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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Mar 26. 2021

19주. 봄날은 간다(2001)

2019. 11. 10. by 감자

고전 글쓰기 작법서인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에 이런 훈련법이 있다. 10분이면 10분, 20분이면 20분 이렇게 시간을 정해 두고 오직 그 안에서만 글을 써 보는 것이다. 그 시간 동안에는 내가 쓴 글을 고치지도 말고 앞으로 읽어보지도 말고 계속해서 그저 써 내려가기만 하라는 것이 이 훈련의 특징이다. 계속 그런 훈련을 하다 보면 글쓴이의 마음속 밭이 기름지게 풀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속 호미질을 계속하다 보면 어떤 씨앗을 뿌려도 잘 자라는 글밭이 되고, 운이 좋으면 땅 속에 숨겨진 보물을 찾을 수도 있다.


이 훈련법을 알게 된 이후로 나는 타이머를 켜 놓고 글을 쓰는 경우가 많아졌다. 실제로 글을 쓰기 시작하면 세월아 네월아 두는 것보다 약간의 아슬아슬함이 있는 경우 더 손가락이 잘 움직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제는 그렇게 날림으로 쓴 글을 다시 읽어보지 않는다는 것인데, 물론 작법서에는 그게 맞다고 되어는 있다. 물론 작법서에서는 그렇게 ‘싸내어’ 만들어진 글이 완성본이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지만, 아니 어디에서도 사용하지 말아야 할 것처럼 얘기하고 있지만, 나는 지금도 화면 오른쪽 위에 타이머를 띄워 두었고, 여기까지 글을 쓰는 데 9분 30초가 걸렸으며, 앞으로 남은 시간은 21분여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우리 애초의 컨셉이 김연수와 김중혁의 만담 쇼를 보고 정해진 것이기는 하지만 내가 너무 김중혁스러워지고 있는 기분이라 조금 탐탁지 않은 구석이 있다…! 진중한 글쓰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된 것인가…!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한 시간 반 뒤에는 경주로 갈 기차를 탈 예정이다. 그리고 세 시간 반 뒤에는 당신을 만날 예정이다. 와! 정말 신나지 않은가?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기분이다. 그러니 이러한 각박한 타이머를 좀 참아 주었으면 한다. 놀러 가는 날인데 마감을 쳐야 한다니 뭔가 마음이 엄청 바쁘다. 하지만 다시 말하면 이런 날에도 마감을 하겠다는 나의 의지와, 이 프로젝트에 대한 나의 사랑을 느껴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안다, 도둑 심보인 것을! 


이제 16분 41초가 남았다.


이쯤 되면 슬슬 영화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무슨 영화로 운을 떼야할지 모르겠다. 이번 주는 내내 경주 놀러 간다는 생각만으로 들떠서 뭔가 제대로 생각을 못 하고 살았다. 글을 써야 하니까 소재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나의 영화 경험이 일천하다 보니 이 들뜬 기분을 드러내는 영화가 잘 없는 것이다. 여행에 관련한 마음을 쓰고 싶으니 ‘비포 선셋’이 좋을까? 아니야, 그건 이미 너무 식상해. 검색해 보니 ‘경주’라는 영화도 있네. 심지어 박해일도 나왔어. 이걸 보고 쓸까? 하지만 내게 영화를 볼 시간은 없었다…. 생각해 보면 들뜬 마음을 표현한 영화는 잘 없는 것 같았다. 영화를 찍다 보면 사람은 필연적으로 무거워지는 것일까? 하긴, 15억짜리 무게를 짊어지고 발랄한 기분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잘 없을 것이다. 내가 아는 가장 발랄한 영화는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인데 이 영화의 주요 소재가 좀비이다 보니 경주 여행을 앞둔 상황에선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우리가 찾아갈 곳이 온통 무덤 투성이잖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경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참 없다는 결론이 났다. 많은 것도 같은데(물론 내가 영화를 몰라서 그렇다는 생각은 든다), 따지자면 경주,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같은 곳 아닌가 말이다. 베네치아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많지 않겠어? 아닌가? 솔직히 잘 모르겠다(이 글을 다 쓰고 난 다음에 ‘솔직히’라는 말이 몇 번 나왔는지 세어 보아야 하겠다).


내게 경주는 언제나 기분 좋은 공간이다. 남쪽 지역에 살면서 마음이 싱숭생숭하면 훌쩍 떠날 수 있는 만만한 여행지가 경주이다 보니, 나는 경주를 꽤 여러 번 갔다. 그럴 때마다 가는 곳만 가고,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경주 외곽을 어슬렁거리다가 돌아오기도 했지만, 그래도 내게 경주는 편안한 곳이다. 


경주를 찬찬히 보면 1500년 전에 부흥했던 도시였다는 감상은 크게 들지 않는다. 오래된 건축물들에 검버섯처럼 돌이끼들이 들어붙어 있긴 하지만 오히려 경주는 상당히 키치한 곳이다. 건축법상 높은 건물을 세울 수 있는 지역이 한정되어 있고 한옥을 지어야 하는 구역이 정해져 있어서 경주에는 새삥 한옥들이 많은데, 그 부조화스러움은 높게 높게 지어진 아파트보다 더하다. 1500년을 견뎌 온 건축물 바로 옆에 아무렇지도 않게 10년 된 콘크리트 건물이 버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경주를 관광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만 아무리 그래 봤자 한국의 지방 소도시기 때문에 반질반질한 유지보수와는 거리가 멀다. 안 가봤지만 교토와도 꽤 다른 느낌일 것이다.


하지만 경주에는 편안함이 있다. 그 편안함이란 오래되어서 약간 쉬어 버린 김치에서 오는 편안함과 비슷하다. 오래된 친구 사이에서는 익숙함과 더불어 동질감이 생긴다. 나의 현재를 만들어 내는 데 어느 정도는 기여한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변화를 본다 하더라도 기존의 토대가 먼저 보이게 되고, 그러면서 조금의 낯섦을 느낀 뒤 거기에서 오는 아쉬움과 실망감을 오래된 믿음으로 아무렇지 않게 만들어버리는 세월의 힘을 느끼게 된다. 그래, 이번에 썰을 풀 영화는 역시 ‘봄날은 간다’가 적합하겠다. 어찌 보면 여행 이야기고, 지방 소도시가 나오고, 변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이야기니까. 좋아, 결정했어.


잠시만, 그런데 영화 얘기를 거의 안 했는데 타이머가 26초가 남음을 알리고 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이번에 찜한 영화는 다음번 나의 턴에 좀 더 자세히 풀어 보기로 하겠다. 아니, 이런 꼼수마저 김중혁스러운데, 과연 나 컨셉 이대로 괜찮은가? 어쩔 수 없다, 타이머는 이미 30분이 다 흘렀고, 나의 차 시간은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 이제 곧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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