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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Mar 26. 2021

20주. 비포 선셋(2004)

2019. 11. 17. by 만정

경주에서 돌아왔다. 서울역에 도착하자, 어제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산속에서 하룻밤을 지냈을 뿐인데, 내려오니 십 년이 흘러있었다는 옛날 얘기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현실이 재빨리 이 기분을 흩어버렸지만. 늙고 낡은 도시. 평평한 땅 위, 낮은 건물들 사이에 듬성듬성 솟은 고분들. 고분 사이에 아무렇게나 지은 낮은 집들. 천년 넘게 그 자리를 지켰을 어르신 위에 아무렇게나 자란 나무들. 열두 살 겨울에 칼바람을 맞으며 봤던 불국사는, 단풍 속에서 크고 아름다웠다. 호텔 객실 창밖으로 놀이동산의 롤러코스터를 보며 다음을 기약할 수 있었고, 밤새 내린 비가 씻어 내린 차갑고 깨끗한 공기 속에서 평화로운 아침 산책을 할 수 있었다. 오늘의 영화 이야기는 하룻밤 꿈같았던 경주여행을 위한 것이다.


물론 당신이 식상하다고 하긴 했다. 경주여행을 이야기하기에 ‘비포 선셋’이 그렇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날 하루 19,376보를 걸었다. 걷는 동안에는 거의 쉼 없이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걷고 이야기하는 영화로 ‘비포 선셋’ 만한 영화가 있었던가. 도입부 십 여분을 제외하고는 오로지 2인조의 대화로 점철되어 있다. 게다가 이렇게 찰진 대화는 영화 역사상 손에 꼽힐 것이다. 식상할지는 몰라도 오늘 내 주제에는 완벽하게 부합한다! 나는 실로 오랜만에, 대화의 기쁨을 느꼈던 것이다.


비포 선셋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과 에단 호크, 줄리 델피  사람의 비포 시리즈 삼부작 가운데  번째 영화다. 스물세   젊은이가 비엔나에서 서로와 세계에 대해 온갖 이야기를 나누다 사랑에 빠졌다. 함께 보낸  하루.  사람은 운명과 우연에 자신들을 맡기고 다음 만남을 기약했었다. ‘비포 선셋 9 , 파리에서 이어진다. 비엔나에서의 하루를 책으로 출판한 제시(에단 호크 ) 유럽 홍보투어  들른 파리에서 마침내 셀린느(줄리 델피 ) 재회한다. 이번에는 제시가 미국행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의 시간이 이들에게 주어진다.  시간 동안  사람은 파리를 배경으로 다시 대화를 시작한다.


비포 시리즈를 보면서 항상 감탄하는 부분은 서스펜스이다. 상대적으로 덜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비포 선라이즈’에서도 비엔나에서 하루를 보내자는 제시의 즉흥적인 제안을 셀린느가 수락할 것인가부터 시작해, 두 사람의 대화는 매끄럽고 아름답게 엮일 것인가, 사랑에 빠질 것인가, 무엇보다 과연 이들은 6개월 후 다시 만났을 것인가와 같은 문제로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비포 선셋’은 전편에서 뿌린 떡밥 수거로 시작해, 제시는 과연 미국행 비행기에 무사히 오를 수 있을 것인지 혹은 -좀 덜 흥미로운 질문으로 바꾸자면- 두 사람이 다시 사랑에 빠질 것인지, 관객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매력이 대단하다. 비행기 폭파 인질극도 아니고 은행을 터는 것도 아닌데, 단지 걷고 말하는 두 사람으로 이런 효과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대화의 흐름에도 긴장감이 넘친다. 먼저 서로의 근황을 확인하고, 직업이라는 가장 접근 용이한 외피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다음에는 이제 어느덧 서른둘이 된 각자의 현재, 인생, 나이 듦에 대해 탐문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두 사람 모두 피상적인 대답으로 자기 삶에 만족하고 문제가 없는 것처럼 방어한다. 하지만 점차 결혼과 관계에서 겪는 어려움을, 의무와 현실 속에서 행복하지만은 않음을 서로에게 털어놓게 된다.


이들의 대화에는 약간의 마법이 있다. 9년 전 딱 하루 대화를 나눈 상대인데, 다시 만난 어색함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셀린느가 자신의 외모가 변했는지 물었을 때, 제시의 눈에 가벼운 실망과 안타까움, 슬픔이 스친다. 변함없다는 대답과는 달리 변했다는 응답이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제시는 9년 전 자신이 알던 사람을, 혹은 그와 연속성을 가진 사랑스러운 사람을 찾아낸다. 셀린느는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그날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척 내숭을 떨고, 제시는 썩 행복하지 않은 결혼생활에 대한 언급을 피하고 싶어 하지만, 두 사람은 기본적으로 서로에 대해 진실하고 충실한 대화 상대가 된다. 대화에는 게임이나 왜곡이 없다. 그 전제, 그러니까 이들 대화의 마법은 상대방에 대한 호의일 것이다.


나는 대화가 어렵다. 대화의 가능성에 대한 비관적인 입장은 지난 몇 년 동안 나도 모르는 새 강화되었던 것 같다. 잘 모르는 일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과 의견을 주고받는 일은 크나큰 고통이었고,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였다. 말을 해치우고 지나가도록 두었다. 내 말에는 힘도 의미도 없었다. 말의 재미도 잃었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뿐 아니라 나 자신과의 대화도 점점 짧아지고 경직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경주에서 돌아오던 날, 호텔을 나서는데 갑자기 충만한 기분에 휩싸였다. 포만감 같은 것이었다. 전날 당신과 함께 나눈 대화의 기쁨이 뒤늦게 느껴졌다. 아마도 나는 늘 그렇듯이 불충분하게 얘기하고, 불충분하게 설명했으리라. 돌아보면 불충분한 내 말을 채워주는 것은 항상 당신의 이해였다. 나라는 인간에 대한 이해. 내가 말하지 않은 것, 말하지 못하는 것을 채워서 나라는 사람의 말을 완성시켜주는 완전한 청자. 나의 대화 상대. 그날뿐 아니라 늘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과 이야기 나누는 게 그렇게 신이 났을 것이다. 부족함을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이 완전한 타자인 줄 알면서도 당신과 나눈 대화가 마치 나와의 대화, 한 사람의 서사 같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와의 여행이 괜찮았냐는 뜬금없는 질문을 던진 것은, 당신에게도 그렇게 즐거운 대화가 되었는지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을 표현하는 나의 서툰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만날 때마다 나이를 먹고 서로와 떨어져 보내는 시간이 길어진다.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내 입장에서는 약간의 서스펜스가 생긴다. 내가 너무 변하지 않았을지 신경을 쓰게 된다. 돈 얘기를 너무 많이 하는 건 아닌지, 부동산 얘기를 해 실망시키지는 않을지 주저한다. 그러나 철쭉과 영산홍과 진달래를 구분하고, 절집의 지붕구조를 설명하는 당신 앞에서 나는 곧 마음을 늦추고 대화에 빨려 든다. 움푹 들어간 볼과 상처 같은 이마주름 속에서 그도 나를 찾고 반가워하길 기도하면서. 그러나 우리가 제시처럼 비행기를 놓치는 일은 없다. 우리는 다시 서로의 세계로 돌아가고, 대화는 여기, 지면을 통해서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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