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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Mar 25. 2021

9주. 기생충(2019)

2019. 09. 08. by 감자

처음 이 프로젝트를 계획하며 썼던 규칙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마지막 10번을 쓰며 꽤나 엄중했던 기억이 난다. 앞에도 명시되어 있지만, 10번 규칙의 요지는 ‘펑크 내지 말 것’이었다. 하지만 총은 발사되고, 버튼은 눌러지며, 규칙은 어겨진다. 수동형 문장이 가지는 회피력이 느껴지는가?


할 말이 없어야 하겠으나, 할 말이 없으면 우리의 글이 지속되지를 않을 테니, 나름 변명을 해 보겠다. 지난주는 8월을 마무리하는 주였다. 사교육 종사자에게 방학이 있는 8월은 크게 한 탕 땡겨 먹을 수 있는 시즌이면서도, 다르게 표현하면 체력을 한계까지 끌어내야 하는 달이다. 수업은 아침 9시에 시작해서 오후 10시에 끝났고 중간에 쉬는 시간은 점심시간 10분, 저녁시간 10분밖에 없었다. 일하는 동안에는 화장실을 한 번 밖에 가지 않았다. 정리를 하고 나오는 시간은 지하철 막차 시간인 11시 40분, 오래 고아져 진이 다 빠진 사골처럼 섬유질만 남은 것 같은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가면 열두 시 반이고, 대충 손발이나 씻고 침대에 눕고 나면 또 어느새 아침 7시였다. 그러면 씻고 밥을 먹고 여덟 시에 출근하여 아홉 시부터 수업을 시작하고…. 그런 날이 30일이 넘게 지속되었다. 8월 15일이 없었더라면 정말로 힘겨운 한 달이었을 것이다. 대한독립 만세다, 정말.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래서 여름특강의 스케줄에서 해방된 지난주 9월 1일, ‘일요일엔 영화를’이 아니라 ‘일요일엔 밀린 잠’을 시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변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말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일정을 내내 서비스 마인드로 지내 온 사교육 종사자가 본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뜨끔할 정도로 ‘이 바닥’의 생리를 보여주고 있었다는 소회를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김기우와 김기정이 박 사장 댁 사모님에게 ‘입을 터는’ 장면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개그 컷으로 기억될 것이다. 난데없이 학생 손목을 잡고 맥박 운운하며 ‘수능은 기싸움’이라는 쇼맨십을 보여주는 기우나, 다송이가 아무렇게나 그린 그림을 보며 ‘스키조프레니아 존’을 들먹이는 기정이, 그리고 그런 두 사람에게 휙 넘어가는 ‘심플한’ 사모님까지. 하지만 그 모든 장면들은 사교육 시장에 종사하고 있는 나에게는 웃을 일이 아니었다. 솔직히 약간 내부고발 프로그램을 보는 기분도 들었다.


사교육 시장의 끔찍함을 드러내는 작품들은 기존에도 많았다. 최근 가장 인기 있었던 드라마인 ‘스카이 캐슬’은 강남 대치동으로 대표되는 노블레스 사교육을 비판하겠다는 주제의식을 보였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사교육 시장 내에서는 그 드라마를 내세우며 ‘강남에서는 저런 사교육을 시킨다니까요’라며 고액 컨설팅 프로그램이 홍보되곤 하였다. 사교육 시장은 규모가 크지만, 무엇을 파는지는 눈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물론 ‘성적 향상’이라는 정량적 목표가 있긴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공부를 해 본 사람은 알겠으나 성적이라는 것은 인풋만큼의 아웃풋이 나오는 게 아니다. 물론 인풋이 많으면 아웃풋이 나오는 수많은 사례들이 존재한다. 분명히 학생이 어떤 학군과 어떤 지역에서 사교육을 받느냐 하는 것은 그의 성적에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사교육이라는 것은 명확한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같은 선생에게서 공부해도 학생마다 다른 결과를 얻고, 같은 선생에게 꾸준히 공부해 온 학생이라도 성적은 롤러코스터를 탈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성적이라는 정량적인 수치는 사교육 시장을 움직이는 요인들 중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국 사교육 시장에서 사고 팔리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인 ‘안심’이다. 그 누구도 자신의 아이의 미래에 대해 100% 안심을 할 수 없다. 아이의 장래와 같은 먼 미래는커녕 당장 이번 달에 있을 중간고사의 점수조차도 안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교육 시장 종사자는 구매자들이 안심할 수 있는 ‘믿음’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다. 실제로 자신이 맡고 있는 아이의 성적이 떨어지더라도 그 다음번에 대한 희망을 제시할 수 있는 판매자는 구매자들에게 재구매될 수 있다. 그래서 판매자가 맡은 아이의 성적이 오른다 하더라도 재구매되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변동하는 학생의 상태에 맞는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보여주지 못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안심은 비정형적인 가치이고 그것을 구매자 개개인의 구미에 맞는 가시적인 어떤 것으로 바꾸는 것이 판매자의 능력이다. 안심이란 다른 구매자의 경험담, 맛보기 체험에서 얻은 한 조각의 편리함, 마치 점쟁이처럼 척하고 우리 아이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뛰어난 통찰력, 심지어는 은은하게 드러나는 판매자의 ‘인성’ 같은 것들에서 얻을 수 있다. 구매자는 이 모든 것들을 순간적으로 판단하고 상품을 구매할지 말지를 결정한다.


기우와 기정이는 위의 모든 항목에서 박 사장 사모에게 합격점을 받았다. 영화의 관객들에게 블랙코미디로 여겨지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기우와 기정이는 애초에 사기를 치기로 마음을 먹었기에 사모의 마음에 쏙 들게 행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제공하는 서비스가 실제로 사교육 선생들이 제공하는 그것과 차이가 있을까?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이 기우와 기정이보다 전문적이라거나 효과적이라고 할 수 있나? 기우는 다혜에게 연애를 거는 적절하지 못한 행동을 보였으나, 기정이의 경우는 다송이에게 무릎을 내어 주고 다송이의 가장 친한 친구 자리를 얻을 만큼 잘 일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사기에 웃을 수가 없고, 아무것도 모른 채 불행을 집으로 끌어들인 된 사모를 어리석다고 볼 수가 없다.


이런 말을 하면 당신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으나, 실제로 박 사장 사모 같은 경우는 업계에 흔한 구매자이다. 무슨 말이냐면, 강사가 칭찬과 겁박을 사용하여 달콤한 불안을 자극하며 경계심을 풀게 하면, 그 강사를 작금의 상황을 탈피하여 밝은 미래를 열어 줄 존재로 여기며 적금 통장을 열어서라도 서비스를 구매하는 학부모들은 정말로 많다는 소리다. 기정이가 사모를 ‘미친년’이라 칭하며 깔깔대는 모습이 불쾌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결국 내가 내부 종사자일 것이기 때문이리라. 사모는 미친년이 아니다. 내가 보듬고 나의 시간을 써서 행복하게 만들어 줘야 할, 나의 소중한 고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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