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만정 Mar 26. 2021

17주. 우리는 동물원을 샀다(2012)

2019. 10. 27. by 감자

살아가면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될 확언 중 하나가 “내가 절대 그럴 리가 없어.”라고 한다. 나는 그 잠언을 2주 내내 뼈저리게 느꼈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내가, 부동산 때문에, 그것도 4억이 넘는 아파트를 가지려고, 새벽 세 시가 될 때까지 고민하고 고민하고 고민하는 나날을 보내게 될 줄을. 한 달에 삼십만 원만 벌고 그만큼만 쓰는 생활을 하고 싶다고 꿍얼거리던 내가 말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그런 나의 모습을 상상하지 못했다. 심지어 지난번 글에는 ‘리틀 포레스트’를 들먹이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처 입은 나머지 안빈낙도하는 정갈한 삶을 추구하는 영혼’ 같은 뉘앙스도 팍팍 풍겼으면서 말이다.


2주 내내 부동산 생각만 했고, 내가 하고 싶은 부동산 얘기를 하려고 기억을 더듬다 보니, 내가 아는 유일한 부동산 영화 이름이 툭 튀어나왔고, 그것이 바로 오늘의 영화 ‘우리는 동물원을 샀다’이다. 소소하고 재미있게 보았던 영화인지라 레퍼토리가 떨어지면 한 번쯤 꺼내 쓸 수 도 있겠다 싶긴 했는데, 이게 아파트 청약 얘기를 하기 위해 등장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렇다, 나는 오늘 영화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할 마음이 없다! 이번 영화는 희생된 것이다…!


그래도 주제가 있는 공동집필에 대한 책임을 지고자 간단히 영화 얘기를 하자면, 영화의 모든 것은 제목에 함축되어 있다는 것만 말하면 될 것 같다. 그들은 동물원을 산다. 그리고 거기서 그럭저럭 산다. 끝.

이제 내 청약 이야기를 하겠다.


아무 생각 없이 넣어 놓고 잊어버리고 있었던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었다는 문자를 받은 10 14 오전 8. 청약 당첨 문자는 참으로 간결한 문구로 찾아왔다. ‘감자  비스타동원 당첨(모델하우스, APT2you에서 확인바람)’ 축하한다느니 하는  발린 소리도 없었다. 그래서 나도  문자를 보고는 ‘그렇구나…’하고  생각이 없었다. 부담감이 진하게 몰려온  그다음 날부터였다. 도대체 내가  해야 한단 말인가?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때까지 내가 신청한 아파트의 이름도 몰랐다. 내가 청약 통장을 넣은 단지의 평수도 몰랐고 얼마짜리 뽑기를  지도 몰랐다. 남들은 정화수 떠다 빌어가며 원한다는 청약 당첨인데 아무 생각 없이 참가한   만에 덜컥 걸려 버리다니, 뽑기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파트 청약에 당첨된다는 것은 나의 이후 30년 간의 인생이 정해진다는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4억 천만 원짜리 아파트를 갖기 위해서는 30년간 꼬박꼬박 한 달에 백칠십만 원 상당의 대출금을 갚아야 한다. 이자만 해도 일억이 넘는 돈이다. 30년이라는 인생이 너무 길어서 감이 잘 오지 않는다고 우겨 보려고 했는데, 착공 이후 2년 6개월 후 일억 이천만 원을 잔금으로 바로 치러야 한다는 사실이 짧고 굵게 나를 후려쳤다. 한 달에 400만 원씩을 저금을 해야 시간에 맞게 마련할 수 있는 거금이다. 당장 10월 말에 계약금으로 걸어야 하는 사천 백만 원은 너무 사소해서 돈처럼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이 모든 고통을 견디면 내게 무엇이 남는가? 바로 아파트가 남는다. 무려 30평짜리, 10년쯤 지나고 나면 1억쯤 시세차익을 줄 수도 있는 신축 아파트가 내 것이 되는 것이다. 내가 주인이 될 수 있는 안락하고 따뜻한 집이 생긴다는 상상은 해 본 적이 없어서 더 근사하게 느껴졌다. 내 인생에서 최소한 3억짜리 담보가 되어 줄, 심리적으로 가장 단단한 비빌 언덕이 등장하게 된 셈이다. 아파트를 가진 나는 강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살아가는 것이 조금 덜 무서워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다. 부동산을 갖는다는 것은 내 육신과 영혼과 고통이 깃들일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고인돌, 피라미드, 무용총 등을 지은 옛 지도자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일전에도 말했다시피, 나는 이 아파트를 좋아하고 말았다.


아내와 사별한 벤자민은 사춘기가 시작된 아들과 귀엽기만 한 어린 딸을 데리고 대책 없이 동물원을 사들여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꾸린다. 기묘한 열정과 그보다 큰 오기에 휩쓸려 매매 계약을 체결한 벤자민의 아연해진 얼굴 위로 “We bought a Zoo!”라는 어린 딸 로지의 신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데, 그 귀여운 발음이 이 허무맹랑한 부동산이 가져 올 풍랑을 낭만적으로 느끼게 해 준다. 그리고 영화는 물론 로지를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


어디에 사는가는 어떻게 사는가에 큰 영향을 미친다. 2주 동안 열심히 계산기를 두들겨 본 나는 아무래도 내 소유의 신축 아파트에 들어가 사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2주간 나를 꿈꾸게 했던 아파트는 내 것이 아닌 걸로 판명 났다. 동쪽의 깊은 숲과 서쪽의 작은 초등학교를 가진, 거실 창으로는 자그만 개울이 흘러갈 모습이 보일 나의 아파트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될 것이다. 그 사실에 내 마음은 조금 찢어졌고, 한편으로는 후련함이 느껴졌다. 이번 실패는 내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내게도 어떠한 변화가 생길 수 있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하겠다. 앞으로도 다시 청약통장을 새로 개설해 꼬박꼬박 돈을 부을 것이다. 다음번에는 보다 많은 준비를 해서, 지금보다 더 좋아지게 될 집을 놓치지 않겠다. 첫사랑은 실패했지만 다음 사랑은 성공할 수 있기를.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함은 줄어들지 않는다. 내가 부동산 얘기를 이렇게 진심으로 하고 있다니……. 정말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건가 봐.

이전 19화 16주. 매기스 플랜(2017)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