주고 후면으로 멀어진 듯 작아진 목소리로 읊조리길 반복하는데 이때 두 줄기(두 독주악기)는 서로를 타고 위로 올라간다. 1악장이 끝날 때까지 두 독주악기 사이에 내용적 타협이 이뤄진 것 같지 않지만, 형식적(리듬과 화음의) 불협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 녹음은 1악장 비바체의 빠른 템포를 기계적으로 완벽한 초침 태엽처럼 연주해낸다. 밀슈타인과 모리니는 독주악기라고 해서 쓸데없이 멋을 부리지 않고 약속된 규칙에 따라 정확한 템포로 연주하면서, 1악장의 이러한 요구를 충실히 이행한다. 가장 긴박한 순간조차 허물어지는 법이 없다. 음반 전체에서 드러나는 특징이기도 한데, 독주악기들과 오케스트라의 합은 오차 없이 정확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극단적인 쾌감을 느낀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내게만 특별히 작용하는 감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각또각 움직이는 1악장의 초침 태엽은 2악장의 라르고(그러나 지나치게 느려선 안 된다)에 이르러 시침처럼 레가토로(역시 지나치게 레가토여서는 곤란하다) 흐른다. 1악장에서 자기 목소리 높이기 바쁘던 두 바이올린은 애정 어린 긴 호흡으로 상대를 대한다. 상대는 아름다운 배음으로 화답한다. 둘은 나긋하고 애틋하게 서로를 엮는다. 이건.. 사랑인 걸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름다운 선율이 마음에 스미지 않은 적은 없다. 비브라토를 진하게 넣지 않고 교호작용에 집중하는(연주자의 감정적 과잉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혹은 나와 감정적인 온도가 일치한다. 내게 이 연주의 비브라토에 과함이 느껴지지 않듯이.) 두 연주자 덕분에 나는 예외 없이 이 아름다움에 흠뻑 빠진다. 약 7분에 거쳐 공들여 만들어내는 분위기를 제대로 전달할 서술방법은 온 감각을 청각에 집중하게 할 공백 한 문단과 고요한 시간뿐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3악장은 알레그로로 다시 시원하게 내달린다. 3악장은 하강하는 느낌이 지배적이어서 위로 뾰족하게 솟는 1악장과 대조를 이루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 하강에도 흐트러짐은 있을 수 없다. 정확한 박자와 연주가 조성해낸 긴장감은 마지막 음의 울림이 멈추는 순간까지 곡 전체를 멋지게 관통한다.


이 녹음은 위에 언급했듯 오케스트라와 독주부, 두 독주자 사이의 완벽한 합이 주는 쾌감이 넘쳐흐른다. 넘치는 만족감과 쾌감이 과잉 없는 연주에 기인한다는 건 내게 재미있는 아이러니다. 나는 두 독주자의 감정적인 단정함이 좋다. 합을 맞추기 위해 어쩌면 개인적인 테크닉을 절제(이 절제의 테크닉 자체가 테크닉인걸까?)했을지 모를 두 바이올린의 음색(과 음량)은 나를 매료시키는 최고의 장점이다. 그렇게 탄생한 정확한 전체 사운드 덕분에, 그러니까 바로 이 (감히 말하자면) 완벽한 음반/연주 체험 덕분에 나는 이 곡을 그토록 끝없이 좋아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곡이 끝난 아쉬움을 느끼지 못하는 건 다음 트랙에 비발디가 이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때로 나는 바흐의 세 개 악장이 끝난 줄도 모르고 비발디에 감탄한다. 비발디는 “너무 유명해져 스스로의 명성에 익사한*” 곡(사계, 특히 봄)의 주인으로서 슬픔을 간직하고 있지만, 그 밖에도 사랑스럽고 특별한 많은 음악들(첼로 소나타와 협주곡, 만돌린 협주곡 등. 이건 스포일러다)의 창조주이다. 바흐와 그 동시대인들이 비발디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는 건 논리적으로 타당한 일이다. 물론 역사가 논리적 결정을 따르는 건 아니지만.


글을 쓰는 동안 나 자신에 대해 또렷해진 점이 하나 있다. 정확함과 조화를 향한 (지향을 넘어선) 강한 열망, 그리고 과잉에 대한 불신과 비난이다. 서문에서 밝힌 포부대로 주관적 감상(과 그 근거)을 밝히는 게 이 기획의 의도인데, 쓰다 보면 내 감상과 음악 사이의 격차가 과한 건 아닌지 흘긋거리게 된다. 음악이 아닌 나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특히 그렇다. 이것은 연주와 나 사이 조응 resonance의 방증일까? 아니면 음악을 대상 삼아 단순히 내 가치를 투사하는 데 지나지 않는 것일까? 그렇다 하더라도 적어도 이 곡과 앨범에 대해서라면 조응이 분명하다고 고개를 휘휘 젓는다. 나는 의심 많은 사람이지만, 이 곡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랑하는 마음과 그 마음에 대한 탐구는 계속된다.



* 시리 허스트베트가 <사각형의 신비>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예로 들며 사용한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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