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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Mar 26. 2021

22주.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2011)

2019. 12. 03. by 만정

어느덧 12월이다. 12월을 떠올리면 따뜻함이 연상된다. 차가운 겨울인데도 말이다. 상업성이 만들어낸 푸근한 산타의 이미지 덕분인지, 11월 마지막 주부터 스타벅스에 울려 퍼지는 캐롤 탓인지 모르겠지만, 추위로 고생스러운 1월이나 어영부영 2월과는 다른 느낌이다. 이런 12월이 다가오면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크리스마스 파티 장면이 떠오르곤 한다. 레닌 가면을 쓴 산타클로스의 지휘에 따라 MI6 직원(요원이라고도 한다)들이 소련 국가를 소리 높여 부른다. 비유하자면, 고대 응원단이 연대 응원가를 부르며 놀리는 행위랄까. 동시에 적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드러내는 장면이다. 가관이지만 있을법하지 않은가. 원작 소설에는 없는 유머와 낭만을 가미해 영화가 창조해낸 이 장면을 나는 좋아한다. 뿐만 아니라 손에 꼽는 영화 속 크리스마스 신이기도 하다.


영화의 원작은 존 르 카레의 동명 소설이다. 작가는 그 스스로가 냉전시대 영국 정보부, MI6 요원이었다. 요원으로 활동하던 시절부터 스파이 소설을 발표했고, 냉전 이후에는 테러를 소재로 한 첩보소설을 쓰고 있다.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의 유작 ‘모스트 원티드 맨’, 박찬욱 감독이 BBC 드라마로 제작해 화제가 되었던 ‘리틀 드러머 걸’의 원작이 이런 작품들이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실제 영국의 이중간첩이었던 킴 필비로부터 영감을 받아 쓴 소설로, 은퇴한 전직 요원 스마일리가 영국 정보부 최고 간부 4명 가운데 "두더지", 즉 러시아 첩자를 밝혀내는 이야기이다.


존 르 카레 첩보소설의 재미는 ‘현실적인’ 스파이 세계를 그려낸다는 데 있다. ‘현실적’이라는 게 실제를 모사했다는 뜻은 아니다. 작가의 말처럼, 직업인으로서의 스파이에 착안했다는 의미이다. 존 르카레의 요원들은 잘 차려입고 매끈한 007의 제임스 본드와는 거리가 멀다. 소설에서 묘사하는 스마일리는 외모부터 남다르다. 그는 키작고 땅딸막하며, 옷발도 안 받는 신사다(물론 영화에서는 게리 올드만이 스마일리 역을 연기하기 때문에 원작의 비참한 외모를 살리지는 못한다). 스마일리를 비롯한 수뇌부는 정장을 입고 사무실로 출근한다. 누가봐도 액션과는 거리가 먼 차림이다. 그들이 출근하는 사무실에는 사진과 글씨 속에 파묻혀 있는 직원들이 있다(러시아 스파이들의 흔적을 캐내는 중이다). 현장요원들은 매복도 하고 총도 쏘지만 하급 기술자처럼 묘사된다. 덕분에 정보부는 직무에 따른 서열과 계급이 존재하는 일반 (회사) 조직처럼 느껴진다.


내가 좋아하는 또 다른 요소는 스파이 세계의 ‘전문용어’들이다(작가가 지어낸 허구라고는 한다. 하지만 내가 스파이도 아닌데 허구인지 허구라고 하는 건지 알 도리가 있나). 가령 ‘램프라이터’는 정보 탐문 요원, ‘스캘프헌터’는 암살·회유 전담 요원, ‘베이비시터’는 경계 요원이다. 작가는 다른 직종과 마찬가지로, 직업으로서의 스파이 세계에도 전문용어가 없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 점이 정확하게 작용해, 허구에 현실감을 불어넣는 흥미로운 장치가 되었다.


이러한 원작의 바탕 위에, 영화만의 고유함이 주는 재미도 쏠쏠하다. 바로 낭만적인 분위기이다. 이 낭만의 요소 때문에 나는 이 영화가 스파이 플롯으로 가장한 사랑 영화가 아닌가 자주 생각한다. 혹은 사랑 영화이기 때문에 낭만적인 분위기가 필연적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대부분 실패한 사랑이지만. 원작에서 서브플롯으로 흐르는 여러 연인들의 이야기를 영화에서는 한층 부각한다. 예를 들면,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가 그렇다.


스릴 넘치는 두더지 잡이가 끝난 후 주요 인물들을 퇴장시켜주는 엔딩 시퀀스에서는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La Mer’가 흥겹게 흐른다. 먼저 크리스마스 파티에서는, 짐-빌 커플이 애정 어린 눈빛을 교환한다. 이들은 정보부 내의 비밀 동성 커플이었는데, 빌의 배신(배신의 내용은 스포일러다)에 대한 짐의 간결한 복수는 눈물로 끝난다. 복수를 마친 짐(마크 스트롱이 연기했다)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 한줄기가 크리스마스 파티 장면과 대구를 이뤄 로맨틱하다(너무 대놓고 로맨틱해서 오글거린다). 다음 장면에서는 이중첩자를 잡는 데 핵심 정보를 제공한 인물 리키가 연인이 죽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비 내리는 거리에 착잡한 표정으로 서있다. 아마 빗물과 함께 눈물이 흐르겠지. 아직 'La Mer'의 흥겨운 리듬은 멈추지 않는다, 아니 한번 더 키를 올려 조바꿈을 하고 마지막을 향해 나아간다. 영화는, 조직으로 복귀해 영전한 스마일리에게만큼은 원작과 달리 떠난 부인과 재회하는 기쁨을 허락한다.


이중 스파이를 찾는 과정이기 때문에, 소설에는 많은 이야기가 복잡하게 전개된다. 영화에서 모든 디테일을 담아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는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갖는 흔한 핸디캡이기도 하다. 그러나 매체의 장단점은 교차한다. 영화를 본 후 나는, 복잡한 줄거리를 생각하기보단 나긋나긋하고 시원시원한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La Mer'를 흥얼거린다. 차갑고 우울한 스파이들의 세계보단 음악 위로 흐르는 사랑이야기를 떠올리는 것이다. 이것은 소설이 대신할 수 없는 영화적인, 영화만의 마법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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