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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May 18. 2021

#13 사랑해도 될까요? : 머레이 페라이어

머레이 페라이어가 연주하는 바흐

모차르트가 연주하는 바흐? 머레이 페라이어 Murray Perahia 의 바흐 파르티타에서 받은 첫인상이 아직도 또렷하다. 2008년, 라디오에서 처음 들었을 것이다. 내가 듣기에는, 모차르트 스페셜리스트의 터치로 바흐를 연주하고 있었다. 어색한 색상 조합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당시 내가 가진 유일한 바흐 건반 앨범은 글렌 굴드의 1955년 골드베르크 변주곡이었는데, 열아홉인가 스무 살에는 몇 달 동안 이 음반을 틀어놓고 잤다. 2008년까지 내 유일한 바흐 피아니스트는 1955년의 글렌 굴드였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내가 페라이어의 인간적인 바흐에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바흐를 이렇게 따스하고 보드랍게 연주하는 건 틀린 게 아닐까? 틀린 해석과 연주를 좋아해도 되는 걸까? 내적 혼란과 죄책감에도 불구하고 나는 걷잡을 수 없이 페라이어의 바흐에 빠져들었다. 홀린 듯이 앨범을 구했다. 머레이 페라이어(의 바흐)와의 조우는 내게 일대 사건이 된다.


진행자 : 어제 연주 대단했어요. 마치 바흐를 동시대 음악처럼 연주하더군요. 심지어 감히, 감히 피아노로 연주하셨어요. ...

페라이어 : 그렇죠, 감히! ... 제가 어렸을 때, 그러니까 20대 때, 어쩌면 30대가 될 때까지도요, 모든 위대한 피아니스트들은 피아노로 바흐를 연주해선 안된다고 했어요. ... 지배적인 관점은, 바흐는 피아노를 위한 게 아니라는 것이었죠.

진행자 : 그렇다면 묻고 싶군요. 우리가 사랑해마지 않는 (피아노라는) 악기로 바흐를 연주하는 위험이 무엇인지 말이죠.

페라이어 : 글쎄요, 그 위험이라는 건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로맨틱하고 무아지경이 되고 총천연색으로 선명해지는 것,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 밋밋해서 아무 감정도 움직임도 없어지는 거겠지요. 이 둘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기는 정말이지 어려워요.

- Intermezzo with Eric - Murray Perahia on Bach 중에서 (해석과 강조는 내가. 유튜브에서 보기)


최근 위 인터뷰를 발견한 나는 환호작약했다. 그간 내가 품었던 의심과 의문에 대한 페라이어의 답변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이어, 진행자는 기존의 바흐 피아노 연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한다. "오늘날 바흐 스페셜리스트라는 사람들은 너무 빠르고 스타카토를 많이 하는 데다 똑똑 끊어 연주해서(so articulated), 마치 바흐는 레가토를 모르는 사람 같아요.” 페라이어 이전에 내가 알던 바흐가 그랬다. 1955년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거의 최초로 하프시코드가 아닌 피아노로 바흐를 연주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그 앨범 말이다. 물론 바흐는 많은 레가토를 썼다고 페라이어는 답한다.


"너무 밋밋해서 아무 감정도 움직임도 없는" 기존 바흐 피아노 연주 관행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페라이어의 기조를, 나는 2008년 파르티타에서 감지한 듯하다. 음표의 연속에 지나지 않던 메마른 바흐에 페라이어는 인간의 숨결과 혈색을 불어넣은 것이다. 놀랍게도(늘 나를 놀라게 하는 건, 이런 연주가 존재한다는 사실보다는 내게 그 연주가 통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우연이 있나!) 그의 의도는 내게 곧이 전달되었다. 살아있되 과하지 않은 바흐라는 그의 견해에 나는 순식간에 완전히 설득당했다. 당시로서는, 틀린 연주일지라도 어쩔 수 없다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이미 나는 이런 바흐, 즉 살아있는 바흐 (연주)를 허용하기로 결정(굴복)했던 것이다. 한편, 그가 불어넣은 혈색은 내게 아주 알맞았다. 페라이어가 다른 한편으로 경계했던 것, 즉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연주하는 위험 역시 (내 입장에서는) 잘 피했다는 뜻이다. 프라고나르가 그린 ‘도둑맞은 키스’의 로코코 여성 같은 혈색은 아직 바흐에게 과하다.


그럼 페라이어가 바흐에 불어넣은 숨결, 나를 당혹케 한 따스함은 무엇이었을까? 위 인터뷰에서 내가 좋아하는 대목 중 하나는 이런 것이다. 그가 연주하며 설명한다.


