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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Mar 26. 2021

16주. 매기스 플랜(2017)

2019. 10. 20. by 만정

언젠가 하루키가 이렇게 쓴 것을 읽은 적이 있다. 때로 사람들은 실제 있었던 이야기를 읽고는 세상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어디 있느냐고 말하고, 순전히 상상으로 써낸 이야기를 읽었을 때 정말 있을 법한 일이라고 말한다고. 나는 이야기에 대한 이 이야기를 좋아한다. 한편으로는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이야기, 어처구니없고 없음직한 이야기들이 세계에 실재한다는 사실이 단순히 흥미롭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야기를 판단하는 기준으로서 ‘정말 일어났을 법한’이 무의미할 수 있음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내적 일관성이나 개연성은 이야기의 중요한 요소일 수 있겠지만, 세상에 누가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막장 드라마라고 하더라도 세상에 그런 일이 일어난 적 없다는 것을. 이야기는 더 자유롭고 놀라워질 권리가 있다.


오늘의 영화 ‘매기스 플랜’은 적어도 내게는 있음 직한 세계를 그려낸다. 우리와 동시대, 뉴욕에 거주하는 매기(그레타 거윅 역)는 30대-아마도- 미혼 여성이다. 혼자 살고 있으며, 정자를 기증받아 아이를 낳고 기를 계획을 갖고 있다. 그러다 우연히 만난 유부남 존(에단 호크 역)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고, 마침내 귀여운 딸을 얻는다. 그렇지만 차츰 남편에 대한 사랑이 식어가는 것을 느끼고 이 결혼생활이 곧 끝나리라 생각할 무렵, 존의 전부인 조젯(줄리안 무어 역)을 만난다. 매기는 조젯과 존이 천생연분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마침내 조젯에게 존과의 재결합을 권하게 된다. 조젯은 이 놀라운 계획에 화를 냈지만 존을 되찾고 싶은 마음에 곧 매기의 계획에 합류하게 되는데...


‘출발! 비디오 여행’ 스타일로 소개하자면 이야기는 대략 이러하다. ‘적어도’와 있음‘직한’으로서 이 이야기의 현실성을 제한적으로 평가한 이유는 이 영화의 요소요소를 상당히 막장스럽게, 다시 말해 황당할 뿐 아니라 심지어 비윤리적으로 보는 평들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 요소들이란 짐작컨대 다음과 같다. 우선 자신이 로맨스에 소질이 없음을 일찍이 받아들인 여주인공은 정자를 제공받아 혼자 아이를 낳고 기르기로 결정한다. 다음으로는, 대학 때 사귀던 남자와는 그의 결혼 후에도 가까운 친구로 지내고 있다. 전 남자 친구뿐 아니라 그의 아내와도 마찬가지이다. 뿐만 아니라, 매기는 남편이 이전 결혼에서 얻은 자녀들을 돌보기도 한다. 그러다 급기야는 남편의 전처에게 자기 남편과의 재결합 의사를 물어보기에 이른다.


물론 남편의 전처와 그 자녀들을 돌보는-단순히 잘 지내는 것을 넘어서는 측면이 (웃음) 포인트이다- 것은 매기가 정원사로서 탁월하다는 캐릭터 설정에 근거한 측면도 있다. 남편을 전처와 이어주겠다는 비범한 계획 역시 계획가로서 뿐 아니라 오지랖적 재능이 남다른 캐릭터의 내적 일관성을 밀고 나간 논리적 귀결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 중 친구조차 남편과 그 전처의 재결합을 추진하는 계획에 기함하는 것을 보면, 관객의 세계뿐 아니라 영화의 세계에서도 매기의 계획이 '일반적'인 것은 아닌 듯하다. 그렇지만 나처럼 그레타 거윅에게 충분히 설득당한 관객이라면 그 의도의 순수성과 선의는 적어도 인정하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그런 인물을 긍정하게 될지도 모른다. 또한, 스스로 아이를 낳을 ‘결정’을 내리고, 남자 없이-정자만 제공받아- 아이를 낳고, 기르는 여성에 대한 설정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런 여성이 오늘날 뉴욕에서조차 있을 수는 있겠으나, 과연 일반적일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일반적이라면 무척 기쁠 것이다. 매기 같은 인물이 존재하고 존재할 수 있는 그 세계는 내가 속해있고 싶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그런 세계가 제법 괜찮다고 생각한다.


한편, ‘적어도’와 있음‘직한’이 제한하는 바와 대조적으로, 이 영화는 매우 구체적인 현실세계에 닻을 내리고 있다. 그리고 내가 이 영화에 급격하고도 깊숙하게 빠져든 것은 바로 이 구체적인 설정과 디테일 때문이다. 우선 오늘날의 뉴욕이라는 시공간이 그렇다. ‘매기스 플랜’에서는 마치 우디 앨런의 ‘맨해튼’ 같은 영화처럼 뉴욕이라는 장소 자체가 영화의 캐릭터가 된다. 로케이션 때문이기도 하지만, ‘뉴욕에서라면 가능한 이야기일지도’와 같은 생각이 든다는 면에서도 그렇다.


시공간보다도 나를 더 강력하게 끌어당긴 구체성은 주요 인물들을 둘러싼 학계라는 배경이다. 예를 들어, 매기의 직장은 뉴스쿨이다. 그녀는 예술경영 석사 소지자로, 예술과 산업을 이어주는 다리로서 일하고 있다. 조젯은 콜럼비아 인류학과 종신교수이고, 존은 혼합비평인류학-실제 존재한다고 한다- 분야에서 활동한다. 조젯은 출판사와 편집자를 결정하기 위해 전남편인 존과 상의하고, 두 사람이 재회한 학회에는 철학자 ‘지젝(물론 실존인물이다)'이 초청되어 온다. 존이 쓴 원고에 대해 조젯이 하는 조언 끝에는 미국 인류학회에서 수여하는 베이트슨 상이 언급된다. 이 영화를 생각하면 이야기의 구조나 큰 흐름이 아니라 이런 이야기의 주변부, 디테일들에 대해 끝없이 말하고 싶어 진다. 사회학계는 아니지만 학계를 배경으로 실재하는 학자, 출판사, 학교가 언급되고 그들의 프랙티스를 엿볼 수 있는 대사가 곳곳에 녹아있는 것이 반가워 자꾸만 보게 되었던 것 같다.


특히 매기의 정자 기증자 가이는 피클 사업가로서, 수학에 뛰어났던 인물로 그려지는데, 매기와 그의 짧은 대화가 아름답고도 웃겨서 수 없이 구간 반복하곤 했다. 왜 수학자가 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가이는, 수학이 아름다워서 좋아한 것뿐이라며, 누구든 수학의 옷깃만 만져도 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고 답한다. 자신은 그 옷깃으로 충분했는데, 평생 진리의 조각만 좇을 뿐 전체는 볼 수 없다는 절망감을 감당할 수 없어 수학자가 되지 않았다는 그 대답이 우스꽝스럽기도 하면서도 왠지 가이에 감정 이입하고 향수를 느끼는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머쓱해한다. 이제는 너무 멀어져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세계가 묘사되어 있어서 이 영화를 찾고 다시 찾았던 것 같다. 아련한 나의 세계. 내 것이었을 수도 있는 세계. 탁월한 유머와 코미디가 구석구석 들어찬 영화인데, 잔뜩 말하고 보니, 그 얘기는 다 하지 못하고 어쩐지 씁쓸한 뒷맛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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