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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Mar 25. 2021

7주. 엑시트(2019)

2019. 08. 15. by 감자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소재로 사교육 시장의 영업 기술에 대한 소회를 풀어놓겠다던 예고와는 달리, 이번 주의 영화는 조정석과 임윤아 주연의 ‘엑시트 되었다. 혹여 해당 내용을 기대하였다면 심심한 사과를 드리는 바다. 영화 변경의 이유는 간단하다, 8 14일에 일찍 일이 마쳐서 학원근처 CGV 찾아갈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엑시트가 재미있다는 얘기는 여기저기서 들었고 영화를 보고 나니 허명이 아니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엑시트는 소문대로 뒤끝이 깔끔한 오락영화였다. 유기화학 전공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흡족해하며 보고 나올만한 여름방학용 영화다. 미덕이 많은 영화이니 여름이 끝나기 전 한 번쯤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청년백수인 이용남이 어머니의 칠순잔치 장소에서 과거 대학 산악부 동아리에서 짝사랑하던 정의주를 만나 둘이 함께 살인 가스 테러 현장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이 이 영화의 주된 이야기다. 영화가 지적하는 문제의식이나 영화의 미감, 인물들의 면면, 문제의 해결 방식, 윤리성 등 이 영화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철저하게 2019년의 한국적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철저하게 실용주의적인 작품이므로 영상 예술로서의 영화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교육 영상이라고 보는 게 나을 것도 같다.


영화에서 ‘수직’의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인물들은 모두 살아남기 위해 위로, 위로, 위로 올라간다. 추락이나 머무름은 죽음이다. 죽음의 가스가 발밑까지 올라온 상황에 용남이 높은 빌딩을 가리키며 “살아남으면 다음에는 꼭 저런 높은 빌딩에 있는 회사에만 원서 쓸 거야!”하고 울음을 터트리는 장면은 그 욕망이 담고 있는 영화 내적, 외적 상황의 처절함 때문에 관객들로 하여금 씁쓸한 웃음을 터트리게 한다. 영화 초반 맨 몸으로 죽을힘을 다 짜내서 건물 외벽을 낑낑 올라가는 용남이나, 타워 크레인으로 오르기 위해 탈장이 일어날 듯(좀 더 리얼하게 말하자면 ‘똥줄이 빠질 듯’) 달리고 또 달리는 용남과 의주를 보면 2019년에 구직 중인, 구직을 하고 나서도 딱히 이상적이지 않은 직업 환경을 감내해야 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자연히 떠올리게 된다.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이다.


생존을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용남과 의주에게 우리는 금방 감정을 이입하고 한 편이 된다. 그들은 모두 선량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절망적인 상황을 비관하지 않고, 생존을 포기하지 않고, 그 와중에 선량한 선택을 한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두 주인공은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행동들을 매뉴얼을 따르듯이 차곡차곡해 나간다는 점이다. 그들의 행동에는 군더더기가 없고, 모든 선택들은 극도로 효율적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고민이나 실수 등으로 정체되어 있는 상황(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고구마’)를 극혐 하는 시대정신을 드러낸다. 그들은 생존이 걸린 순간에 이타적인 선택을 하는 윤리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그 선택들은 깊은 고뇌를 바탕으로 한 비장함이나 경건함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지속적으로 주입받아 온 선량함이 무의식적으로 가시화된 것으로 느껴진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두 가지의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하나는 학습된 선량함이 인간의 윤리적 행동을 극대화한다면, 윤리적 행동이란 본디 인간의 자율성과는 관계가 적은 것일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선인지 고뇌하는 개인은 사실 별 의미가 없지 않을까? 무엇이 선인지는 이미 사회가 정해 두었고, 개인이 힘써야 하는 것은 올바른 교육을 통해 선이라고 정해진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선함에 대한 교육을 어떻게 실행해야 하고 또 그 교육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지금보다 더 실질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또 하나는 현대의 윤리적 초자아는 어떤 이념이나 철학, 혹은 ‘아버지’ 등으로 상징되는 개인이 아니라 모든 순간 모든 곳에서 미시적으로 쏟아지는 수많은 익명의 SNS 사용자들이라는 것이다. 영화 중반부 이후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주인공들은 개인 방송–기관 방송 양 채널을 통해 생중계되는데, 그들의 모든 행동은 방송을 보는 불특정 다수들의 ‘그저 빛ㅠㅠㅠㅠㅠㅠㅠ’과 같은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감상과 평가들에 의해 윤리적 정당성을 얻는다. 우리의 윤리적 초자아가 내가 알지 못하는 다수 대중이라는 사실은 우리 사회를 더욱 실용주의적으로 만들어 나갈 것이다.


영화가 좋다고 해 놓고서는 딱히 호의적이지 않은 이야기만 늘어놓은 것 같지만, 두 주인공의 귀여움은 분명히 이 영화를 사랑스럽게 만든다. 둘은 같이 살아남기 위해 모든 고난의 산을 이겨내는 전우가 된다. 둘 다 서로를 버리지 않고, 둘이 있기 때문에 힘든 상황을 버텨낼 수 있음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죽음이 닥친 상황에도 서로를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미안함을 털어놓는다. 재미있는 것은 그 모습들이 작위적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2019년을 살아가는 대부분 사람들은 엑시트의 상황에서 용남이와 의주처럼 행동할지도 모른다. 우물쭈물하다가도 상대를 신뢰하고 착하게 행동할 것이다. 자신의 선택에 후회하면서 징징 울기도 하고 좀처럼 풀리지 않는 상황에 어쩔 줄 몰라하겠지만 그래도 올바른 선택을 하기 위해 힘쓸 것이다. 이렇게 느끼는 이유는 용남이와 의주 둘 다 극도로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일 테다. 물론 조정석과 임윤아의 귀여움과 체력은 괴물 같은 비범함으로 빛나고 있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 ‘역시 사람은 운동을 해야 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영화가 흥행하는 여름 동안 클라이밍 수강생이 유의미하게 늘 것이 틀림없다. 앞서 두 주인공이 평범하다고 했는데, 자신의 육체를 양 팔만으로 거뜬하게 번쩍번쩍 끌어올리는 능력이 있다는 점을 보면 둘은 사실 슈퍼 히어로의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영화가 또 재미있는 점은, 대개 그런 신체적 능력치를 갖고 있는 주인공이 나온다면 육체미를 과시하는 노출 신 같은 게 나올 법도 한데, 영화 내내 주인공들의 육체를 드러내는 유일한 장면이 영화가 시작할 때 용남이가 동네 놀이터에서 하릴없이 철봉을 하는 찌질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그 장면에서도 조정석의 팔뚝은 딱히 ‘찰져’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에 의주가 영화에서 얄미움을 담당하고 있는 점장을 후려칠 때 찰싹하는 싸대기 수준이 아닌 퍽 소리가 날 정도의 강력한 펀치를 날린다는 점과 함께, 감독의 유머 코드가 잘 드러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엑시트는 철저한 상업영화도 자극적인 웃음 없이 관객들을 즐겁게 하고 감동시킬 수 있다는 좋은 선례를 남겼다. 좋은 영화는 불필요한 욕이나 폭력, 자기 연민과 과시가 없이도 충분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가문의 영광’ 같은 영화가 상업 영화의 성공사례로 남는 나쁜 시대는 이제 그만 끝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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