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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Mar 26. 2021

15주. 리틀 포레스트 : 사계절(2018)

2019. 10. 13. by 감자

내게는 작디작은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있다. 위대한 사람이 되어서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맹위를 떨치고, 인류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하는 거대한 인물이 되고 싶다는 마음보다, 더 크고 오래된 욕망이다. 5학년 때인가, 아파트 공사터에 버려진 폐건축물들을 이리저리 끌어다 허름하기 그지없는 비밀기지를 만들어 그 안에 누워 있을 때, 나는 어두워진 하늘과 모두에게 잊힌 나를 상상했고 그러자 이상하게 평화가 찾아왔다. 누구에게도 영향을 주지 않고 이 세상에서 없는 듯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숨 쉬는 소리도 내지 않고 가만히, 잘 보이지도 않게 숨어 사는 달팽이나 소라게처럼 잠잠한 존재. 말도 조용히 하고 걷는 것도 눈에 띄지 않게 하고 싶었다. 그건 쉬울 것만 같았다. 그냥, 살아지는 대로 묵묵히 살기만 하면 절로 작고도 작은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살아지는 대로 살게 되면서 더 시끄럽고 힘쓰고 부산스러운 인간이 되어갔다. 바쁘게 허둥지둥 살아가느라 손발은 더 크게 흔들리고 목청은 더 돋우었다. 생활이라는 상대에게 구애의 춤을 추고 있는 듯한 나날이었다.


오늘 소개할 일본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김태리가 주연한 우리나라 리메이크 작품과는 완전히 다른 영화다. 영화의 호흡이 다르고 세상을 향한 주인공의 대응이 다르다. 김태리의 밝은 에너지는 리메이크 영화 안에서 내내 동적인 리듬을 만들었다. 하지만 원작 영화(진짜 원작은 만화책이지만) 리틀 포레스트는 움직임이 없는 영화다. 


주인공 이치코는 대학 졸업 후 아무도 없는 시골집으로 돌아와 자급자족에 가까운 생활을 한다. 농사를 지어먹을 것을 마련하고 고령화된 마을 공동체의 전통을 따르며 일 년을 보낸다. 어디로도 움직이지 않고 고집스럽게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인물인 셈이다. 물론 자급자족의 생활은 바쁘기 그지없다. 아침부터 밤까지 모든 것을 자기 스스로 해내지 않으면 쫄쫄 굶을 수밖에 없다. 자신이 먹을 것을 만들기 위해 하루 종일을 노동하는 이치코를 보면 도시의 생활이 얼마나 편리한지를 생각하게 되고 그 편리함을 당연하게 누리는 게 이상하게 여겨지게 된다.


산수유를 따서 한 알 한 알 으깨고, 밤의 속껍질을 천천히 벗겨내고, 쌀농사를 짓기 위해 잡초를 일일이 손으로 골라 뽑고, 산나물을 꺾어 먹을 수 있는 상태로 만들려고 몇 번씩 손을 대어 씻고 다듬는 것이 이치코의 하루 일과이다. 정말로 한 끼 먹고 나면 다음 끼니를 위해 일을 하는 것이다. 조리도구 하나 편한 것이 없다. 자동으로 시간을 맞춰 주는 오븐은커녕 화덕에는 장작을 넣어 불을 때야 한다. 그 끝없고 어디에도 저장되지 않는 노동들.


하지만 이치코는 그 모든 일들을 차분히 해낸다. 입을 꾹 다물고는 턱으로 흐르는 땀을 가만히 닦거나 마당에 쌓인 눈을 천천히 치거나 하면서. 그것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한 노동이다. 하늘 아래 나를 도와줄 존재는 아무도 없고, 내가 도와야 할 타인은 아무도 없는, 지독히 개인적인 시간들.


‘리틀 포레스트’가 사람들에게 힐링 영화로 꼽히는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일 것이다. 이치코의 노동은 온전히 이치코에게 귀속된다. 이치코는 어디로도 나아갈 필요가 없고 그저 자신의 자리에 가만히 붙박여 생존하면 된다. 오로지 자연의 흐름만이 이치코의 생활을 좌우한다. 인간은 거기에 저항할 수 없고, 그저 부지런히 따르기만 하면 된다.


나의 생존은 확장을 전제로 한다. 사업은 어제보다 오늘이 더 잘 되어야 하고 미래는 지금보다 더 거대해야 한다. 그렇게 계획하여 움직이지 않으면 나의 자리는 사라진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해야 하고 그 방법이 무엇인지 기민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소비 중심 산업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활 방식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 위대해져야 한다.


힘든 일이다.


나는 나의 하루에 우리 집 발코니를 비질하는 일과를 넣고 싶다. 천천히 먼지를 쓸어 담으면서 바람에 날려 온 씨앗이 없는지 살피고 싶다. 깨끗해진 발코니에는 빨래를 넌다. 빨래집게를 양 옆으로 두 개씩 집어서 주름이 가지 않도록 신경을 쓴다. 밥을 먹고 나서는 반찬 뚜껑을 세심하게 눌러 공기를 빼 닫는다. 설거지는 시간이 갈수록 하기 싫어지니까 일어선 김에 해 버린다. 사용한 도마는 햇빛이 오는 마루에 갖다 널고.


이런 상상들은 나를 쓸쓸하고 행복하게 한다. 나만이 나를 필요로 하는 사소한 존재가 되고 싶은, 힘없고 시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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