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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May 06. 2021

#11 새로운 사랑의 가능성(feat.명연주 명음반)

나, 성덕이 된 걸까?

* 성덕: 성공한 덕후를 이르는 줄임말


어린이날 2시 4분. 좀 늦었지만 침대에 누워 라디오를 켠다. 처음 듣는 익숙한 경쾌함. 앗, 이건 모차르트다! 급히 명연주 명음반 선곡표를 연다. 화려한 로코코 그림 앨범 자켓이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는다. 다음으로 MultiPiano Ensemble 이라는 연주 단체 이름에 시선이 머문다. 모차르트가 여러 대의 피아노를 위한 곡을 이렇게 많이 작곡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란다. 앨범 자켓 속 드레스의 드레이프처럼 장식이 섬세한 곡을(그러나 그 많은 음표가 다 있을만해서 있다는 모차르트 의견에 나는 대체로 동의한다) 연주하는 온화한 질감에 기분이 가볍게 들뜬다. 이게 모차르트 듣는 기쁨이지. 호감 가는 새 음악을 소개받는 건 늘 설레는 일이다. 나는 높은 확률로 나머지 트랙을 좋아할 것이다. (다 큰) 어린이를 위한 (셀프) 선물로, 아직 품절을 면한 씨디를 주저 없이 주문한다.


선곡표에서 다음으로 눈에 띄는 건 쇼팽의 첼로 소나타다. 흠, 모차르트와 첼로라니. 어린이(나를 이르는 말이다)를 위한 특집 같은 선곡이다. 평소 나는 쇼팽도 자클린 뒤프레도 찾아 듣지 않지만(쇼팽의 야상곡은 예외다. 십대 때 나는 신상옥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 이 곡이 연주되는 장면에 한동안 사로잡혀 있었다. 화려한 피아노곡 즐기는 법은 아직 모르지만 녹턴 선율을 사랑하는 마음은 부정할 수가 없다) 처음 듣게 될 이 첼로 소나타에 호기심이 생긴다. 쇼팽이 첼로곡을? 자주 연주되는 곡이던가? 첼리스트 친구를 염두에 두고 작곡한 일종의 우정의 산물이며 생전 출판된 마지막 곡이었다고 한다. 쇼팽의 마지막 출판물이 첼로라니. 쇼팽을 향한 마음의 각도가 긍정과 관심으로 3도쯤 기운다. 특히 3악장(이었던 것 같다) 멜로디가 아름다웠다. 그가 남긴 몇 안 되는 실내악 중 하나로서의 중요성, 구조적인 완성도 등 언급할 점이 여럿 있겠지만, 쇼팽은 역시 선율이 좋다는 아저씨 말에 백번 동의하게 된다.


마지막 선곡이었던 슈만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예기치 않게 귀에 들어왔다. 나는 슈만에 항상 동의하지는 않지만 때로 걷잡을 수 없이 끌리는데, 이유를 알 수 없다. 이 현상은 내 탐구 과제 중 하나다. 오래 전, 명연주 명음반의 공개방송에서 손열음이 연주하는 다비드 동맹 무곡을 들었을 때도 그랬다. 나는 완전히 이 곡에 빠져들었다. 공연 직후에는 폴리니 앨범을 사서 자주 들었다. 꼭 그때처럼 오늘 어떤 부분이 분명 내 귀를 낚아챘다. 새로운 사랑이 싹트게 될까?


슈만과 재밌는 대구를 이루는 건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신보였다. 듣는 내내 “정신이 번쩍 들 정도의 좋은 연주”라는 아저씨 말에 몇 번이고 공감했다. 고전적인 선율이 남아있는 소나타인데, 현대적인 느낌을 주도록 연주되었다. 그렇게 얼얼하고 날카롭게 스치는 면이 매력적인 연주일 것이다. 재밌다고 한 이유는 좋은 연주라는 데 완전히 공감하면서도 위의 세 곡만큼 흥미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베토벤에게 덜 운이 좋은 날이었나 보다.


오늘 방송이 각별하게 느껴진 건 이렇게 새로운 사랑의 가능성을 많이 발견한 때문만은 아니다. 방송 중간, 프로그램 소개 멘트에 마음이 설레고 말았다.


“요즘 게시판에 좋은 글들이 많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새겨 보고 있습니다.”


이 말에 심장이 두근 했다. 언급하신 “좋은 글들” 중 하나는 내 글이 아닐까? 내 팬심도 읽으신 걸까? 도도도도. 전파 속에 나를 향한 지분도 있는 건 아닐까? 상당한 오해를 함유했을 상상 속에서 나는 잠시 성덕이 된 즐거움을 만끽한다.


그래도, 그렇지 않아도 좋다. 나는 프롤로그에서 내 독자들에게 새로운 사랑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싶다는 바람을 명시했다. 알고 보니, 나 역시 끊임없는 새로움을 원한다. 내게 그 중요한 창구 중 하나는 명연주 명음반이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곡이나 연주자들에 대해서처럼 반드시 다뤄야만 했다는 것을 스스로도 처음 깨닫는다. 그렇게 주워 담은 작은 씨앗은 때로 꽃을 피웠다. 그 사이에 물을 주고 해를 쬐어주는 노력과 그보다 큰 우연이 작용하겠지만, 사랑이라는 마법은 생각보다 자주, 쉽게 일어난다. 오늘은 새로운 사랑의 가능성으로 충만한 날, 어린이날이었다.




명연주 명음반 어린이날 선곡표 : 바로가기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쇼팽 녹턴 장면 : 유튜브에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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