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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Mar 25. 2021

6주. 로마의 휴일(1953)

2019. 08. 10. by 만정

바야흐로 여름휴가 성수기이다. 나는 나흘의 여름휴가가 생기는 6월 15일을 간신히 기다리는 처지이기 때문에 성수기는 사실 남의 얘기다. 다른 사람들의 휴가철 성수기를 맞아, 나는 이미 기억으로 남은 나의 달콤한 휴가를 떠올린다(사실은 거의 매일 생각한다).


작년 여름엔 열흘을, 올해는 이틀을 로마에서 보냈다. 동생은 명절에 고향 찾아가냐 놀리고 엄마는 이제 로마는 그만 가자시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로마를 사랑한다. 고고학자를 꿈꾸던 어린이는 아직도 도시 곳곳에서 발굴이 이루어지는 이 오래된 도시에 끌렸고, 장래희망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로마에 대한 사랑만큼은 간직했으며 결국 로마에 가게 되었다, 그것도 2년간 두 번이나. 뭐, 그런 얘기다.


로마가 그리울  당장 그곳에   없는 나는 영화 ‘로마의 휴일 틀어놓는다. 대스타 그레고리 팩과  그보다  스타가  신인배우 오드리 헵번이 출연해 기자와 공주의 꿈같은 하루를 그린 로맨틱 코미디의 고전. 로마를 배경으로  가장 유명한 영화. 파올로 소렌티노의 ‘그레이트 뷰티(2014)’ 통해 오늘날의 로마 곳곳을 섬세하고 아름다운 컬러 영상으로   있지만, ‘로마의 휴일에서 1950년대 로마 명소들을 보는 즐거움은 결코 낡지 않는다.


물론 세월이 느껴지는 변화들도 있다. 처음 두 사람이 만나는 포로 로마노는 지금보다 훨씬 인도에 가까워 손을 내밀면 잡힐 듯하고, 판테온 앞 카페 G. 로카는 이제 그곳에 없다. 하지만 포로 로마노와 판테온, 트레비 분수와 스페인 계단, 캄피돌리오와 산탄젤로 같은 장소들은 이 흑백영화 속의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있다. 반백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변함없이 존재한다는 것. 당장 신촌이, 홍대가, 이대와 아현동이 새 건물과 아파트로 알아볼 수도 없이 바뀌는 서울의 15년을 돌아보면 그 자체가 기적 같아 보인다. 로마가 영원의 도시라는 것은 클리셰일지 모르지만, 팔라티노 언덕이나 포로 로마노의 폐허 위를 걷는 감동은 결코 진부할 수 없다. 고대가 현존하는 도시 로마가 주는 감동은 18세기 인간 괴테에게 그랬듯이 나를 뒤로 하고 다음 세기의 인간에게도 전해질 것이다. 로마에서 내가 느끼는 아름다움은 그런 것이다.


최근 로마를 보기 위해 이 영화를 다시 찾으면서 ‘덤’으로 얻은 것은 이상하게도 ‘직업으로서의 공주’ 이야기이다(베버에게서 빌린 것은 제목뿐, 그의 어떤 저작과도 무관하다). 공주가 로마에서 휴일을 보내고 미국인 기자를 만나 사랑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다 업무와 의무로부터의 짧은 일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영화는 공주의 유럽 국가 순방에 대한 뉴스 보도로 시작한다. 뉴스는 그녀가 공주로서의 업무들을 무리 없이 수행하고 있다는 정보를 준다. 곧이어 로마에서 개최된 공식행사 장면에서는 어조가 미묘하게 변한다. 공주의 근무현장을 근거리에서 보여주면서, 방금 전의 공식 리포팅에 작은 균열을 만들어낸다. 공주로서의 역할을 근엄하게 수행하고는 있지만, 아직은 견습생처럼 서툰 면이 있으며 어쩌면 이 일을 지루해하거나 피곤해하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치마 속에서 살며시 구두를 벗고 발을 꼼지락거리는 모습을 통해 넌지시 보여주는 것이다.


마침내 모든 행사가 끝나고 잠옷 차림을  침실 장면으로 전환되면 공주의 사적인 대사가 처음 등장하는데,  대사는 “  잠옷이 정말 싫어.”이다. 공식석상에서 왕실의 일원으로서 보이던 권위와 우아함이라고는  내다 버린 공주는 어린아이처럼 유모에게 투정을 부린다.  없는 내일의 업무 스케줄 브리핑을 받으며 점차 표정이 시무룩해지더니 급기야는 고장  기계처럼 그만두라고 소리 지르며 울음을 터뜨린다. 그녀를 만나러  의사는 조금이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도움이 된다고 말하고, 그녀는 의사의 조언-전혀 그런 의미가 아니었지만- 스스로의 결정에 따라 거처를 몰래 빠져나와 잠시 바깥바람을 쏘이고 돌아오기로 한다.


이제는 거의 잊었지만, 처음 나인 투 식스의 직장인이 되었을 때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 맑은 날 밖에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사무실에 갇혀서 8시간의 월급 값을 해야 한다는 게 억울한 처벌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런데 쭈글한 직장인이 아닌 공주도? 동화에서처럼 예쁘고 행복한 공주일 뿐 아니라 아직 놀고 즐기고 싶은 어린 나이에 의무를 다 해야 하는 직업인으로서의 공주를 그려내는 영화의 시선이 신선했다. 자기 운명 혹은 의무를 진지하게 인지하고 있지만 때로는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투정 부리고 울음을 터뜨리는 공주라니. 재미있다!


그런데 그게 53년, 한국전쟁 휴전하던 해에 만들어진 영화다. 어릴 때 다소 지루했던 고전영화들이 다시 보면 놀랍도록 생생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 영화의 경우 그것은, 직업인으로서의 의무(혹은 생계의 의무)를 다 해야 하지만 때로 그 의무의 무게에 짓눌려 겪는 내적 갈등이 인간에게 보편적인 감정이며, 내가 그 보편적 인간 감정을 이해한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경험이다.


그렇지만 보통의 성실한 사람들처럼 공주는 로마에서의 멋진 휴일 하루를 마음에 간직한 채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일터로, 본업으로 돌아간다. 이 글을 쓰는 짧은 시간 동안 로마의 여러 장소들을 오가던 내 마음도 어느새 다시 서울의 내 방으로 돌아와 있음을 느낀다. 이 주말이 지나면 나의 안온한 집을 나서 나 역시 나의 일터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번잡한 일터에서 머리와 옷가지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며 나는 나의 로마를 생각할 것이고, 로마는 내가 찾을 때 언제나 거기에 있어줄 것이다. 아, 로마, 나의 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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