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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Mar 25. 2021

11주. 벌새(2019)

2019. 09. 15. by 감자

“김일성이 죽을 때 자기는 뭐 하고 있었어?”


80년대 이전 생이 이 질문을 받으면 참 생생하게 그 날의 일들을 기억한다고 한다. 자신이 있던 장소, 하고 있던 일, 함께 있던 사람……. 1994년 7월의 일을 기억해 보라고 하면 손을 내젓겠지만 거대한 역사적 사건과 함께 하는 순간의 ‘나’는 또렷이 뇌리에 박혀 있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 저와 비슷한 질문은 “노무현 죽을 때 뭐 하고 있었어?”라거나 “세월호 뉴스 나올 때 어디에 있었어?”같은 것일 테다.


‘벌새’의 주인공 은희는 1994년에 대치동에서 중학교 2학년을 보내고 있다. 중학교 2학년은 참 독특한 시기이다. 자기 자신은 초등학교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 된 것 같지만 주변에서는 고등학생으로의 진학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고 부추긴다. 은희에게는 한 살 터울인 오빠가 있고 집에서는 오빠가 대원외고를 들어가서 서울대에 입학해야 한다는 진학 계획에 몰두한다. 오빠는 그 계획에 스트레스를 받고 그 스트레스는 은희에게 폭력의 형태로 돌아온다. 대치동에 살면서도 공부를 못 해서 강북에 있는 학교에 다녀야 하는 맏언니는 늘 집에서 구박을 받는 신세로, 은희가 부모님에게 오빠의 폭력을 고발할 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엄마, 아빠는 주공아파트 근처 상가에서 방앗간을 하고 있다. 대목에는 다섯 식구가 모두 떡 만드는 작업에 동원되고, 고된 하루의 끝에는 상당한 양의 현금을 세어 정산하는 노동도 함께 한다. 매일 현금을 만지는 일을 하지만 은희네 가족의 입성은 그리 부유해 보이지는 않는다. 20평형대로 보이는 주공 아파트와 자가용을 소유하고, 중요한 날이 있으면 고기반찬을 해 먹고, 대치동에서 아이 셋을 학원에 보내는, 당시 서울의 평범한 서민 계층이라고 해야 하겠다.


코 끝에서 몽글몽글 콧기름이 솟아날 것 같은 맑은 얼굴을 한 은희는 예쁘고 어리다. 여드름 자국이 있는 남자애와 데이트를 하고, 학원에서 친구와 시시덕거리고, 콜라텍에 가서 신나게 논다. 하지만 은희는 자신의 비극 속에 있다. 집에서는 폭력의 가장 하층부에 놓여 있고 학교에서는 왕따를 당하며 남자친구는 스킨십 후 아무렇지 않게 바람을 피운다. 콜라텍에서 만난 여자 후배는 자기가 먼저 은희를 좋아한다고 해 놓고서는 시간이 흐르자 당연한 듯 사랑이 변했음을 이야기한다. 게다가 오빠에게 맞는다는 고통의 연대로 맺어진 단짝 학원 친구는 절체절명의 순간 은희를 배신한다.


자기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일들이 있을 때 은희는 혀짧은 소리로 “왜요…?”하고 묻는다. 그 ‘왜요’는 음의 낙차가 크고 끝이 떨려서 천진하게 들린다. 어른인 양 하는 사람들은 자기에게 닥친 새로운 상황 앞에서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 상황을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거나 자기 방식대로 이해하고 넘어간다. ‘왜요’는 그 질문 자체로 불경하다. ‘난 이 상황이 납득되지 않는다. 그러니 나를 이해시켜라. 그것이 나의 요구이다.’라는 전복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은희도 더 이상 ‘왜요’를 하지 않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은희의 하루하루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것들로 겹겹이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 그냥 세상은 그런 거구나, 조금 참고 있으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 거구나. 왜인지 알 필요 없는 거구나.


한문 학원에서 담배를 피우는 영지 선생님을 만나게 된 것은 은희의 세상이 의미를 가지게 되는 큰 사건이었다. 서울대를 들어갔지만 휴학을 오래 해서 나이가 많고, 여공들의 노래를 부르고, 푸석한 머리카락에 깡마른 몸에 헐렁거리는 옷차림을 하고 다니는 어른 여자. 영지는 은희를 꼬마로 취급하지 않고 자신과 비슷한 존재로 무덤덤하게 바라봐 준다. 은희는 그 시선 속에서 힘을 얻는다. 궁금한 것을 거리낌 없이 질문하고 영지가 주는 차분한 위로를 받는다. 자기에게 좋은 것을 주는 사람을 금방 좋아하고 마는 은희가 딱 중학교 2학년 여자 아이의 모습이라 마음이 아팠다. 저 나이대의 상처입은 여자 아이의 호감을 사는 것은 어찌나 쉬운지. 그래서 영지가 어떠한 언질도 없이 학원을 그만두었을 때 나는 영지에게 화가 났다. 좋아하는 마음을 얻었으면 책임을 져야 한다. 아무 말 없이 떠나 버린 것이 영지 나름대로의 책임일 수는 있겠으나.


영화 속에서 1994년도 대치동이라는 배경은 중요하게 사용된다. 기존의 주택 거주민들은 날치기 재개발 공사로 인해 불법 점거인이 되고, 개간되어 주택지로 사용될 계획인 빈 터는 불법 농경지가 되었고, 그 땅 어귀에는 퐁퐁(부산에서는 퐁퐁이었다)이 놓여 있다. 1994년에도 중학교 2학년 때도 울산에서 살았던 나는 대치동의 모습은 알 수 없지만 내 주변도 저랬던 것으로 기억난다. 주공아파트에 사는 친척 집을 방문할 때마다 앞이 휑하게 트인 복도를 보며 ‘여기서 떨어져서 죽는 사람도 많을 텐데…….’하고 야릇한 두려움을 느끼곤 했다. 딱히 주된 스토리라인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 영화는 배경이 주는 정서로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고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오는 불안감, 변두리를 맴도는 듯한 상황의 초조함 등.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이상하게 계속 눈물이 났다. 딱히 슬픈 장면은 없었다. 그런데 계속해서 눈물이 주륵주륵 흘렀다. 내가 늙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나는 너무나 수동적으로 내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일을 하고 상황에 따라 내 감정을 출력하고 으레 그러려니 하며 나를 통과하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너무 슬펐다. 영화의 마지막, 은희가 테두리가 또렷한 갈색 눈동자를 고요히 굴리며 자기 주변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나는 마음속으로 은희에게 두 가지를 빌었다. 익숙해지지 마, 하지만 아프지도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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