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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Mar 25. 2021

10주. 빌리 엘리어트(2001)

2019. 09. 08. by 만정

나는 내가 운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해왔다. 나의 운이란 능력에 비해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이다. 내겐 그런 일들이 많았다. 그걸 운이라고 하지 않을 때에는 이렇게 말했다. 그 비밀은 남다른 욕구라고. 내게 남들보다 특별한 ‘능력’이 있다면 그 능력은 지치지 않고 욕구를 만들어내고 지나치게 갈망하는 것이라고. 이 설명을 나는 좋아한다. 아는 사람만 아는 비밀이지만, 세계에는 이런 사람들을 위한 공석도 마련되어 있다. 나는 그 틈을 타는 행운으로 소위 말해 ‘남부럽지 않은’ 것들을 얻었다.


내가 원한 것 중에는 다소 ‘맹랑한’ 것도 있었다. 나는 현실적이지도 않았고, 내게 허락된 것만 원하지도 않았다. 나는 고고학자가 되고 싶었고,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었고, 그다음엔 첼로를 배우고 싶었다. 내 주변에 나 같은 사람은 없었다. 나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나는 나의 사회계급적 위치에 어울리지 않는 것을 원했다고. 바이올린을 살 돈도, 배울 돈도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이었는데, 곧 진학할 중학교에 오케스트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레슨비가 무척 저렴한 기회가 우연히 생겼다는 뜻이다. 어쩌다 보니 바이올린은 작은 고모가 배우던 것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이 순간이었던 것 같다. 내가 세계의 비밀 한 가지를 엿본 것은. 난 형편없는 바이올린 주자가 되었고 끝내 잘하는 방법은 알아내지 못했으며, 이젠 다들 알게 되었겠지만 고고학자가 되지도 못했다. 그렇지만 고고학자가 되려는 과정에서 재밌는 수업과 똑똑하고 좋은 친구들이 있는 학교에 다니게 됐다. 그 학교에서 만난 친구가 다니는 회사에 원서를 넣었다 덥석 붙었고, 거기서 번 돈으로 7년이나 첼로를 배울 수 있었다. 회사생활도 첼로도 변변치 않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쩐지 이렇게 좋고 귀한 것들을 누렸다. 내가 한 건 다만 원한 것뿐이었는데 말이다.


‘빌리 엘리어트’를 어떻게 처음 봤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고2 때 개봉했고, 극장에서 못 본 것은 확실하다. 영화를 보기 전부터 이 이야기에 끌렸다. 영화 포스터에선 소년이 점프해 공중에 기분 좋게 떠있었다. ‘빌리 엘리어트’는 영국 광산마을 더럼에서 광부 아버지와 광부 형을 둔 소년 빌리가 우연히 발레에 대한 열정을 발견하고, 어려운 가정형편과 본인이 속한 사회의 편견을 이겨내어 마침내 멋진 무용수가 되는 이야기이다.


나는 이 영화가 좋아서 기회가 될 때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라고 대답했다. 대학입시 면접에서도 그랬다. 11월 어느 날, 엄마와 함께 서울로 가는 시외버스 안에서 혹시 가장 좋아하는 영화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이 영화를 꺼내야겠다고 생각하던 이미지는 지금도 영화 속 빌리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빌리도 로열 발레학교 오디션을 위해 아버지와 함께 런던행 버스를 타는 장면이 있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면접에서 생각했던 질문을 받았는데 그 순간 영화 제목이 생각 안 났던 기억이 난다. 제목을 모른다고 말 못 할 필요는 없으니, 좋아하는 이유는 소년이 꿈을 이루는 이야기라고, 아버지가 광부인 어려운 환경에서 가족의 사랑과 헌신으로 그 꿈을 이루는 이야기가 좋다고 대답했으리라.


이 영화에는 분명 소년이 꿈을 이루는 이야기의 요소가 있다. 어렸을 땐 가족의 도움이 있어 해낼 수 있었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은데, 다시 생각해보면 애초에 빌리가 불가능한 것을 원했다는 쪽이 더 놀랍다. 대처 때 처절한 보복을 당해 만인의 본보기가 된 광부 노조 파업이 이야기를 둘러싼 사회적 배경이니 가난함은 기본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체능은 돈 있는 집이 아니면 어렵다. 심지어 빌리는 오디션 보러 갈 돈도 없는 처지이다. 게다가 남자 중의 남자, 광부들의 사회에서 자란 소년이 권투나 레슬링이 아닌 발레를 한다는 것은 동네의 스캔들 감이다. 그런 마을에서도 발레리노가 되고 싶은 소년이, 또 자신의 성 정체성을 조심스럽게 발견해나가는 소년이 생겨나지만, 허용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빌리는 꿈을 이룬다. 모든 조건이 불가능을 가리키는 상황 속에서 놀랍게도 성공하는 이야기. 나는 이런 이야기를 나의 이야기와 동일시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내 객관적인 조건이 빌리만큼 열악했을 리는 없다.


2년 전, ‘빌리 엘리어트’ 극장 재개봉이 있었고, 이때 처음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 뜻밖에 나는 몇몇 장면에서 눈물을 참지 못했다. 이미 수십 번 보아서 새로울 것도 없는 데다, 나는 이 영화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날 울게 한 것은 아버지의 이야기였다. 파업이 계속되어 점점 더 가난해진 빌리네 집에 크리스마스가 왔다. 땔감조차 없는 형편이 되자 아버지는 죽은 아내의 유품이자 분신처럼 집을 지키고 있던 피아노를 장작 패듯 패어 벽난로에 불을 지핀다. 아버지는 “단지 피아노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윽박지르며 피아노에 도끼질을 했는데, 한때 피아노였던 장작을 연로로 따뜻해진 벽난로 옆에서 아버지는 비참하게 눈물을 흘렸고 나도 눈물을 흘렸다. 또 다른 장면에서, 빌리의 로열 발레학교 오디션을 위해 런던 갈 여비를 마련해야 했던 아버지는 죽은 아내의 패물들을 팔기로 결심하는데, 이때 방에서 눈물을 흘리며 혼자 아내의 목걸이며 반지 같은 것들을 마치 아내 만지듯 만지는 장면이 그렇게 슬퍼 나는 또 눈물이 났다. 처음 영화를 봤을 땐 없던 일이다. 처음에는 큰 스크린으로 크게 보는 배우의 얼굴과 표정 때문에 슬픈 감정이 더 잘 전달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그렇겠지만, 어찌 보면 어느새 빌리 보다는 아버지 입장에 감정 이입할 수 있을 만큼 어른이 된 내 처지의 변화 덕분일지도 모른다.


처음 봤을 때 영화에서 가장 좋아한 장면은 빌리가 미소 짓는 모습이었다. 빌리 역을 맡은 제이미 벨은 실제로도 빌리처럼 춤을 배우는 소년은 자신뿐인 동네에서, 춤을 배운다는 이유로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는 소년이었다고 한다. 영화가 촬영되는 동안에도 제이미 벨은 소년에서 청년으로 빠르게 변해갔고, 이 미묘한 시간이 기록된 그 장면에서처럼 가슴 떨리는 어른스러운 다른 미소를 나는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무엇이 되었든, 앞으로 무엇이 되든, 내가 기억하는 나의 본질은 빌리와 함께 언제나 그곳에서 그런 미소로 돌아보는 나를 안심시켜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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