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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Mar 24. 2021

4주. 칠드런 액트(2019)

2019. 07. 28. by 만정

당신의 영화 이야기를 이제 두 개 읽었을 따름인데, 어쩐지 숙연해진다. 명색이 스무 살에 이래 가장 오래 좋아한 사람인데, 이렇게나 모르는 게 많았단 말인가! 이를테면 성룡 말이다. 나는 이제껏 당신의 이상적인 남성상이 성룡 발가락만큼도 비슷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해사하게 웃고 있는 박해일이 아니라 ‘왕주먹코에 코피를 매달고 씨익 웃고 있는’ 성룡이었다니. 내가 잘못 알아도 한참 잘못 알았지. 그러다 어떤 얼굴을 떠올리고는 아, 그런 단서가 있었는데! 하고 무릎을 치며 혼자 잠깐 웃는다. 물론 곧 고개를 저으며 그 ‘건강한 소년상’이 남성 선택의 기준이라기보다는 본인 자아의 이상형 중 하나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당신 글을 읽고 새삼 깨달은 게 하나 더 있다. 내가 영화를 볼 때 타인을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는 많은 좋은 영화들을 봐왔다. ‘좋은’ 영화의 요소는 탄탄한 시나리오, 아름다운 영상, 훌륭한 편집, 섬세한 감정 묘사 등 다양하다. 그렇지만 내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는 영화들을 보면, 나는 그 등장인물을 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로 사용해 온 듯하다. 그래서 (이상적인) 남성상이나 부모상 같은 건 드물지만 (이상적인) 자아상에 대해서는 제법 많은 영화적 아카이브를 형성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몇 년 새 내 영화 목록에 한 가지 두드러진 경향이 있다면, 직업인 혹은 생활인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탐구이다. 직업인으로서의 건강한 자아를 형성하는 데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실패를 경험하고 있는 내 현실을 고려할 때 납득할만한 일이다. 그 목록은 지난주에 마침(!) 따끈따끈한 신작으로 업데이트되었다.


영화 ‘칠드런 액트’는 엠마 톰슨이 연기한 판사 피오나를 따라간다. 피오나는 평판 좋은 판사이다. 아이는 없지만, 서로 사랑하는 교수 남편과 사회 경제적으로 안정된 가정을 꾸리고 있다.


극이 시작되면, 그런 그녀의 일상에 문제가 제기된다. 집에서는 남편이 선언한다. 더 늙기 전에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경험을 해보고 싶다고. 결혼생활에서 할 수 없다면 혼외 연애를 시작할 예정이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피오나를 여전히 사랑하며 결혼은 유지하겠다고. 동시에, 종교적 이유로 수혈을 거부하는 소년에 대한 재판도 그녀에게 답을 추궁한다.


피오나는 무려 명 판결문을 쓰는 유능한 판사임에도 매일 부과되는 재판의 무게는 만만치 않다. 남편이 결혼생활에 던진 핵폭탄급 문제를 들여다볼 여유가 없을 정도다. 자기 삶에 대한 중대한 문제에 답할 시간도 없이 그녀의 답을 기다리는 중요하고 어려운 사건들은 밀려든다. 당장 내일까지 대답해야만 하는 끝없는 재판과 판결문들. ‘진짜’ 자기 문제들은 생각할 시간조차 갖지 못한 채 한쪽 옆에 그대로 남겨진다. 남편은 답을 얻지 못한 채 피오나의 뒤통수만 보다 사라진다.


수혈을 거부하는 소년에 대한 재판 그 자체는 서스펜스가 없다. 그 사건은 수혈하도록 판결하여 살려낸 소년이 제기하는 문제들 때문에 의미를 갖는다. 시와 음악, 예술을 사랑하는 소년은 마치 피오나가 자신의 창조주인 것처럼 그녀에게 삶과 예술과 세계의 모든 것에 대한 질문들을 쏟아낸다. 이때의 피오나는 더 이상 ‘직업적으로’ 답해야 할 의무가 없는 이 문제들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고 제기된 질문들은 -역시- 버려둔다.


성실하지 않은 직장인으로 살 때조차, 오늘 답해야 할 문의와 이메일을 처리하다 보면, 나 자신에 대한 진지한 문제들은 우선순위에서 자주 밀려나고 때로 잊힌다. 연휴라도 되어 며칠 일을 떠나거나 일 년에 한 번 여름휴가라도 되어 지리적으로 회사로부터 멀어질 때에서야 밀려났던 내 문제들이 답을 종용하며 찾아오지만, 그렇게 오래 버티지는 못하고 다시 시야 밖으로 사라진다. 반복되는 이 일이 이제 낯설지 않다. 어쩌면 자신에 대한 질문-잘 살고 있는 걸까? 문제는 없는 걸까? 같은-을 더 이상 던지지 않아야 어른으로서 혹은 생활인으로서 능숙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이 점에 있어서 나는 어쩐지 요령부득이다.


나와 달리 명실상부 ‘어른’인 피오나도 어쩐지 피아노 연주는 멈추지 않는다. 이 사실이 내게는 의미심장하다. 피오나는 바쁜 와중에도 피아노에서 그리 멀어지지 못한다.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잃지 않는(혹은 못하는?) 것이다. 그녀가 삶에 대한 물음들로부터 더 이상 자신을 방어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순간 역시 연주 중이었다(당연히 법이 내린 결정이 아니다). 직업의 이름으로 자기를 보호하던 단단한 껍질은-고통스럽고도 다행스럽게- 음악이라는 마법의 이름으로 깨어지며, 그러자 마침내 그녀는 자기 삶을 진심으로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그 순간이 내게는 마치, 음악과 연주를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에는 그 자신이 의식하든 안 하든 삶에 대한 애착과 사랑이 자리하고 있다는 증좌처럼 느껴진다. 혹은 음악과 연주야말로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 장치 인지도 모른다. 수혈을 거부하는 소년으로부터 삶에 대한 애착을 읽어낸 것도-‘말’이 아닌- 기타 연주이지 않았던가. 적어도 지금 나는 음악과 연주로 숨 쉰다. 그것으로써 즐겁기를 포기하지 않고, 나를 잊지 않는다.

 

엠마 톰슨은 피오나의 당혹감과 슬픔, 분노를 바흐의 파르티타 2번 위에서 그 음악만큼이나 아름답고 우아하게 연기해낸다. 바흐와 엠마 톰슨 모두 비현실적일 정도로 소란스러움이나 번잡함이 없다. 슬프지만 동시에 아름답다. 또는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잃지 않는 슬픔이다. 나는 이 영화를 아마도 바흐의 파르티타만큼 오래 좋아하게 될 텐데, 그건 결국 이 아름다움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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