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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Mar 25. 2021

13주. 고스트 버스터즈(2016)

2019. 09. 29. by 감자

영화관이라는 공간은 특수한 곳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데 모여 앉아서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작품을 바라보지만 그들은 아무런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다. 상영관 그 자체만 따지자면 가장 ‘anti-sociology’한 공간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바로 극도로 개인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영화관의 의미를 찾곤 한다. 시간의 흐름과 타인의 시선에서 완전히 단절되지만 외로움을 느끼지 않으면서 작품을 관람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으로 영화관은 존재한다.


영화관은 공간을 제공하는 부동산이기 때문에 영화관에 걸릴 수 있는 작품은 한정될 수밖에 없다. 어떤 작품을 영화관에서 상영할 것인가 하는 결정은 자본의 논리에 따르기 마련이다. 거대 배급사를 끼고 많은 자본을 투입한 영화는 오랜 시간 상영관을 차지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은 영화들은 일주일 만에 자리를 비키게 되거나 아예 영화관 입성을 하지 못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영화 관련 대학 학과들과 거기에서 배출된 수많은 영화감독 지망생들과 그들이 만들어 낸 수많은 영화들은 대개 많아 봤자 두 자리 수의 관객을 만난 후 감독의 컴퓨터 하드 속에 영원히 매장된다.


그래서, 한 번 상영관에서 내려갔다가 다시 그 자리를 차지하는 영화는 참으로 드물 수밖에 없다. 일전 당신이 언급한 ‘빌리 엘리엇’처럼 명작의 반열에 올라 후세 사람들도 계속적으로 영화관이라는 공간에서 작품을 감상하고자 하는 수요가 많은 영화가 아니라면 말이다. 오늘 글의 소재가 된 ‘고스트 버스터즈 2016’은 아무리 봐도 명작이라고 볼 수는 없다. 장르는 SF 액션 코미디에 과거 동명의 작품을 안일하게 리부트 한, 아무리 좋게 봐줘도 킬링타임 용 영화 이상이 아니다.


혹평을 잔뜩 받은 이 영화는 그런데도, 상영관에서 일찌감치 퇴장하고 몇 달 뒤 후에 재상영이라는 호사를 누리게 된다. 솔직히 말하면 이 영화가 다시 영화관에 걸린 것은 오직 하루, 딱 한 번, 서면 메가박스라는 접근성이 그렇게 뛰어나지는 않은 극장이었기에 ‘재상영’이라는 거창한 말에 어울리지는 않을지도 모르겠으나, 아무튼 한 번 극장에서 내려간 영화가 ‘다시 상영’된 것만은 맞으니 일단은 ‘재상영’이라는 말을 쓰도록 하겠다.


‘고스트 버스터즈 2016’은 옛 ‘고스트 버스터즈’의 주인공들을 성별 반전하여 다시 찍어 낸 영화이다. 3D 기술을 도입했다는 것 외에는 엉터리 과학자들이 한데 모여 괴기한 심령 영상을 우스꽝스러운 코스튬을 하고 해결한다는 내용 역시 별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 영화가 어째서 재상영이라는 놀라운 쾌거를 이루게 된 것인가, 하면.

 

2016년은 그 전 해 우리나라를 강타했던 메르스 공포가 사라지고, 또 다른 공포인 ‘남혐-여혐’ 갈등을 최고조로 끌어 오르게 했던 때였다. 남녀 갈등이 심화되면서 과거에는 소소한 국지적 운동에 불과했던 페미니즘은 과격한 형태를 띠기 시작하였고 이는 사회적 문제로 대두한다. 그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고스트 버스터즈 2016’은 한국에 들어와 기존 1편을 성반전했다는 이유로 인한 ‘페미니즘’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 주연이었던 케이트 맥키넌이 페미니스트로 스스로를 정체성화 했다는 인터뷰도 널리 알려졌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격렬한 반발과 묘한 환대 사이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격렬한 반발 쪽이 영화의 허술한 만듦새와 함께 맞물려 힘이 더 셌던 모양인지, 영화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상영관에서 내려간다. 특히 3D 영상 쪽은 더 빨리 사라지게 되었다. 획기할 점은 이러한 결과로 인해 ‘고스트 버스터즈 2016’은 남성 중심의 사회에 발 붙이지 못하는 여성이라는 이미지를 입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현상에 분노하는 여성들은 많았다. 그들은 목소리를 합쳐 새로운 움직임을 만든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힘을 갖는 방법은 ‘소비’하는 것이기에, 여성들은 ‘고스트 버스터즈 2016’을 다시 팔라고 요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요구는 단관이라는 형태로 현실화된다.


거창하게 사회 현상을 들먹이며 얘기했지만, 한 마디로 말하자면, 3D ‘고스터 버스터즈 2016’이 단관 형태로 딱 한 번 더 서면 메가박스 상영관에 올랐고, 내가 그걸 봤다는 얘기다. 그리고 나는 거기서 인도 뭄바이의 영화관이 이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은 모두 개인이었지만 거대한 단체였고, 비슷한 동지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관객의 99%는 여성이었다. 아마 방탄소년단의 콘서트장도 이러한 극단적인 성비는 아닐 것이다. 낡은 상영관 안에는 간이 의자들이 꽉꽉 차서 만약에 불이라도 났더라면 아주 큰 참사가 일어났을 것 같았는데, 한편으로는 관객들이 모두 한 마음 한 뜻으로 서로를 위하며 대피를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묘한 기대감도 있었다.


영화는 유치하고 깊게 생각해야 할 점은 하나도 없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시종일관 목소리를 높여 유쾌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 자체만으로 우리는 ‘우리’가 되었다. 우리는 함께 깔깔거리고, 야유하고, 대놓고 노린 걸 크러쉬 장면에서는 박수를 치며 흥분했다. 과연 이곳을 영화관이라고 할 수 있을까? 거대한 집회장이 더 가까울 것이었다.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은 분명 시위대가 가지는 취기와 닮아 있었다.


또 재미있는 것은 영화가 끝나고 나자 우리는 즉각 사라지고 개인만이 남았다는 것이다. 관객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그럼에도 나는 새로운 형태의 연대를 맛본 기분이었다. 어둠 속에 가려져 있지만 우리는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아마 영화관에서만 가능한 특수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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