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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May 09. 2021

#12 동화의 마법, 마법의 음악

라벨 - '어미 거위' 중 5곡, '요정의 정원'

그는 막 실연을 경험한 참이다. 믿기지 않는 현실에 얼굴이 일그러진 청년의 정수리 위로 아직 뜨거운 태양이 내리쬔다. 첫사랑이라는 모험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그는 얼얼한 아픔에 울다 지쳐 잠들었을지도 모른다. 촉촉한 비가 적신 저녁나절, 잠에서 깨어난 그도 바깥 풍경도 한결 차분하다. 그런 그에게 아버지가 넌지시 위로와 조언을 건넨다. 조심스럽고 은근하지만 포근하고 사려 깊은 말은 아들을 보듬는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올리버를 떠나보낸 날의 엘리오 이야기다. 영화 사상 가장 완벽한 아버지가 연출된 이 시퀀스 후반부터 라벨의 '어미 거위' 중 5곡, '요정의 정원'이 흐른다.


독신이었던 작곡가 모리스 라벨은 친구의 두 자녀에게 동화를 읽어주는 다정한 아저씨였다고 한다. ‘어미 거위 Ma Mere l'Oye’는 5개 동화 장면을 모티프 삼아 네 개의 손(그러니까, 두 대의 피아노)을 위해 작곡된 모음곡으로, 남매에게 헌정된다. 영화에 삽입된 ‘요정의 정원 Le jardin féerique’은 마지막인 다섯 번째 곡이다.


내게 이 곡은 서두에 서술한 영화 시퀀스와 결합되어 있다. 그 결합은 너무 단단해서, 나는 음악만 듣고 있을 때에도 영화 속 빗소리를 듣곤 한다. 물론 이 빗소리(아니면 단지 바람소리였을까?)는 실제 청각 자극이 아니라 내 뇌가 곁들인 소리이다. 얌전한 비가 내리는 차분한 정원에, 요정의 마법 가루처럼 반짝이는 높은 옥타브 음들이 흩뿌려지면 나는 자상한 아버지의 따뜻한 손길을 느낀다. 영화 속 아버지 대사를 그대로 기억하기 때문이 아니다. 음악은 그 대사가 내게 남긴 사랑의 느낌을 되살리고 이 청각기억은 등을 토닥여주는 기분 좋은 촉감을 동반한다. 이 촉감 역시 빗소리처럼 나의 창작물이다. 마이클 스털버그는 신체적 접촉 없이 완전한 다정함을 연기해내기 때문이다.


반대로 음악이 영화에 마법을 걸기도 한다. 영화에서 완벽한 아버지 신이 끝나면, 요정이 뿌리는 마법 가루는 은빛 눈이 되어 엘리오와 올리버가 함께 했던 땅을 소복하게 덮는다.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장면에 이 음악을 흘림으로써 한 여름 첫사랑의 열기는 겨울 무렵, 곱고 건강하게 식었다는 의미를 전한다. 이로써 나는 다소간 안심한다. 그리곤 첫사랑의 아픔을 건강하게 견디어 낸 것은 곧 요정들(같은 아버지?!)의 도움이었으며 마법이었을 것만 같은 교묘한 연상작용이 나도 모르는 사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 결과 엘리오의 첫사랑(으로부터의 회복) 이야기는 내 머릿속에서 동화적인 이미지를 덧입는다. 이렇게 결합된 음악-영화는 내게 제3의 독립적인 이야기가 된다. 나는 그 따뜻한 마법 동화를 좋아하고, 음악만 들어도 마음이 다독여짐을 느낀다. 이때 내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사람은 이야기 속 아버지도, 우리 아버지도 아닌 나 자신일 것이다.


한편, 작곡 계기를 듣고 이 곡에 대한 애정이 더 깊어졌다. 자기 아이가 없는 라벨이 친구 자녀들을 아꼈듯, 나는 조카를 사랑한다. 나를 사랑해주는 다정한 작은 사람이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내가 종종 (음악 대신) 이야기를 지어내면, 또래에 비해서도 말을 잘하는 나의 작은 사람은 실없는 내 이야기를 좋아해주고 더 많은 이야기를 청한다. 자신을 따르는 작은 사람에게 라벨 역시 무엇이라도 보답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나는 나의 작은 사람에게 이야기뿐 아니라 음악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 무엇보다 그에 대한 사랑을 알려주고 싶은 욕심을 품는다. 그 사랑도 내가 가르쳐줄 수 있는 걸까? 어제 같이 들었던 모차르트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에 그가 작은 호감이라도 가졌길 기도한다. 그리고, 이렇게 화창한 날, 어쩐 일인지 실연을 당하지 않고도 종일 마음이 아린 나를 위해 음악 동화, '요정의 정원'을 들려주어야겠다. 내일 아침이면 아린 마음에 새살이 돋아나는 마법을 걸어달라고 주문해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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