... 그(바흐)에겐 인간의 고통이라는 느낌이 항상 있어요. 그리고 그는 그게 갑자기 나타나는 안개 같다고 말하죠. 하지만 이 안개도 사라져요, 갑자기요. ... 이 아름다운 종지(cadence)는 삶의 무상함, 그 무상함의 비극을 나타내죠. ...


페라이어는 주 선율 아래 흐르고 있는 것(핵심은 역시 코랄이다)을 봐야 한다고 말한다. 음표가 아닌 음표로써 표현하고자 했던 것에 주목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건조한 악보(어쩌면 너무 당연해서 생략이 많을지도 모른다. 오늘날까지 자기 음악이 연주될 줄, 그리고 21세기 인간들에게는 반드시 상세한 악상기호가 필요해질 줄 알았다면 바흐도 명기하지 않았을까?)와 오늘날 쓰이지 않는 악기로 바흐가 전달하고자 했던 아이디어 말이다. 그 아이디어를 페라이어는 인간의 고통, 신의 위대함, 기쁨과 같은 인간 감정으로 해석하는 것 같다. 이 감정들은 바흐가 연주되던 당시의 환경과 음악문법에 기대어 연주된다. 그리고 저변에 흐르는 이 (숨겨진 혹은 암묵적인) 선율을 표현할 때, 바흐는 더 이상 건조하지 않다고 말한다. 저도 동의해요, 페라이어 아저씨. 그렇구 말구요.


결과적으로 나는 감정과 혈색이 있는 바흐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 이전에 내가 알던 객관적이고 신적인 존재(비인간적인 혹은 물질적인 또는 피상적인)로서의 바흐보다 더 사랑하기 쉬웠다. 나아가, 나는 새로운 바흐 음악을 만날 때면 기대감과 호감으로 귀를 쫑긋 세운다. 그 바탕에는 내가 아직 모르는 바흐 역시 사랑스러우리라는 대전제 혹은 무한한 신뢰가 자리한다. 페라이어의 역할이 컸음은 말할 나위 없다. 물론 여전히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즐겨 듣는다. 그러나 페라이어의 파르티타 앨범을 기점으로, 바흐 건반곡뿐 아니라 바흐 전반에 대한 내 관점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내게는 파르티타(2008, 2009)와 프랑스 모음곡(2016) 앨범이 있고, 나는 이들을 차별 없이 아낀다. 앨범을 통째로 듣는 습관 때문에 나는 곡목을 거의 외우지 못한다. 게다가 어릴 땐 앨범 하나를 다 외우도록 반복해서 들었지만, 요즘 나의 듣기 근육은 그렇게 긴 호흡을 견디지 못한다. 그 때문에 대개는 첫 트랙과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된다. 두 장의 파르티타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렇게까지 무한한 애정을 표한 파르티타는 척척하게 비오는 날 자주 들었다. 요란한 비바람 말고 지리하지만 차분하게 비가 내리는 봄이나 여름이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오랜만에 앨범을 다시 듣는 오늘도 그런 날이다. 역시 첫 트랙인 파르티타 2번의 첫 C 마이너 화음이 울려퍼지는 순간 이미 하아, 감탄이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다.


파르티타 2번의 노래 위에는 두 가지 기억이 겹을 이룬다. 페라이어의 연주는 아니지만, 영화 ‘칠드런 액트’에서 궁지에 몰린 상황(궁지라고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우아한 슬픔으로 연출되기 때문이다)에도 일상을 멈추지 못하는 엠마 톰슨(피오나 역)의 출근길에 이 음악이 흐른다. 이 영화에는 여러 음악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삽입되는데, 아름답고 슬픈 피오나와 바흐의 합이 환상적인 시퀀스다. 다른 한 겹의 이야기는 필름클럽에서 이 영화, ‘칠드런 액트’를 다루던 에피소드이다. 혜리 기자님의 반려견 타티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클러버들에게 전했던 회차이기도 하다. 기자님과 피디님이 흐르는 눈물을 정리할 동안 이 노래를 흘려보냈다. 사당역에서 당시 출근하던 건물까지 걷는 십분 동안 매일 이 부분을 들었다. 모든 슬픔을 아름답게 만드는 음악이다. 그러고 보니 모든 바흐가 그런 것 같기도, 그래서 내가 당연한 얘기를 하는 것 같기도 해 무안해진다.


그동안 페라이어를 향해 할 이야기가 이렇게 많았던가, 스스로도 놀란다. 프랑스 모음곡 이야기는 아무래도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모두에게 그의 파르티타 2번을 권하고 싶은 퇴근길이다.




음악

머레이 페라이어, 바흐 파르티타(2008) 2번 : 유튜브에서 듣기

글렌 굴드, 골드베르크 변주곡(1955) : 유튜브에서 듣기

영화

칠드런 액트 : 내가 쓴 영화 이야기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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